초록비 녹우당의 초록빛 은행나무
초록비가 내리고 초록으로 물든 녹우당(綠雨堂)에서는 스쳐 가는 바람도 초록색이다. 또 이곳 해남 윤씨 고택의 유적·유물을 통해 한 시대의 일이 쌓여 역사가 됨을 알게 된다.
여기 연동마을의 녹우당은 1501년 윤선도의 4대 조부 윤효정(1476∼1543)이 도강 김씨와 탐진 최씨들이 살던 곳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집을 짓고 살면서 2차례의 화재가 있었다. 어느 날 윤효정의 꿈에 하얀 옷의 노인이 ‘지금의 자리는 산강수약(山强水弱)하니 자리를 옮기고 현재의 터는 못을 만들어 흰 연꽃을 심으라’고 했다. 이에 집을 옮기고 연못을 만들자 화재가 없었으며, 백련동(白蓮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백련지는 그렇게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이치로 만들어졌는데, 네모난 형태의 연못은 땅이요, 연못 속의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연지에 물이 가득 차 그 물속에 덕음산의 산 그림자가 비추이면 집안과 마을이 번성한다’는 유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지의 섬을 ‘몰(말)무덤’이라 하는 것은 고기(漁)를 잡고 나무(樵)하며 조용히(隱)살고자 하는 어초은 윤효정의 뜻이 반영된 말이다. 윤두서가 백마를 다 그리고 난 뒤 그 백마가 죽어서 묻었다는 전설은 맘이 몰이 되고 몰이 말로 변한 탓이다. 윤두서가 이곳에 있을 때는 눈이 좋지 않아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남 윤씨가는 윤효정 이후 5대에 이어지며 과거 급제자가 나와 명문으로, 해안 간척지를 개척하여 재력가가 되었다. 그러다 남인을 이끌던 윤선도가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귀향하였고, 소박한 시골집 녹우당은 큰 변화를 갖게 되었다. 윤선도는 수원집의 사랑채를 옮겨오고, 백련지를 큰 규모로 개수했다. 수원의 사랑채는 효종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이다. 이를 1668년에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왔던 것이다.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 이후에 녹우당은 더욱 풍성해졌다. 이전의 종갓집에 보태어 1821년 가묘와 3개의 사당이 중건되었다. 이어 행랑채를 신축하고, 1938년에 녹우당 뒤 재각인 추원당을 신축하였다. 현재의 녹우당은 그렇게 400년간의 증축과 개수의 과정을 겪은 결과물인 것이다. 그리고 녹우당이란 현판 글씨는 윤두서의 친구인 ‘이서’의 글씨다. 또한, 이때부터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의 외증손이자 실학자인 정약용, 남화의 대가인 허유 등이 머물고 교류하여 녹우당은 문화예술의 부흥처가 되었다.
여기 녹우당 뒷산 9만여 평에 이르는 ‘해남연동리비자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241호이다. 조림숲이니 1대 나무는 5백 5십여 살이다. 이 비자숲을 보호하기 위해 윤씨의 선조는 ‘뒷산의 바위가 노출되면 이 마을이 가난하여진다.’는 유훈을 남겼다. 그리고 후손들은 이를 잘 지켜 오늘의 자랑이 되었다. 이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지에서 자라며 작은 잎끝이 두껍고 뾰족하다. 봄에 핀 꽃이 가을에 길고 둥근 열매가 된다. 나무의 수형이 아름답고 열매는 구충제, 변비 치료제, 기름을 짜기도 한다.
또 녹우당에는 3백 살을 넘긴 해송 한 그루와 나이가 비슷한 회화나무가 있다.
그리고 초록비 녹우의 상징인 은행나무는 윤효정이 그의 아들의 과거급제를 기념하여 심었다 한다. 처음에는 아들 4형제처럼 4그루였는데 지금은 2그루만 남았다.
해남 윤씨가의 역사를 지켜본 이 은행나무는 자태가 웅장하며 가을에 황금빛으로 물이 들면 푸른 비자나무 숲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