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레시노 2 - 차(茶)의 고장 우레시노에서 다도의 창시자 센노 리큐를 회상하다!
어제는 후쿠오카에서 사가현 가라쓰에 도착해 가라쓰성 (唐津城) 을 구경하고 나가사키 하우스텐보스
외곽의 숙소를 찾아 1박 했으며 오늘 2023년 2월 23일 렌터카를 몰고 벌판을 근 한시간을
달려서 차 (茶) 로 유명한 우레시노 에 도착해서는 차(茶) 회관인 우레시노 차 교류관 으로 들어갑니다.
우레시노 (嬉野市) 는 사가현 남부에 도시로 온천과 차(茶 ) 가 유명한 곳인데.... 다도 (茶道, さどう/ちゃどう)
는 일본의 전통 차 의식을 말하니 일본의 전통에 기초한 것으로 현대 일본에서는 신부 수업의 한 과정
으로서 다도(茶道) 가 행해지는데.... 도코노마 라고 부르는 작은 방에서 다도(茶道) 는 엄격한 순서를 거칩니다.
중국에서 전해진 차(茶) 문화 를 일본인들이 다도(茶道) 라는 예술로서 승화시켰으니 일본의
다도는 16세기 후반 센노 리큐 (千利休) 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그는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의 다인(茶人) 으로 와비차(わび茶) 사상등, 참선을 접목한 다도법을 확립시켰으며,
일본에서 다성 (茶聖, 차의 성인) 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센노 리큐' 라는 존칭으로 불립니다.
'와비(侘び)' 란 한가로우면서도 간소하고 검소한 아취 를 말하는 것으로... 명기만을 좇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 금욕주의 를 설파하는데 있으니 물레를 돌리지 않고
손으로 점토판을 붙여 만든 라쿠야키(楽焼) 나 모즈야 가마(万代屋釜) 등, 화려한
조형미나 장식을 부정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르며 화병도 죽세공 만을 이용해 제작했습니다.
본래 닛타 사토미씨 (新田里見氏) 로, 시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타나카 요시키요(田中義清)이니
부친 때까지 타나카 씨였으나 리큐가 센 씨로 바꿨는데, 조부 이름이 센아미(千阿弥 )여서
첫 글자를 땄다고 하며.... 센아미는 아시카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직속 연예인
이었으니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처음 연을 맺을 당시 이름은 '센 소에키' 였다고 합니다.
리큐 라는 이름은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오기마치 천황(일왕) 에게 차를 진상하는 킨츄
다도회 (禁中献茶) 때 당시 일본 다도의 1인자로서 배석해야 했으나, 그의 원래
계급인 상인의 신분으로는 궁내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거사 칭호를 하사
받은데서 유래하니 리큐를 붙일 때는 성씨 뒤에 존칭인 '~노' 를 붙여 센노 리큐라고 부릅니다.
센노 리큐 는 1522년에 사카이에서 타나카 요효에 (田中 与兵衛)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요효에는
사카이에서 가장 큰 어물전과 창고를 운영했으니 사카이 상인조합이라 할 수 있는
에고슈(会合衆) 중에서도 손꼽히는 나야 10인방 (納屋十人衆) 중 한 사람이었으며
리큐의 조부인 센아미는 막부 소속 연예인 일 뿐으로 요효에는 자수성가한 대상인 이었습니다.
리큐 는 키타무키 도친(北向道陳) 과 타케노 조오(武野紹鷗) 등에게 다도를 사사하고 다도
의 신개혁 을 꿈꿨으니...... 다도를 가다듬기 위해 참선 수도에 들어가
난슈지(南宗寺)의 주지승 다이린 소토(大林宗套)에게 소에키 라는 법명 을 받았다고 합니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 가 꼭두각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서 사카이 항구를 직할 로 받을 때인
47세에 오다 가에 다두(茶頭) 로 고용돼 이때부터 다도를 완성하는 데에만 몰두했다고 합니다.
혼노지의 변 후엔 도요토미 히데요시 를 섬겼으며, 1585년 일본 황실에서 열린 긴추 다도회 때 리큐 라는
거사 호 를 받는데..... 리큐를 파자(破字) 하면 '이익을 다투는 마음, 휴식케 하라 (「利心、休せよ」)'
로, 자기 재능을 믿고 허우적대지 않는 '로고추(老古錐)' 의 경지에 다다르도록 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1587년 66세때, 다이묘들은 물론 평민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키타노 대 다도회(北野大茶湯) 를 주관하는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히데요시의 주라쿠 성 내에 저택이 내려지고 주라쿠다이
(聚楽第, 히데요시의 궁전) 축조에 관여하거나 녹봉 3천석을 받는 등 다인(茶人) 으로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히데요시의 문화유산인 황금다실의 설계 도 그가 맡았고, 소안다실 (草庵茶室)의 창설, 라쿠야키(楽茶碗) 제작,
죽화병(竹の花入) 제작 등 와비차(わび茶) 사상의 완성에 매진했는데, 히데요시는 꼭 리큐를 끼고
다이묘들을 만났으니.... 리큐의 인맥은 당시 일본의 중요 인물들 모두를 아우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센노 리큐는 검소한 사람 인지라 히데요시가 사치스런 빨간색이나 황금색 등의 화려한 작품에만
관심을 보이자 검은 도자기만을 강요하고 꾸짖는 등, 사사건건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급기야 히데요시가 리큐를 증오 하게 되었으니.... 이는 조광조 가 중종의 눈 밖에 난 것과 비슷합니다.
