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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여행 후기 스크랩 흑산도 여행 ① : 유배의 섬 흑산도에 숨어 있는 비경들
갈하늘 추천 0 조회 1,007 17.12.18 06: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흑산도(昇鳳島 )

 

여행일 : ‘17. 10. 7()-8(일)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본도 투어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우리나라 서남단(西南端) 해역의 끝자락에 위치한 섬으로 목포에서 92.7km 떨어져 있다. 19.7의 면적에 해안선 길이는 41.8km에 달하고, ‘tv-N’에서 인기리에 방영된바 있는 삼시세끼-어촌편에 등장했던 '만재도'와 같은 11(대흑산도, 장도, 영산도, 대둔도, 다물도, 영산도, 홍도, 상태도, 하태도, 중태도, 가거도, 만재도)의 유인도와 89개의 무인도로 이뤄진 제법 큰 섬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28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에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마을이 형성됐고, 조선 숙종 때에는 흑산진을 설치해 서남해안의 국방기지로 삼았었다.

 

찾아오는 방법

흑산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목포 연안여객선 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흑산도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흑산도까지 두 시간이 걸리는 쾌속선으로 하루에 네 번(7:50, 8:10, 13:00, 16:00) 운행되며 요금은 34300원이다.




배의 출항까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목포의 명물이라는 갓바위(천연기념물 제500)’를 찾았다. 해수(海水)와 담수(淡水)가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목포의 갓바위는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풍화혈(風化穴; tafoni)로서 삿갓을 쓴 사람의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풍화혈은 노출암괴에서 수분이 암석내부로 쉽게 스며드는 부위(균열 등)에 발달하며, 스며든 수분의 부피변화로 야기되는 물리적 압력에 의해 암석을 구성하는 물질이 보다 쉽게 입상(粒狀)으로 떨어져 나오는데, 일단 풍화혈이 생성되기 시작하면 이곳은 햇빛에 가려져 더욱 많은 습기가 모여 빠른 속도로 풍화되면서 풍화혈은 암석 내부로 확대된다.(문화재청)



갓바위는 예부터 목포가 자랑하는 명승지였다. 하지만 바위가 해안 절벽에 기대어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불편을 감안해 목포시는 바다 위에 갓바위 주위를 한 바퀴 도는 해상 다리를 놓았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갓바위는 8m6m짜리 바위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큰 바위가 아버지 바위, 그리고 작은 바위는 아들 바위라 불린다. 어쩌면 전설(傳說)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주 먼 옛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살림살이는 궁핍하였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으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았고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손과 발은 이미 식어있었다. 젊은이는 한 달 동안이나 병간호를 못 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저승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실수로 그만 관()을 바다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젊은이는 불효를 통회하며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고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훗날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를 아들 바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부처님과 아라한(阿羅漢 : 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성자)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바위가 되었다고 해서 이를 중바위(스님바위)’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바닷가 도시들은 대개 화려한 야경(夜景)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하지만 그게 아침까지 이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바다건너 부둣가 가로등만이 외로운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아침이어서 좋은 점도 있다. 바닷바람이 실어다 준 바다 향기가 더없이 강하게 코끝을 간질이기 때문이다.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한 향기이다. 아침이라서 그 바람이 조금 쌀쌀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먼 바다로 나가려는 여행객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멀어도 한참을 멀었다.




목포에서 흑산도의 관문인 예리항()’까지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100Km가까이 되는 바닷길임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빠른 속도라고 볼 수 있다. 하긴 34300원이나 되는 뱃삯을 내고 탄 쾌속선이니 그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예리항에 닿는 순간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고 한다. 거대한 섬의 덩치에 한번 놀라고 예리항의 북적거리는 분주함에 또 다시 놀란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흑산도는 이웃 섬인 홍도를 가는 길목의 징검다리 역할만 수행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흑산도를 둘러싸고 있는 새끼 섬들의 비경(祕境)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홍도에 버금가는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더군다나 톡 쏘는 듯한 맛이 별미인 흑산 홍어가 대표적인 특산물로 널리 알려지면서 구경도 하고 홍어 맛도 보는남해안 최고의 섬 여행지로 인정받고 있다. 참고로 흑산도는 고려시대 이후로 끊임없이 강요되던 공도(空島) 정책으로 인해 주민들이 지금의 영산포로 강제 이주 당했던 적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흑산도는 옛날에는 흑산현이라 불리었다. 흑산폐현은 나주의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흑산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에 옮겨 살았으므로 영산현이라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한 천읍(遷邑)의 이유와 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상황으로 보아 다른 신안군의 섬들과 운명의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왜구들의 잦은 침략에 대한 거점지역을 없애기 위한 일환이었지만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고 육지로 쫓겨나야 했던 섬 사람들에겐 혹독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흑산도는 고려시대에 나주목에 편입되어 흑산도라 칭하였으며 조선시대인 1888(고종25)에는 흑산진을 설치하여 만호(萬戶)를 두었다가 1896년에 이르러 지도군에 편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면 엄청나게 큰 표지석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흑산도가 기암괴석과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라며 한껏 기세(氣勢)를 돋우고 있다. 맞는 말일 것이다. ‘흑산도가 본디 섬 전역에 울창한 산림이 발달해 있어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니까 말이다. 바닷가에는 이곳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임을 알리는 표지판도 세워 놓았다.




