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상가시절 2008년도 이다. 계산1동 시장1층 화실을 3년 잘 하고 2층 좋은 화실 5년 하고 주인이 쓰겠다고 비워달라 한다. 그 화실때가 아주 좋았다. 매일 서예하고 큰작품 하고 행복했었다. 주인이 쓴다 하니 나가야 한다. 이사하는김에 윤경이 출산 때문에 윤경이네 가까운데로 옮기니 기존 학생들은 멀어서 모두 가질 못한다. 화실은 이사해서 학생은 몇명 새로 왔고 소득은 적고 은행 대출이자는 꽤나 많았다. 윤경이는 만삭이고 육아휴직 이라서 봉급을 제대로 못받는 시기이다. 돈이 다급한 나는 파출부 를 신청하여 아주상가 가까운 현대 아파트에 노인부부 점심을 챙기는 일을 다녔다. 한달 했는데 겨울인데도 자전거로 2Km를 달려가서 일을 하고 그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 화실로간다. 몸이 아픈 할머니 를 간병했다. 반찬을 공들여서 여러가지 해도 동치미국물 만 드시는 입맛을 다 잃은 노인 이셨다. 그나마 요양사를 부르기로 하여서 나는 한달 일하고 60만원을 받고 그만두게 되었었다. 다시 청소부 일이라도 하겠다고 연구 하는데 내가 팔이약해서 청소부는 3일 하면 병날것만 같았다. 내가 파출부를 다닐때 만삭인 윤경이가 많이 울었다고 한다. 청소부 이야기를 듣고 지용 이가 놀라서 매달 80만원을 보낼테니 그런일을 하지 말라고 한다. 지용이는 연대박사과정 중인데 학교에서 돈을받고 공부중 이었었다. 그후 지용 이가 보내주는돈으로 화실월세를 물고 살았다.한 2년 이상 그 화실에 있었고 의료보험비와 학자금 대출 도 내가 갚아나가고 있었다. 차츰 장애인 활동보조 소득이 6~70만원 생겨서 지용 이 돈은 화실정리하고 줄여서 받게 되었다. 지용이가 가엾었다. 2010년도에 세 내는 화실을 정리 하고 무료 화실로 가서 얼마간 하다가 2011년도에 화실을 접었다. 그해 지용이가 여름 에 박사학위도 따고 가을엔 결혼도 했다. 집으로 들어와도 장애인활보 소득이 이어져서 좋았다. 자전거로 영하의날씨 인 야밤에 집으로 돌아오던 그시절이 눈물겹다. 장애인 활보는 문구 상호 하다가 원규 를 1년 하고 어떤 중풍 맞은 여자와 함께걷기 5시간 짜리 도 했었다. 그집은 점심을 안먹는 집이어서 배가고파서 머리가돌것같은 경험도 하였다. 나더러 이아줌마는 배고픈거 못참는구나. 이런말도 들었다. 토요일은 이틀먹을 카레나잡채를 해놓고 가라던 일이 많은집이었다. 삼식이가 세명 있는 집이 라서 큰밥솥국 솥이 무거웠다. 어 떨땐 콩나물을 한박스나 사와서 삶아 놓으라고 한다. 가끔은 아들것인지 흰와이셔츠를 다라이에 두세개 담그어놓고 손빨래를 해달라고 하였다. 손빨래를 하고 일어날때 허리도 삐끗한적이 있었다. 그 집을 갈때 교대 동산을 넘어서 걸어가다가 눈오는날 미끄러져서 뒷통수를 땅에 부딪힌적도 있었다. 사람을 이용 하고자 나를 자기네공장에 위장전세 사는 서류를 만든다는것을 거절 했다. 일이 끝날즈음 영감이 나를 태우러 와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 여자를 거리에서 마주칠때가 있지만 밥굶던 기억이 나서 않좋다. 내가 굶기가 힘들어서 햄버거를 사면 그 여자를 나누어 주고 먹었다. 모자라게 먹어도 고통 이 왔다. 활동보조 카드를 깜박잊고 가져온 날이 있었는데 그뒷날 가져간다고 했더니 당장 가져오라 해서 택시타고 갖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