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5월 26일 19시 10분, 영국 항공모함 아크로열에서 15기의 소드피쉬 뇌격기들이 어둠을 가르고 차례로 날아올랐다. 땅거미가 내려 앉아 제대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출격을 서두른 이유는 영국 함대가 추격 중인 한 척의 독일 전함 때문이었다. 직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손상을 입고 도주 중인 목표물이 만일 독일 공군의 엄호를 받을 수 있는 안전 지대로 진입하게 되면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할 수 있었기에 영국은 초조하였던 것이다.
22시 47분, 소드피쉬들은 마침내 목표물을 발견하였고 지체 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이때 투사한 12발의 어뢰 중 불과 두발만이 선체를 가격하였지만 그것은 모든 운명을 결정한 치명타가 되었다. 한발이 조타실을 파괴하면서 독일 전함은 조종 불능에 빠졌고 그 틈을 타서 영국 함대가 몰려와 맹공을 가하여 명을 재촉시켜 버린 것이었다. 이처럼 뇌격기들의 투혼에 물려서 생을 마감한 주인공은 너무나 유명한 독일의 거함 비스마르크(Bismarck)였다.
취역 당시의 비스마르크 <출처: wikipedia>
재건에 나선 독일 해군
독일은 전통적인 육군 강국이지만 한때 엄청난 해군을 보유하기도 하였다. 1871년 통일을 이룬 후 대외팽창을 본격 시도한 독일은 대대적으로 국력을 쏟아 부어 해군력 확장에 나섰다. 이러한 행보는 지난 300여 년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해 온 영국을 자극하여 치열한 건함 경쟁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제1차대전 발발 직전에 독일은 세계 2위로 평가되는 강력한 해군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도크에서 건조 중인 모습. 15만 마력의 힘으로 구동되는 3개의 스크루에 의해 최고 30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다. <출처: wikipedia>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을 넘을 수 없었던 독일 해군은 1916년 유틀란트 해전을 끝으로 전쟁 중에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하자 그 동안 어렵게 만들어 놓은 무수한 군함들은 연합군의 전리품이 되거나 나포의 굴욕을 피하려 스스로 자침시키면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더불어 독일의 무장을 제한시켜 버린 베르사유조약으로 말미암아 독일 해군이 전성기 수준으로 되돌아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정권을 획득한 히틀러가 1935년 독일의 재무장을 전격 선언하며 상황은 바뀌었다. 총 10만으로 제한 받던 독일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에 발맞추어 독일 해군도 재건에 나섰다. 하지만 타 군에 비해 전력 확충이 쉽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단기간 내 전력을 높일 수 있는 육군, 공군과 달리 해군은 보유한 함정의 규모로 전력이 결정되는데, 함정 확보는 여타 무기에 비해 막대한 비용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상 최대의 전함으로 탄생하다
툭하면 전쟁을 언급할 만큼 히틀러는 호전적으로 나섰고 세계는 공포에 떨었지만 독일 해군은 준비가 부족하였다. 당장 영국에 맞설 충분한 함정의 확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보니 소수라도 질적으로 앞서는 거대 전함을 먼저 보유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영국 해군의 전술상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일대일로 대결에 나섰을 때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전함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1934년 독일은 기존 바이에른 급 전함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전함 설계에 착수하였다. 표면적으로 예전에 영국과 합의하였던 보유 군함의 배수량 제한선인 39,000톤 급의 전함을 건조하는 것이라 공표했지만 처음부터 이를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독일의 목표는 당시 영국이 보유한 순양전함 후드보다 더 큰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 1940년 8월 24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이름으로 취역한 이 최신 전함의 만재 배수량은 무려 50,300톤이었다.
1939년 2월 14일, 블롬-보스 조선소에서 있었던 진수식 모습으로 상부 구조물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이날 행사에 히틀러가 직접 참석하였을 만큼 전함 비스마르크에 대한 독일의 기대는 컸다. <출처: wikipedia>
이듬해 등장한 일본의 야마토에 밀려 1년 만에 세계 최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제2차대전 당시 유럽전역에서 활약한 가장 큰 전함이었다. 그러나 제1차대전 당시에 활약한 바이예른 급 전함이 베이스가 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설계 사상은 시대에 뒤졌다. 포격전이나 대공 방어전 능력이 동 시대 최신 전함에 비해 떨어진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제1차대전 패전 후 20여 년 간 독일이 건함과 관련한 새로운 노하우를 축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괴물을 노리고 있던 영국
비스마르크가 취역한 1940년 8월은 독일이 프랑스를 불과 7주 만에 정복하여 위세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한 때였다. 다음 상대는 홀로 남은 섬나라 영국이었다. 연일 사상 초유의 대 공습을 당하던 영국의 생명선은 전 세계 식민지에서 바다를 통해 본토로 공급되던 수많은 물자들이었다. 독일은 이를 차단 해 버리면 영국은 머지않아 굴복할 것이라 생각하였고 독일 해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독일 함대가 대서양으로 나가 영국 함대를 외곽으로 유인하는 동안 유보트들이 영국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작전을 수립하였고 이를 ‘라인연습’이라 칭하였다. 독일은 이를 위해 그 동안 금송아지처럼 아껴두었던 비스마르크 외에 중순양함 1척, 순양전함 2척으로 구성된 강력한 함대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1941년 5월 18일, 막상 비스마르크가 대서양을 향해 보무도 당당히 출항하였을 때 단지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만 동행하였다.
