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다시 생각한다①
: 자기결정권은 자기결정능력과 같은 것이 아니다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은 장애 영역에서 흔히 듣게 되지만 장애인에게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권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도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이러한 자기결정권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의 인격권(人格權)과 행복추구권, 그리고 그러한 행복추구권이 전제하는 자기운명결정권으로부터 유래하는 헌법상의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는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권리로서 인식하며 인정하고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지적장애인이나 자폐성장애인과 같은 발달장애인의 경우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지요. 발달장애인의 경우에는 오래전부터 금치산(禁治産)․한정치산(限定治産) 제도를 통해 의사능력(意思能力)과 행위능력(行爲能力)이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는 집단이었고, 민법 개정을 통해 2013년 하반기부터 시행되고 있는 성년후견제도 역시 그들의 자기결정권을 합법적으로 타인에게 위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이처럼 부정되는 현실은 자기결정권에 대한 어떤 오해에 기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자기결정권이라고 하는 것이 주체에 대한 개인주의적 관점, 그러니까 ‘홀로 서기’의 관점에서만 접근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닐까요?
저는 2010년부터 3년 정도 『함께웃는날』이라는 발달장애 전문 계간지를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재정적인 문제로 폐간이 되기는 했지만요. 이 잡지의 발행처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라는 곳으로, 200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장애인 교육권 투쟁을 이끌면서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을 만들어 내고, 이후 「장애아동복지지원법」과 흔히 ‘발달장애인법’이라고 불리는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단체였지요. 다른 NGO들이 그런 것처럼 장애인단체들도 종종 이러저러한 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게 되는데요, 당시 전국장애인부모연대도 그렇게 한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발달장애청소년의 자기결정권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공재단이든 민간재단이든 지원금을 주면 생색을 내고 싶어 그러는지 꼭 아크릴로 만든 조그만 간판을 주면서 사무실 입구에 달아놓도록 합니다. 그래서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사무실 입구에도 ‘○○재단 장애아동 프로젝트 지원사업: 발달장애청소년의 자기결정권 향상 프로그램’이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지원했던 재단은 민간기업의 재단이어서 좀 더 생색을 내고 싶었는지, 아예 정식으로 기금 전달식을 하면서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더라고요.
어느 날 저는 사무실 청소를 하다가 책장에 놓여있던 그 사진을 조금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속 플래카드에는 사무실 입구의 간판과는 조금 다르게 ‘○○재단 장애아동 프로젝트 지원사업: 발달장애청소년의 자기결정능력 증진 프로그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자기결정권 향상’이라고 표현되었던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결정능력 증진’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순간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향상’이라는 말과 ‘증진’이라는 말은 뭐 그렇다 치고, ‘자기결정권’이라는 말과 ‘자기결정능력’이라는 말을 그렇게 바꿔 써도 되는 것일까? 그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는 즉시 자기결정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여러 문헌과 서류들을 훑어보았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러한 문헌과 서류들에서도 ‘자기결정권’과 ‘자기결정능력’이라는 용어를 별다른 구분 없이 혼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즉 자기결정권과 자기결정능력을 대동소이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신체적․정신적 활동은 그것이 권리의 차원에 존재를 한다 할지라도 능력이라는 차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를 합니다. 교육은 이러한 문제를 성찰함에 있어 하나의 유용한 사례가 될 수 있는데요, 장애인의 교육권이라는 말은 이전에도 존재를 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교육권이 ‘부정’되어온 시기가 존재했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교육 활동을 수행하는 것과 관련된 능력이 부족하거나 부재하다는 이유로 교육권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니까 학교 내에서 제대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지체장애인), 칠판에 판서된 내용이나 교재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고(시각장애인), 수업하는 내용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고(청각장애인), 교사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발달장애인)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 장애인 부모, 교사들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교육권이 ‘인정’된 지금, 그 누구도 장애인은 능력이 없으니 학교에 올 수 없다고,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장애인의 교육권이 인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실현’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지원 체계가 갖추어지고, 여기에 필요한 예산 역시 확보가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조치들이 지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즉 하나의 권리란 크게 ‘권리의 부정 단계/권리의 인정 단계/권리의 실현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으며, 능력의 부재를 이유로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권리의 부정 단계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논리인 것입니다. 교양 있고 재산 있는 사람들, 즉 지력(智力)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인정되었던 선거권이 신분ㆍ성별ㆍ재산․교육 정도 따위의 제한을 두지 않는 보통선거로 확대되어온 역사적 과정도 이러한 맥락을 보여줍니다. 생존 또는 생활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역시 능력의 차원이 존재합니다. 즉 생활력이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존권은 헌법을 통해 보장되는 권리이기에 우리는 생활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정부를 상상하거나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리해보면, 능력과 권리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능력의 여부와 상관없이 보장될 때에만 우리는 그 어떤 것을 권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양한 차이를 지니고 있기에 다양한 활동의 영역에서 다양한 정도로 능력의 차이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능력의 부족 때문에 권리의 실현이 제한되지 않도록 적절한 제도가 마련되고 더욱 많은 사회적 지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권리의 논리입니다.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능력이 낮을 수 있다는 것까지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결정능력이 낮다고 해서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결정능력과 자기결정권을 동일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결정의 권리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김도현 |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발행인이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이고, 노들장애인야학 부설 기관인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이기도 하다. 쓴 책으로 『차별에 저항하라』(박종철출판사, 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