1591년에 교토의 사찰 다이토쿠지 삼문에 센노 리큐의 목상 을 안치한 것과 또 다기의 감정 (센노
리큐는 도자기 진품 가품 감정도 했다) 에 부정이 있다는 등에 트집이 잡혀 가택연금 이 됐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가택 연금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으니 오대로(大老) 마에다 토시이에 등이
구명한 보람도 없이 리큐는 할복 했으니 향년 70세라.... 제자들 중에 다테 마사무네 등
다이묘 제장들을 경계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를 시켜 리큐의 저택을 감시했습니다.
문제가 됐던 그의 목상도 리큐가 참수된 후 효수 됐는데..... 그래도 에도 막부 때 교토 다이도쿠지
(大德寺) 삼문에 목상이 다시 안치돼 오늘날에 이르며 그가 죽은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조선 침공을 감행하니 그가 총애를 믿고 조선 침공을 만류해서 미움 을 샀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끝자락이었던 당시 그의 제자들은 신분 고하를 망라했는데 당시 전국 다이묘들은
물론, 일본 귀족인 쿠게(公卿) 들도 많았으니 그 중에 '리큐 7철' 이라 하니 후루타 오리베, 호소카와
타다오키, 가모 우지사토, 타카야마 우콘, 시바야마 겐모츠, 세타 마사타다, 마키무라 토시사다
등이 그들이며 그외 구와야마 시게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다테 마사무네 등도 그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센노 리큐는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의 배다른 여동생인 전처와 사이에서 1남 4녀 를 얻었으나 부부 금슬이
좋지는 않았다는데, 딸들은 사무라이가 아닌 당대 문화인들에게 시집을 갔으니 그 중에서도 차녀는 꽤
미모를 자랑했던 모양으로, 일설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음에 들어 "내 밤 수청을 들이라" 고
리큐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으나 리큐가 아비된 입장으로 거절 하면서 모든 사단의 원인이 됐다고도 합니다.
4녀 오긴(吟) 은 1996년 NHK 대하드라마 “히데요시” 에서는 하시바 히데나가의 부인으로 묘사
되나, 실제로는 혼노지의 대처승 엔죠보 소엔 (円乗坊宗円) 의 부인이라고 하며 장남
도안(道庵) 은 리큐가 처형된 후에도 여러 다이묘들의 구명으로 살아남아 다도를 이었다고 합니다.
리큐는 1577년 7월 16일 전처를 잃었는데, 재혼 상대는 노(能)의 달인 미야오 산뉴 (宮王三入)의 미망인으로서
다도에도 조예가 깊던 소온(宗恩) 이었으니 그녀는 죽은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두 부부가 중년에 만났음에도 금슬이 좋았는지 새로 아들 소린(宗林), 소겐(宗幻) 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려서 모두 죽었으며...... 그녀를 사랑했던 리큐는 비록 자기 씨는 아닐지라도 산뉴의 아들인
소안 을 자기 막내 친딸 오카메(亀) 와 결혼 시키고 양자 로 삼은후, 장남 도안과 함께 자신의 대를 잇게 했습니다.
친아들 도안은 후사 없이 1607년 자연 병사해 후계는 오직 소안 만이 남았으니 소안의 후손들이 소위 삼천가
(三千家)인 오모테 센케(表千家), 우라 센케(裏千家), 무샤코지 센케 (武者小路 千家)로서 현재도 센노 리큐의
다도를 계승하고 있고 센노 리큐를 모시는 대법회는 3천가 공동으로 매년 3월 교토 다이도쿠지 에서 거행됩니다.
본가인 오모테 는 대대로 이에모토(당주: 종손이 계승함)에게 센 소사(千宗左) 라는 이름을 계승하게
하고 재단법인 후신안(不審菴) 의 이사장을 겸해 리큐의 다실 후신안(不審菴) 을 관리하며
방계 우라센케는 센 소시츠(千宗室) 라는 이름을 계승케 하며, 16대 소시츠가 현재 가원이랍니다.
본가 오모테센케는 1642년 부터 키슈 토쿠가와 가문의 다도 선생 (茶頭)을 맡아왔으며, 키슈 도쿠가와의 용달
역이었던 미츠이(三井) 집안과도 왕래했으니 메이지 유신 이후 미쓰이 재벌로 부터 후원 을 받기도 했으며
우라센케는 카가 번주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의 다도 스승 으로 영지 150석과 대저택을 하사받있습니다.