흑산도의 지도 위에다 주요 관광지들을 표기해놓은 커다란 흑산도항안내판도 보인다. 흑산도의 중심 항구(港口)는 예리항이다. 그러나 처음에 항구가 들어선 곳은 진리였다고 한다. ‘진리라는 이름은 수군(水軍)의 진()이 설치되어 있었다는데서 연유한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반증한다 할 수 있겠다. 진리는 흑산진영이 있었으므로 진말, 진촌, 대진이라 부르다가 이후 진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또한 '예리'는 산줄기가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온 목이 된다하여 끌미, 예미, 예촌이라 부르다가 이후 '예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흑산도는 새()의 모양으로 생겼으며 '예리'는 새의 입에 속하는 마을로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형세라고 한다.



선착장 앞에는 꽤 많은 숫자의 투어버스(tour bus)‘들이 대기하고 있다. 관광객들을 태우고 흑산도를 한 바퀴 돌게 될 버스이다. 버스 전면 상단에 적혀있는 대박 가이드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 가이드가 운전기사인 것을 알고 떨떠름해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여느 유명여행사 가이드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구수한 음담패설(淫談悖說)‘까지 섞어가는 것을 보면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흑산도에는 섬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일주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육로를 통해 흑산도의 명소를 탐방할 수 있다. 25.4에 달하는 이 일주도로는 1984년 착공해 27년만인 지난 2010년 완공되었다. 중간에는 열두 구비고갯길도 있고, 하늘 위에 떠있는 듯한 하늘도로도 있어 일주도로 자체만으로도 멋진 볼거리가 되고 있다.



흑산도 여행은 크게 육로와 해상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백미(白眉)는 육로인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여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그마한 배가 올망졸망 매어 있는 그림 같은 섬마을 포구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우리 같은 여행객들은 투어버스를 이용해서 섬을 돌기 마련이다. 그 버스가 첫 번째로 멈춰선 곳은 진리에 있는 '지석묘(支石墓, dolmen)'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차에서 내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차창 밖으로 눈요기나 하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에는 6기의 지석묘가 모여 있는데 타원형의 남방식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줄무늬와 빗살무늬토기, 돌창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흑산도의 지석묘는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로써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아 1994년 문화재 자료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흑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대체로 장보고의 활동시기로 본다. 하지만 이 고인돌들을 보면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모양이다. 그 증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1968년 서울대 한상복 교수팀에 의해 큰 규모(가로 25m에 세로 30m)의 신석기 시대의 패총(貝塚)도 발견됐다. 이 패총은 고고학계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가치가 있다고 해서 지방기념물 제130호로 지정된 바 있다.



다음에 멈춘 곳은 진리당이다. 매년 정초에 무사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堂祭)를 지내오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잠깐 멈추어줄 뿐 내릴 수는 없다. 아쉬운 마음을 당()에 대한 전설로 대신해 본다. 마을을 보호하는 신()들은 여신이 대부분인데, 이곳 진리당 역시 처녀신을 모시고 있다. 먼 옛날 열흘에 한 번씩 흑산도를 오가며 옹기를 팔러 다니던 배가 있었다고 한다. 선원들이 옹기를 팔러 떠나고 배를 지키던 소년이 무료함을 달래려고 피리를 불었는데 이게 보통 솜씨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리당을 지키던 처녀신이 반해버렸으니 말이다. 그 결과 처녀신은 배가 출항할 수 없도록 풍랑을 일으켜버렸고, 여차여차 해서 선원들은 그 소년을 섬에 남겨 놓고 떠나게 되었단다. 소년이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 지쳐 죽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섬사람들은 소년을 그가 숨진 자리에 묻어주고 당()에는 화상을 모신 후 매년 정초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무심사지와 석탑들을 지났다 싶으면 가이드의 멘트는 맞은편 산자락에 쌓아져 있다는 상라산성(上羅山城)’ 얘기로 옮겨간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 고갯마루 위에 올라선다. 전망데크에 서면 람사르 습지로 유명한 장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첨부된 사진은 상라산으로 올라가면서 찍은 것으로 대체했다.)





