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츠 빈터할터의 1852년 작 ‘나폴레옹 3세’./이진숙 제공
1871독일 제국 탄생이 선포되었다. 그런데 선포 장소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바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독일은 프랑스의 심장 한복판에서 제국의 탄생을 선포함으로써 나폴레옹에게 당했던 오래된 수모를 되갚았다. 1806년 나폴레옹은 독일의 전신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해서 독일을 오합지졸의 선제후국으로 전락시켰었다. 그런데 독일의 프랑스 입성에 빌미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폴레옹의 조카로 알려진 나폴레옹 3세(1808~1873)였다. 삼촌 때 벌인 일을 조카가 빚 갚음을 한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그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덕에 출세했고, 그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 분투했고, 그 이름처럼 되었다. 프란츠 빈터할터가 그린 공식 초상화가 말해주듯 그는 나폴레옹과 외모상 닮은 점이 별로 없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동생과 조세핀 왕비의 딸 오르탕스 사이에 태어났으니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의부 외손자였다. 어머니의 복잡한 사생활 때문에 '진짜 나폴레옹'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끊임없이 돌았지만, 그는 진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다.
삼촌 나폴레옹처럼 조카 나폴레옹도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쿠데타로 황제에 등극,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그의 쿠테타에 반대했던 대 문호 빅토르 위고는 '꼬마 나폴레옹'이라는 소설을 써서 그를 조롱했다. 사실 특별한 업적이 없던 그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1848년 혁명 이후 처음으로 투표권을 가지게 된 보수적인 농민표가 그에게로 몰렸기 때문이다. 1815년 나폴레옹 1세의 몰락 후 프랑스에서는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돌아온 왕들의 집권기는 무능력과 부패로 얼룩졌다. 경제 파탄 속에 배고픈 국민들은 결국 1848년 혁명을 일으켰다. 과격파들이 다시 득세하는 가운데 농민들을 중심으로 '나폴레옹 향수'가 번지면서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쿠테타로 황제가 되었다.
행운은 그에게 미소 지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화되어서 자유와 언론은 탄압은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산업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시가지의 재정비 사업이 시행되어 파리는 '수도 중의 수도'로 거듭났고,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어 영광의 시기를 맞았다. 나폴레옹 3세는 삼촌 나폴레옹처럼 외교적 업적에 집착했다. 그는 여러 나라 내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제국주의'는 조카 나폴레옹3세가 삼촌 나폴레옹 흉내를 내면서 고대 로마제국처럼 끊임없는 팽창주의로 일관한다는 뜻에서 비판의 의미로 등장한 용어이다.
그는 결국 삼촌 나폴레옹과 같은 길을 갔다. 연이은 외교 실패로 그의 국내 지지 기반은 점차 좁아져 갔다. 그의 결정적인 패착은 프러시아와 벌인 보불 전쟁이었다. 독일계 세력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유감스럽게도 삼촌과는 달리 '꼬마 나폴레옹'은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다. 비스마르크가 실권을 쥔 프러시아의 군사력은 조직과 병력, 군비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전쟁 개시 두 달도 안 되어 황제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국가의 자존심을 구긴 그를 프랑스 국민은 용서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3세의 무모한 보불 전쟁은 두 가지 세계사적 사건으로 귀결되었다. 앞서본 독일제국의 탄생과 파리 코뮌이다. 그가 포로로 잡히자마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그는 결국 실각했다. 독일에 굴욕적으로 투항한 데 대한 국민적 저항은 시민·노동자 봉기로 설립된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으로 귀결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독일에 6개월간 억류되어 있다가 영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3년 뒤 삶을 마감했다. 그는 '나폴레옹 향수'를 기반으로 등장했지만, 이제 누구도 '영웅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에 대해 더 이상 어떤 향수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