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회 의료 활동의 중요성
영국의 의사이며 가톨릭 작가인 A.J. 크로닝(1896~1981)의 「천국의 열쇠」는 1941년에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도 세계 수많은 독자를 감동시키고 있는 소설이다.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지향하는 ‘치셤’(프란치스코) 신부가 중국 오지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하는 내용이 감동적으로 그려진 소설이다.
선교지에 도착해 보니 성당은 허물어져 폐허가 되어 있고, 주일이 되어도 성당을 찾아오는 신자들이 없자 치셤 신부는 고민에 빠진다. 생각 끝에 그는 임시로 세 들어 지내는 집 뒷방에 조그만 진료소 하나를 차린다.
영국에 있을 때 종합병원에서 응급처치 단기 과정을 이수한 경력과 의사 친구 ‘윌리 탈록’에게서 배운 간단한 소독 기술만 가지고 무작정 진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 치료를 받기 위해 진료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치셤 신부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그는 선교를 위한 교리교육에 앞서 먼저 아프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후 치셤 신부는 더욱더 환자 진료에 성의를 다했고 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과도 가까워지게 된다. 물론 그때부터 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도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30년 동안 중국에서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치셤 신부에게 평소 그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던 마을 재력가 ‘챠’ 씨가 찾아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신부님, 전에도 말씀드렸죠.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어느 종교에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이제야 당신 종교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 제 자식이 신부님 덕분에 죽기 직전의 병을 고쳤을 때만 해도 저는 그저 고맙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신부님의 그 진실된 생활이, 그리고 그 어려운 일들을 이겨내는 인내와 용기가 제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종교의 좋고 그름은 거기 몸담고 있는 사람의 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신부님… 당신은 결국 당신의 모범으로 저를 정복하셨습니다.”
순전히 가정(假定)이지만, 소설 「천국의 열쇠」를 읽으면서, 만일 초창기 우리나라에 진출한 선교회 사제들이 의술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이 진료 활동도 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많이 기여를 했더라면 과연 천주교가 조선 조정으로부터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았을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마저 했던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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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초, 바오로 수녀회의 매화동 시약소. 간단한 치료와 약을 나누어 주는 정도의 초라한 의료 활동이었다. |
열악했던 초기 한국천주교회 의료 활동
천주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된 18세기 조선 후기에는 해마다 각종 전염병이 창궐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던 시기였다.
예컨대 콜레라나 장티푸스, 두창 그리고 홍역 같은 전염병들이 매년 대유행을 했지만 나라에서도 별 대책이 있을 수 없던 때였다. 천주교 신자라고 이런 질병들로부터 예외일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몸을 피해 깊은 산 속에 숨어들어 살아야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병이 들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두려움이었지만 그때도 교회는 전혀 이들을 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물론, 기록에 의하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최필제(베드로, 1769~1801)가 당시 한양에서 약국을 경영하며 아픈 신자들을 진맥하고 한약재를 제공했다고 되어 있다.
이후 이어진 박해시대에도 신자들을 위한 약국이 주로 교우촌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실제적인 천주교의 구료(救療) 활동은 1800년대 말 프랑스와 독일의 남녀 수도회들이 진출하면서부터다.
이때도 간호 수녀들이 간단한 약을 나누어 주고 상처를 소독해 주는 정도가 전부였고, 의사가 직접 참여한 진료 사업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주로 의사 수녀들에 의해 진료가 이루어졌던 서울과 평양, 연길 등지의 진료소는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인기는 대단했던 것 같다.
당시 기록에 보면, “병원은 외교인들을 교리와 신앙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라는 언급과 함께 “실제로 진료소가 설치되는 곳마다 천주교 신자 수가 늘어났다”고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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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래(요셉, 1903~1974) |
개신교 의료 활동의 자극과 영향
이즈음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의료 사업은 무엇보다 개신교로부터 받은 자극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보다 100년이나 늦게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가 처음부터 의료와 교육사업을 그들의 선교활동에 적극 사용함으로써 최소한 신자 확보를 위한 전교에 관한 한, 천주교보다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1800년대 말 조선에 진출한 이후 제일 먼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나선다.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연희전문학교나 이화학당 같은 고등 교육기관을 설립해 현대식 교육을 시작했고, 1904년에는 서울역 부근에 40병상의 현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 기념 병원’을 설립한다.
이런 일로 1920년대에는 한때 천주교의 포교가 개신교의 위세에 눌려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이때부터,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천주교회도 교육과 의료사업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런 영향에 자극받은 천주교에서도 1930년을 전후로 덕원, 신의주, 연길, 인천, 서울 등지에 교회 의료시설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역시 그 규모나 활동에 있어서는 개신교의 의료기관들에 비교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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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에 서울역 건너편에 세워진 개신교 ‘세브란스 기념병원’. 40병상 규모의 서양식 의료기관으로 많은 조선인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었다. |
‘성모병원’ 설립 계획과 의사 박병래의 등장
이처럼 천주교회가 좀 더 전문적이고 규모 있는 의료 활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던 시기에 서울교구가 지금의 중구 저동 1가 39번지(현재 가톨릭회관 후문 쪽에서 명동으로 오르는 길)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조그만 병원(24병상)을 매입해 설립한 것이 바로 ‘성모병원’이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경성교구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몇 가지 기념사업을 계획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병원 설립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의사 박병래(朴秉來, 요셉, 1903~1974)다.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의과대학)를 졸업한 박병래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경의전 부속병원 결핵내과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의사였다.
신기하게도 그는 당시 동성상업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 박준호(朴準鎬)와 해방 후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張勉), 그리고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한창우(韓昌愚) 등 걸출한 인물들과 함께 교구 청년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당연히 의사인 그가 병원 설립 계획에 앞장서게 되었고, 결국 1936년 5월 11일에 개원한 성모병원의 초대 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사실, 경의전 교수직을 버리고 겨우 24병상 규모의 조그만 성모병원 원장직을 맡는다는 것이 박병래에게는 하나의 모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저 없이 그 길을 택했다. 그것이 가톨릭 의사인 자신의 오랜 꿈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召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모병원 초대 원장이 된 박병래는 혼신을 다해 병원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 이 병원이 기초가 되어 오늘날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사립 의료네트워크인 가톨릭중앙의료원(CMC)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계속>
연재를 시작하며
박병래 선생님이 성모병원을 떠난 것이 1957년이고 제가 가톨릭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1962년입니다. 따라서 제가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 재학 중 학보사 기자를 하면서 초창기 성모병원 역사를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었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가톨릭의사의 전형이며 무엇보다 의사이기 전에 참 그리스도인이셨던 선생님의 삶을 재조명해 보면서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