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기독교에 전해져오는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먼저 당신을 예배하고 섬기는 존재로 천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천지 창조 이전에 먼저, 천사들에게 사람과 그리스도에 관한 당신의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침내 천지를 지으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사람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예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천사들로서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온전히 영적 존재인 자신들이 육체를 지녔고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사람을 섬겨야 한다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사들 가운데 루시퍼라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빛의 천사’라고 불리는 그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천사였습니다. 루시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나는 인간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재기도 넘치고,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존재인 내가, 어찌 사람 따위를 섬겨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에 도취된 루시퍼는 결국 하나님을 거역하고, 천국에서 쫓겨나 악한 천사, 즉 사탄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루시퍼가 천국에서 쫓겨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스스로 피조물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능력과 아름다움에 도취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나보다 연약한 존재인 사람을 섬길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판단과 주장을 고집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타락한 천사뿐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고 에덴 동산의 청지기로 살아가던 처음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어진 재능과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야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인간은, 이제는 마치도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그럴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선과 악을 제 멋대로 판단하고 규정합니다. 내로남불이라 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쉽게 함부로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자기가 저지른 똑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변명하고 더 나가서 그것이 정의인 양 미화하는 것을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벗은 것이 부끄러워 나뭇가지로 옷을 만들어 수치를 가렸습니다.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기를 감추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일삼고, 책임을 질 줄 모르고, 사과도 할줄 모릅니다.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모두가 남 탓입니다. 말로는 정의와 공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삶의 자리에는 엉겅퀴와 가시나무만 무성하고, 폭력과 증오와 다툼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이 땅에서 유리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참된 안식은 과연 어디에서 누릴 수 있는 걸까요?
인간은 진흙덩어리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깨어지기 쉽고, 부서지기 쉽고, 연약한 존재, 즉, 스스로 완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힘으로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고,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또한 인정받고 확인하기를 좋아합니다. 권력에의 의지를 피할 수 없고, 주어진 권력으로 제 멋대로 다른 사람을 주관하며, 그것을 즐기고자 하는 경향이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신이 좀 더 완벽에 가까운 존재인 양 허세를 부리며 다른 사람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입니다. 자기가 영적으로 완전하거나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 인정받으려고, 자기 스스로 의로움을 주장하고 자기 합리화를 일삼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착각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할 줄 모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약점을 공격하며,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며 독선에 빠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로운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제시되어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심은 빗나가서, 그들의 신앙은 형식주의에 흘러서,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기에 급급한 채, 자신들이야 말로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존재라고 하는 교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허물,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완전한 척 착각하고 위선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요구했습니다. 스스로 백성들의 율법 교사를 자처하며, 율법도 모르고,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의 영혼을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랍비들은 ‘율법의 멍에’, 혹은 ‘계명의 멍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기꺼이 율법의 멍에, 계명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멍에’라는 것은 도시에서 자란 오늘 날의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예전에 농업이 기계화 되기 전에는 소나 말과 같은 가축들로 하여금 수레나 쟁기같은 농기구를 끌게 해서 밭을 갈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 때 수레나 쟁기 같은 농기구를 끌 수 있도록 소나 말의 목에 나무 막대, 혹은 나무 틀을 씌웠는데, 그것이 멍에입니다. 멍에를 쓴 가축은 주인이 멍에를 풀어주기 전에는 그 멍에를 메고 힘들게 밭을 갈아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 보면 ‘멍에’는,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에 있어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어떤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율법의 멍에입니다. 자유가 구속되고 힘이 들지만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고 멍에를 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멍에를 메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이야말로 이 멍에를 메고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당당하고 교만하게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며 위선에 빠진 것일뿐, 그들 자신이 완전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율법의 멍에를 메고 율법이 요구하는 그 행위에 있어서 완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멍에를 메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자신의 완전을 주장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비난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무거운 죄의 짐, 그 수고로운 율법의 멍에를 내려놓고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진정한 마음의 안식, 그 비밀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에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적으로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자기의 완전함과 강함을 인정받고자 한다면, 결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에 안식이 있고, 그 온유과 겸손을 본받는 사람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gentle(NIV), 혹은 meek(KJ)로 번역하였습니다. 부드러고 온순한 것, 친절한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프라우스’입니다. 이 말은 본래 야생 동물이 길들여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운이 넘쳐 제 맘대로 뛰어다니던 동물이 사람의 조련을 받고 길들여진 것입니다. 그 힘이나 기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조절할 줄 알고, 주인의 뜻 안에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특징이 부드럽고 온순하고 친절한 것입니다.
겸손은 원어로 ‘타페이노스’입니다. 영어로 ‘humble’(NIV)이라고 번역되는데, 킹 제임스 성경은 ‘lowly’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천하다, 초라하다, 낮다’는 의미입니다. 사회적인 신분이나 위치가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학문이나 문벌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간적으로 자랑할 만한 이 모든 것을 배설물과도 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낮아지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다른 사람을 섬길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중에 밤이 되어서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가 쉬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져서 이 동네를 사르도록 기도할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냥 다른 마을로 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또, 자신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밖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고 몰라준다고 억울해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미움이나 복수심을 갖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약해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부동산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되 이 땅에 내려오시는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고, 그를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셔서, 우리를 참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믿을 때,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멍에를 메고 힘들어 합니다. 스스로 강하고 스스로 완전하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하여, 끊임없이 경쟁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도덕적으로도 자기를 감추고 위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그 영혼은 항상 불안하고 피곤하고,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내 멍에를 메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온유와 겸손의 멍에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 뿐,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기에, 자신의 약함과 무지함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 온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명예와 권세를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습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의로운 척 위선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소통하기 좋아하고 나와 다른 사람도 포용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헌신할 뿐입니다. 겸손과 온유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고, 참된 쉼을 누리며 살아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