전망데크의 맞은편에는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열이면 열, 흑산도를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는 명소이다. '흑산도아가씨'1969년에 개봉한 동명 영화의 주제가인데 노래 가사가 한편의 애절한 시()이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애달프기 짝이 없는 이 가사의 모티브(motive)는 아이러니(irony)하게도 이 섬에 있는 심리초등학교라는 작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로부터 얻었다고 한다. 작곡가인 고() 박춘석선생과 작사가 정두수가 영화 주제가로 고민하던 때에 고 육영수 여사가 해군 군함을 주선해 흑산도의 심리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청와대에 초청했다는 기사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 흑산도의 '검은 뫼 섬'이라는 이미지와 그리움을 가진 섬 여인들의 한을 결합시켜 노랫말을 지었다는 것이다. ! 이미자가 부른 노래는 1천 원 권 지폐를 내야 나온다고 들었는데 직접 시험해보지는 못했다. 상라산에 다녀오느라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노랫가락을 되뇌어 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이 노랫말에는 흑산도 사람들의 마음이 들어있는 듯하다. 섬이라는 갇힌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더욱이 여자의 몸이었다면 평생에 한번 이 섬을 떠나 육지로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외로운 섬을 떠나 더 큰 세계가 기다릴 것 같은 육지를 향해 그렇게 흑산도아가씨들의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는 갈망을 안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흑산도 아가씨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파시(波市). 어업전진기지였던 흑산도에서는 계절마다 조기, 고래, 고등어 파시가 열리곤 했다. 항아리처럼 생긴 흑산항에 배가 모여들면 한창 때는 2000대 가까이 들어와 배 위에서 직접 장사를 했다. 빼곡히 모여든 배들이 불을 밝히니 바다 위에 도시 하나가 생긴 듯도 하고 선착장이 있는 예리항에서 진리까지 배를 밟고 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만선(滿船)이 되고 한때는 파시가 열려 돈이 모이면 흥청 되던 항구, 뱃사람들의 너털거리는 웃음과 함께 바닷바람에 젖은 그들의 피로감을 풀기 위한 행선지였던 술집, 그곳에는 육지에서 이곳 섬까지 흘러온 아가씨들의 애환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처녀들 또한 흥청거리는 항구를 바라보며 막연히 육지를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들고 나는 물결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밀려오는데 그저 먼 곳만 바라보다 검게 타버렸을 여인의 마음, 그 애타고 답답한 마음이 노래에 담겼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흑산도아가씨 노래비'는 바다가 멀리 보이는 상라산 근처의 고갯마루에 세워져 있다. 1997년에 세워졌고 2012년에는 가수 이미자씨가 흑산항에서 콘서트를 하면서 핸드 프린팅(hand printing)’을 남겼다.



고갯마루에는 해안누리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에 진리해안길이라고 적혀있는데 산도 바다도 처녀가슴도, 검게 타버린 흑산도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뒤적거렸던 ‘1300리 해안누리길이라는 책에서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 전국의 걷기 좋은 해안길 53곳을 엮은 책인데 더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해안누리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길에 숨겨진 역사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안내판은 상라산 정상에서의 조망과 상라산성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놓았다. 진리해안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었더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말이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소설가 김훈의 약력과 그가 지은 흑산(黑山)’이라는 소설에 대해 적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김훈은 칼의 노래현의 노래’. 그리고 최근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남한산성만 지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약전(정약용의 형)과 천주교 박해사건을 다룬 역사소설인 흑산또한 많은 이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설은 마제(남양주)의 정씨 가문 4형제와 매제인 황사영이 중심에 서있다. 역사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정약용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의 존재는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흑산은 정약전이 유배지인 흑산도로 향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궁핍하고 힘들었던 삶과 더불어 시대의 벽을 뛰어넘어 또 다른 삶을 꿈꾸던 조선 최고의 지성(知性) 정약전과 그 주변의 인물들의 이야기, 즉 암흑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한줄기 빛인 천주교라는 종교를 통해 거듭 나고자했던 사람들의 가슴시린 이야기이다. 그러니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과 황사영에 포커스(focus)를 맞추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내용을 모두 시시콜콜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김훈이 피력한 정약전의 마음까지도 잊지는 말자. 그는 155종의 어류에 관한 책을 엮으면서 <'흐리고 어둡고 무섭다는 이미지의 흑산(黑山)‘이 아닌 '희미하지만 빛이 있고 이제 여기서'라는 의미에서 '자산(玆山)’>이란 이름을 붙였다.