1940년 9월, 취역 전에 시험 운항 중인 비스마르크. 마스트를 비롯한 일부 상부 구조물이 완성되기 전이다. <출처: wikipedia>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고장으로 인하여 출동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모든 내용을 극비에 부치었음에도 영국 정보망이 비스마르크의 출동을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독일은 발각을 우려해서 야음을 틈타 대서양으로 진입하려 하였을 만큼 조심스럽게 출동을 하였지만 처음부터 영국의 추격을 받았다. 그 동안 묵묵히 괴물이 바다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영국 해군에게 즉시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때 동원된 영국 함대는 전함 5, 순양함 14척, 항공모함 2척, 구축함 21척이었는데 지중해에서 작전을 펼치던 함정들까지 불렀을 만큼 의지가 강하였다. 5월 23일 일대를 순찰하던 영국의 순양함 써포크와 노포크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사이를 항해 중인 비스마르크를 발견하였지만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내고 도망가기 바빴다. 그 어느 누구보다 경험이 많던 영국 해군은 써포크와 노포크 만으로 비스마르크에 대적한다는 것이 만용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서양을 불태운 포성
비스마르크의 위치가 확인되자 영국의 추격자들이 일대로 속속 집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5월 24일 새벽 05시 37분, 마침내 비스마르크와 이를 추격한 영국 함대의 역사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다. 약 35km의 거리를 두고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로 구성된 영국 함대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으로 이루어진 독일 함대가 마주보고 포격을 가하면서 대서양 하늘이 붉게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는데 승패는 순식간 결정되었다.
비스마르크 등장 이전 최대 규모의 전투함이었던 영국의 순양전함 후드. 공교롭게도 비스마르크의 공격에 직격을 당하여 불과 3분 만에 침몰된 비운의 함으로 1,400여명의 승조원 중 생존자는 불과 3명이었다. <출처: wikipedia>
비스마르크의 다섯 번째 사격이 후드의 중앙을 정확히 가격하면서 탄약고가 대 폭발하였다. 순식간 두 동강난 후드는 불과 3분 만에 침몰하였고 이때 총 1,418명의 승무원 중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이는 불과 3명뿐이었다. 이런 참담한 순간을 옆에서 목격한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도 커다란 타격을 입고 줄행랑을 치기 바빴을 정도였다. 영국의 우려대로 비스마르크의 위력은 무지막지하였다.
자매 함인 틸피츠.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1944년 격침 당하였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이것이 비스마르크가 전사에 기록한 유일한 전과였다. 결과는 참담했지만 영국 해군은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교전 중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가한 포격에 피격 당하여 비스마르크도 더 이상 애초 부여 받은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라인연습작전은 취소되었고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브레스트로 귀환이 결정되었다. 단지 결과만 놓고 비스마르크가 승리한 것은 맞지만 이는 결코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다.
처음 상대를 발견하였을 때 독일 함대 사령관 군터 루첸스 제독은 뒤에 있는 영국 해군 본진을 먼저 생각하였다. 그는 당장 앞에 있는 먹잇감을 처단하는 것보다 영국 해군을 유리하게 몰고 다니면서 유보트가 활약할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섣부른 공격을 삼가 하였다. 하지만 조급한 비스마르크의 함장 에른스트 린덴만은 엄명을 어기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작전은 일주일 만에 취소되어 버렸다.
강렬하였지만 짧았던 생애
영국은 남아 있는 모든 군함들을 긁어 모아 곧바로 추격에 나섰다. 바로 이때 처음 언급한 소드피쉬들의 공격을 받고 조종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에 포위당하였다. 하이에나 떼에게 둘러싸인 병든 사자의 모습이었다. 5월 27일, 영국 함대는 3,000여 발의 포탄을 날렸고 그 중 600여 발이 명중되자 결국 비스마르크는 명예로운 자침을 선택하였다. 오전 10시 40분 거함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고 2,206명의 승무원 중 단 115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해전은 경우에 따라 단 한 번의 교전으로 모든 것을 순식간 소모시켜 버릴 수 있는 거대한 도박판이다. 미드웨이 해전처럼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 싸움이라면 당연히 피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경우에 따라 회피하여야 할 용기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전력 구축에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가 자신들보다 전력상 우위에 섰다고 확인된 이상 확전을 삼갈 필요가 있었다.
1941년 5월 24일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비스마르크. 하지만 이때의 교전으로 측면에 손상을 입고 회항을 결정하였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영국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던 비스마르크는 취역한지 8개월 만에, 그리고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지 불과 9일 만에 너무 용감하게 싸우다 생을 마감하였다. 결과적으로 후드와 일대일로 전력을 맞교환 해버린 상황이었지만 영국은 이후에도 강력한 해군을 유지할 수 있던 반면 독일에게 비스마르크의 손실은 너무 컸다. 결국 거함 비스마르크의 거함거포 시대의 종언을 고한 것으로 그 짧고 굵었던 생애를 역사에 남겼을 뿐이다.
비스마르크는 최초 항해에서 최후를 맞은 비운의 전함이기도 했다. <출처: wikipedia>
제원
배수량 50,300톤(만재) / 길이 241.6m / 폭 36m / 속력 30노트(시속55km) / 승조원 2,206명 / 380mm SK C/34 함포 8문, 150mm SK C/28 부포 12문, 105mm SK C/33 대공포 16문, 37mm SK C/30 대공포 16문, 20mm FlaK30 대공포 12문, Ar 196 수상기 4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