우라센케의 16대 는 1983년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차녀 마사코 공주와 결혼 했는데, 마사코 공주
는 1951년생으로, 남편 소시츠 보다 5살 연상이니 황족들이 다니는 가쿠슈인대학 법학과 재학중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마사코 공주는 스캔들 이 있었지만.... 결혼한 후 2남 1녀를 낳는등 잘 산다고 합니다.
이치고이치에 (一期一會) 란 한번 만남에도 최선을 다한다 는 뜻으로 무사도 정신 이 함축된 일본 정신의
정수로 표현되는 말로서..... 센노 리큐가 처음 썼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의 제자 야마노우에
소지 (山上宗二) 가 ‘일 평생 단 한 번의 만남 (一期に一度の会)’ 이라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야마노우에 소지는 호조 집안에 다도 스승 으로 있었는데,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라 같이 진중에 와있던 스승 리큐를 만나러 왔다가 호조의 간첩으로 몰려 죽었으니 코와 귀가 잘려
효수됐다고 하는데..... 리큐와 히데요시의 사이가 벌어지는 데 이 사건이 일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리큐의 소안 다실 (草庵茶室) 이란 다다미 2첩, 잘해야 3첩 정도(1평에서 1.5평) 의 침실 넓이 밖에 확보할
수 없는 서민들의 사정에 맞춰 지어진 다실로서 와비차 사상 의 모델하우스 역할도 겸하는 것이었습니다.
난다 긴다 하는 세도가들을 좁은 공간에 구겨 넣고 일반 서민의 생활 감각을 간접 체험 하도록 했으니...
베들레헴 교회 처럼 문 높이를 절반만 열어두어 어떤 누구라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는 다실에 들어올
수 없도록 했으며 특히 사방 창문을 최소화 하고 황토벽 등을 이용해 아늑한 분위기를 내도록 했습니다.
어두운 분위기 에서 필요한 광량은 사방 좁은 창문 으로 들이는 방법으로 호스트와 게스트 간의 긴밀한 대화를
유도하도록 고안했는데..... 천장과 공조 장치 부근까지 광량 조절에 이용할수 있도록 개량되기도 했으나
그의 소박하고도 치밀한 안으로 만들어진 다실들은 일본인들의 미의식(美意識) 에 커다란 영향을 줬습니다.
원래 자연풍광 등을 인테리어로 끌고 들어오는 조선의 미의식과 달리.... 공간의 목적 자체에 집중 하는
일본의 인테리어에 로지(露地) 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었으니, 다실까지 이어지는 조경의 풍류 역시
다도의 한 부분으로 삼고, 다실 바깥까지 손님 대접의 한 부분으로서 적극적인 다도 공간으로
이용했는데 차를 마시러 오는 과정과 마시고 떠나는 과정까지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을 이식했습니다.
후처 소온 은 원래 이름이 오리키로 칸제류(觀世流) 코츠즈미의 명인이자 리큐의 노가쿠 스승 미야오 산뉴의
처였으니..... 리큐는 사모(師母) 와 새 살림 을 차린 셈으로, 미야오 산뉴는 1553년 타계했는데,
리큐는 졸지에 유복자가 된 소안(少庵)의 뒷바라지 를 해 처음부터 내연 관계가 아니었을까 의심을 받습니다.
소온은 리큐의 다도 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며 큰아들 도안 은 1546년 생으로
리큐와 사이가 나빠 집을 나갔다가 리큐가 환갑 넘어 성공한 후에야 화해했다고 하니
이 때문에 다도가 깊지 않아 히데요시에게 발탁되는 일은 없었지만 리큐 처형 때 리큐의
아들이라는 죄 하나로 가나모리 나가치카의 비젠 오쿠라야마성에 유배돼 근신에 들어갑니다.
3년 후인 1594년 사면돼 교토로 돌아왔지만 없는 듯 살았고 자식은 없었으니 의붓동생 소안과는 원래도 사이가
안 좋았지만 다도에서 은근히 비교 를 당해서인지 다도회나 리큐 제사 때 조차 서로 모른 척을 했다고 합니다.
양아들 소안 역시 리큐 처형 직후 가모 우지사토의 감시 아래 근신 에 들어갔으며 1594년에 사면됐는데
리큐에게 직접 다도를 전수 받긴 했으나 직접 계승은 자기 아들 소탄에게 사양해, 센씨 집안의 재흥은
3대 센 소탄(千 宗旦) 이 이뤘는데..... 센 소탄의 어머니는 리큐의 막내딸 오카메이기 때문에
소탄은 리큐와 직접적으로 혈연 관계가 있으며, 현대 센씨 3집안은 센 소탄의 아들들의 후예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