상라산성(新安 黑山島 上羅山城 :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239)의 안내판도 보인다. 반달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반월성이라고도 불리는 산성이다. 안내판에는 고대~고려시대 국제 해양도시 역할을 했던 흑산도 읍동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관방시설로 추정된다고 적어놓았다. 인근(읍동마을 뒤편의 계곡 초입부)에 사신단 및 무역 상인들이 머물던 관사(館舍) ’, 그리고 관사의 맞은편 골짜기에서는 무심사지(无心寺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산성 서쪽의 상라산 정상에는 봉화를 피우던 봉수대(烽燧臺)도 있었단다. 이는 장보고의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까지 한국과 중국 간 교역활동에서 흑산도가 차지하고 있던 중요한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상라산성은 산의 정상 부근이나 중간부분을 거의 동일한 레벨로 둘러싼 전형적인 테뫼식과는 달리 산복식(山腹式)에 가까운 테뫼식 산성이다. 전체길이 280m의 소형산성으로 남사면(南斜面)만을 반월형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순수 석축부분의 길이는 220m이다. 해안에 면한 북쪽 능선의 경우는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고 100m에 가까운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갯마루에 멈춰 선 투어버스가 무려 20분이나 자유 시간을 준다. 볼 것도 별로 없는 곳에서 말이다. 아무래도 상라산 정상에 다녀오라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산자락으로 들어붙고 본다. 지난 여름에 파열되었던 인대가 조금은 걱정 되었지만 나 역시 그들을 따르기로 한다. 오르막길의 경사가 조금 가팔랐지만 별 어려움 없이 정상(해발 230m)에 올라설 수 있었다. 안전시설이 잘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거리까지 짧았기 때문이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올라가는 길에 상라산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옛 성터가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정상은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을 보여준다. 아까 고갯마루에서 보았던 장도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저 멀리 구름사이로 떠있는 홍도와 주변의 섬들 그리고 예리항까지 그림처럼 펼쳐진다.






발아래에 조금 전에 올라왔던 도로가 내려다보인다. 일주도로를 만들면서 새로 낸 길이라는데 상라산성을 끼고 구불구불 아흔아홉 구비를 돌 듯 고갯마루까지 올라온다. 올 여름에 노르웨이에 갔을 때 세계 10대 위험한 길중의 하나라는 요정의 길(trollstigen)’을 지났었는데, 그곳만큼 오금이 저리지는 않지만 천 년 묵은 구렁이가 지나가기라도 한 듯이 구불거리고 있는 모양만큼은 더 아름다워 보인다.




다시 길을 나선다. 얼마 후 이곳 흑산도의 대표적인 바위명승인 '지도바위'를 만나게 된다. 말 천 마리가 모인 형상인 천마산의 정기를 받은 곳이라 하여 모듸미라고 불리던 마리마을과 흑산진이 있던 진리마을의 산 너머에 있다 하여 전듸미라고 불리던 비리마을사이의 해안가에 떠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중앙에 뚫린 구멍의 생김새가 한반도의 모양과 닮았다 하여 '지도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지도바위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낸 자연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잠시 후 하늘도로라는 안내멘트가 들려온다. 깎아지른 절벽에다 억지로 길은 내다보니 교각(橋脚)이 없는 테라스(terrace)형의 도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절벽에 삐죽 선반을 달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선반도로라고도 불린단다. 중국을 여행할 때면 흔하게 만나게 되는 잔도(棧道), 즉 절벽에 붙어 허공에 떠있는 형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하늘도로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이를 나무랄 이는 없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진촬영은 불가능했다. 달리는 버스의 차창을 통해서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장도로 가는 뱃속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한 이유이다. 아무튼 48m 가량 이어지는 도로 벽에는 흑산도와 신안의 명물들을 그려 넣어 알록달록 리듬감 있는 볼거리를 제공했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오는 도중에 샘골해안과 간첩동굴에 대한 멘트가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19697, 북한 무장간첩 3명이 침투한 해안이 흑산도 비리에 있는 샘골해안이고 그들이 은신했던 곳이 간첩동굴이다. 3명의 간첩은 모두 사살됐다고 한다.




