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노태우의 권력 기반 하나회
육군사관학교는 본격적인 장교 육성을 위해서 1950년 4년제 교육과정을 만들고 육사 11기 선발다.
하지만 입교 4일후 한국전쟁 발발 졸업 직전인 육사 10기와 함께 바로 전선에 투입되어 대부분
총알받이로 사라졌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도 훗날을 위해 장교 육성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1951년 10월에 진해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개교하고 새로 육사 11기를 선발하는데 여기에
전두환, 노태우 등이 끼여 있었다.
육사 11기 생도들 중 영남권 출신 동기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 등 5명은
비공식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이 오성회이고 하나회가 이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박병하가
유급 당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자 다른 11기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이 추가되어 칠성회가 되었다.
하나회 태동의 주역들인 육사 11기생 기념사진.
전두환 주도로 육군사관학도들은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는 박정희 소장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칠성회는 회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확대 개편 과정을 여러 번 거쳤다. 이들은 1963년
7월 6일을 기점으로 육사 8기를 몰아내기 위해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동향
출신 세력을 키우고자 한 박정희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별 앞에서도 당당한(?) 전두환
팀의 초기 리더는 윤필용과 전두환 등으로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한풀 꺾이지만, 조직의 다른
우두머리인 전두환은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으로 복귀, 그에 대한 박정희의 각별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였다. 하나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며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세력이 되었으며, 서로에 대해 "형님"이라는 암호명으로 서로가 하나회 멤버임을
과시했다.
윤필용(가장 오른쪽) 사건
1979년에는 10·26 사건 이후 육사 11기, 12기생 회원들을 중심으로 권력공백기를 이용하여
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군내 각 요직에 배치된 하나회 회원들이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뜻에 따라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했다. 12·12 군사 반란이후 하나회 인사들은 군의
핵심 요직에 올랐다. 또한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을 묵인한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에, 황영시를 육군참모차장에 직접 임명하였다. 12.12에 참여한 하나회 회원과
12·12 군사 반란 비호한 일부 장성들의 세력은 "새로운 군부 세력"이란 뜻으로 '신군부'로 불리게 되었다.
1212 군사반란 후 반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 (1979. 12. 14.)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군부 세력들은 5월 초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하여, 방해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불법
연행하고, 국회에 군병력을 주둔하여 임시국회를 무산시키는 등 반대 세력을 탄압하였다.
또한, 이들은 5·17 쿠데타에 항거하여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하였다.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보안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과 같은 군내 요직뿐 만 아니라 전역 후에도 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93년 초 육사 31기생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와 ‘비(非)하나회’로 양분되어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사태는 양측이 한 선술집에서 맥주병이 깨지고 바닥에 뒹굴며
난투극까지 치르는 소동을 벌인 뒤에야 다소 진정되었으나, 이미 동기생들 간의 앙금은 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93년 4월 2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익명의 군인에 의해 '하나회' 명단이 살포되었다.이러한 사태로
인하여,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진행하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책임과 12.12 군사정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등 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