버스는 어느덧 사리마을앞을 지난다. 그런데 아재개그로 너스레를 떨던 기사아저씨가 마을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게 아닌가. 흑산도에 온 이상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만 하는 유배문화공원이 이곳 사리마을에 조성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흑산도는 그 입지조건으로 인해 유배된 선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고려 때 정수개라는 선비부터 조선 말 면암 최익현까지 무려 130여 명이나 된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인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선생도 그 가운데 한명이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배된 그는 이곳 사리마을에 15년 동안을 머물면서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155종을 채집하여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 우리역사상 최초의 어류 백과사전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남겼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사촌서당(沙村書堂, 또는 復性齋)’이라는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사촌서당(1998년 신안군에서 복원했다)’을 유배문화체험장(유배인 안치 가옥)과 손암정(巽庵亭), 전통주막 등을 함께 묶어 유배문화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에는 대표적인 인물의 사진과 죄명, 생애를 적은 비석을 세우고, 유배의 형태에 대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또한 손암이 자산어보에서 언급한 물고기의 이름과 형태를 돌에 새겨 전시하고 있다.(이번 투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을 놓칠 수가 없어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썼다)



손암과 면암(勉菴, 최익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중죄인으로 유배 생활을 했지만 그들의 학식과 정신을 존중한 지역 유생들과 토호들이 돌봐준 것이란다. 정약전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동생 정약용을 보호하려다 멀고먼 흑산도까지 귀양을 온 조선의 선비이다. 그는 이곳에서 장덕순과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어부들을 스승으로 삼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겸손과 애민이 낳은 실용학문이 마침내 선생을 겨레의 스승으로 우뚝 서게 했다고 보면 되겠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간신배들은 언제나 높은 자리에 있고, 훌륭한 사람들은 변함없이 그들의 핍박 속에서 살아간다. 촛불혁명 덕분에 새로 들어선 대통령이 그런 모순들을 모두 털어내겠다고 했으니 이젠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해도 되겠지?



이곳 사리마을은 돌담으로도 유명하다. 그 역사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리마을의 옛 담장은 섬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82로 지정(2006)되어 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차창 밖으로 사리마을 앞의 포구가 눈에 들어온다. 버스가 멈춰서더니 일렬로 늘어선 섬의 개수를 알아 맞춰보라는 안내멘트가 흘러나온다. ‘일곱 개라는 정답은 이라는 의식을 서너 번이나 치른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아무튼 7개의 바위섬들이 파도를 막고 있는 작은 내항에는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다. 그리고 잔잔하기 짝이 없는 해수면은 반짝이는 은물결로 인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눈이 부시다. 그래서 이곳이 한국의 소렌토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나보다. 해안가의 풍경이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해서 말이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칠형제바위에 대한 전설도 옮겨볼까 한다. 옛날 사리마을에 홀어머니와 아들 7형제가 바다에서 물질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큰 태풍이 불어와 몇 날 며칠을 어머니가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아들 7형제가 바다에 들어가 두 팔을 벌려 파도를 막았는데 그대로 7개의 작은 섬들로 굳어져 버렸단다. 이후 사람들이 일곱 개의 섬에다 칠형제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얼마쯤 더 달렸을까 또 다시 버스가 멈춰 선다. 그러자 차창 밖으로 괴상하게 생긴 섬 하나가 나타난다. ‘구문여란다. 숲이 울창하여 사시사철 푸르다 하여 청재미라 불리던 청촌리와 산이 높고 마을이 길게 뻗어 있다 하여 여티미라고도 불렸던 천촌리 사이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섬의 한가운데가 뻥 뚫려 있는 형태이다. 구문여의 진면목은 태풍이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 볼 수 있다고 한다. 거센 파도가 구문여 바위를 삼킬 듯이 달려들 적에 중앙 공간 사이로 물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장관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재 gag’ 하나, 왜 하필이면 구문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바위(: 바닷가에서 물속에 숨거나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바위)에 뚫린 구멍이 여자의 거시기를 쏙 빼다 닮았기 때문이란다.



흑산도는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그만큼 인근해역이 깊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다보니 파도가 셀 것은 어쩌면 자명(自明)한 일일 것이다. 그 파도가 곳곳에 비경을 만들어 놓았다. 바닷가를 따라 기암괴석과 해안동굴이 널려 있어 섬 전체가 온통 절묘한 비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몇 년 전에 이미 올라본 기억이 있는 산이기에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생략했지만 흑산도까지 와서 진산이나 마찬가지인 칠락산을 거론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당시의 사진과 기억을 되살려 몇 자 적어본다. 예리항에서 출발해서 정상을 찍고 한 바퀴 돌아오는 산행코스는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면 시야가 툭 트이는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서남방으로 흐르는 능선을 타고 조금 더 걸으면 칠락산은 어머니의 산이라고 적혀있는 표석이 세워져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예리항을 굽어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다. 이곳에서는 어선(漁船)과 여객선(旅客船)들이 쉴 사이 없이 들락거리는 분주한 모습의 항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를 지나면서 산길은 전형적인 흙산으로 변한다. 이어서 작은 봉우리들 몇 개를 오르내리면 흑산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뉘는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칠락산은 왼편에 보이는 바위벼랑 아래로 진행하면 된다. 잠시 후 나무테크로 만든 계단이 보이고, 계단을 밟고 능선에 올라서면 진행방향에 시원스런 암릉이 펼쳐진다. 위험구간이라는 '용요릉' 길이다. 각진 바윗길이 마치 용의 거친 허리에 오른 듯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이 구간이 칠락산 산행의 백미(白眉)이다. 칠락산의 암릉은 월출산처럼 화려(華麗)하지도, 그렇다고 설악산처럼 웅장하지도 않다. 그러나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면서도, 그렇다고 어디가 부족한지를 꼭 집어낼 수 없는 아기자기한 암릉미(巖稜美)를 보여준다.




면암 최익현 선생 적거유허비가 있다는 천촌리를 지나니 청촌리가 나온다. 오늘 저녁을 나게 될 숙소, ‘다모아 리조트가 있는 마을이다. 리조트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인원에 맞춰 방을 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외 풀장까지 갖추고 있어 휴식공간으로는 이만한 데가 없을 것 같다. 실내 또한 청결을 유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식사가 포함되지 않는 게 조금은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하룻밤 쉬어가는 걸로 만족해볼 일이다.




청촌리 마을 앞은 작은 포구(浦口)로 이루어져 있다. 호리병처럼 안으로 움푹 파여 있는 데다 깊지가 않아서 여름철에는 물놀이까지 가능하겠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 두엇이 선착장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을 보면 뭔가 잡을 거리도 있는 모양이다.




예리항 주변은 음식점과 함께 주점, 다방, 클럽, 여관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웬만한 도시의 유흥가를 방불케 한다. 외딴 섬이지만 없는 것이 없어 섬이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단지 이곳이 섬이라는 공간일 뿐 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붉은 색 기와를 머리에 인 버스정류장이 눈길을 끈다. 여태까지 이렇게 멋지게 지어진 정류장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작년엔가 아라비아반도에 있는 두바이에 갔을 때 에어컨까지 갖춘 버스정류장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는데,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최고의 관광지로 발돋움하려는 지자체의 열정이 만들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epilogue), 흑산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맨 먼저 홍어를 떠올릴 것이다. 전라도의 상가집과 잔칫상에 홍어가 빠지면 그것은 상차림이 아니다. 수요가 많아지고 잘 잡히지 않아 한때 홍어잡이 배가 끊길 뻔했다는 이 홍어가 요즘에는 그런 대로 잘 잡히는 모양이다. 거리 곳곳에서 홍어라는 문구를 적어 넣은 간판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전라도적이라 할 수 있는 이 홍어의 맛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조금 오해의 소지를 만들기도 한다. 한번은 이 홍어를 사간 사람이 상한 고기를 주었다고 항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고기 중에서 유일하게 삭혀서(썩혀서)먹는 것이 홍어이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홍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홍탁이 아닐까 싶다. 막걸리 한 사발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들이마신 후에 안주로 곁들이는 홍어 한 점이 기막히게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삼합도 빼놓을 수 없다.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것을 삼합이라 하는데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다. 홍어를 즐겨 먹는 사람들은 생것을 옹기그릇에 담아 놓았다가 며칠 후에 꺼내면 화끈한 냄새가 나도록 상하게 되는데 이것을 썰어 먹으면 입안에 매운맛이 확 퍼진다. 이런 짜릿한 미각에 자극되어 많은 사람들이 홍어를 찾게 된다. 흑산 홍어가 우수한 것은 군산이나 인천근해에서 잡는 것 보다 그 맛이 좋고 육포자체에 착 달라붙는 찰진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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