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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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잘(중앙)과 로렌스 / 1919년 파리강화회의 |
로렌스는 터키군과 싸울 때 만큼 영국 정부와는 잘 싸우지 못했다. 중동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계획에는 아랍의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 가지 예로, 영국은 유대인들이 그들이 오래 전에 살았던 팔레스타인에 그들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 팔레스타인은 수천 아랍인들의 고향이므로 누구의 국가가 되는가 하는 것에는 문제가 따를 것이 뻔했다. 영국 정부의 각기 다른 부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곤란한 것이었으므로 전쟁이 끝나자 로렌스는 파이잘과 함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
로렌스는 정부의 모든 관계자들에게 아랍인들도 전쟁에서 싸웠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그래서 그는 회의와 큰 의식이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훈장을 단 제복을 입었으나 로렌스는 가장 좋은 아랍옷을 입었다. 곧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어떤 사람은 멋진 생각이라고 하였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로렌스는 어리석다고 보았다. 그들은 그가 아랍인이 아니며, 아랍인들과 훌륭한 전공을 세웠지만 전쟁은 끝나고 아랍에서의 생활을 잊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일들이 아랍인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자치를 얻지 못했다. 중동에는 석유가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그것을 원하여 아랍 영토를 그들끼리 나눠 가졌다. 이제 로렌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슬프고 화난 마음으로 옥스퍼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파이잘과 당시 유대인의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하임 와이즈만 (Ohaim Wetzmann) 사이를 오가며 양쪽이 평화공존하기로 하는 협정에 서명을 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맺은 첫 협정이며 1978년에 "캠프 데이비드"협정이 생길 때까지 있었던 유일한 협정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로렌스의 고집과 끊임없는 설득에 힘입은 것이며 또한 양쪽이 그에게 걸었던 신뢰 덕분이었다. 요즈음 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대화가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에서는 로렌스의 업적이 더욱 돋보인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중매장이였던 것이다.
성서고고학자 로서의 로렌스
1913년의 [신광야 탐사]에서 고고학의 학문적인 성과와 군사첩보적인 성과를 동시에 성취하였다. 학문적으로 보자면 몇 가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해서 발간된 그 책[신광야]가 성경 고고학에 공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때에 거쳐간 카데쉬 바네아는 아인 카데이스(Ain Kadeis)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로렌스와 울리는 아인엘 쿠데이라트(Ain el-Qudeirat)가 카데쉬 바네아라고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며 네게브 지방 전문 고고학자인 루돌프 코헨은 아인 쿠데이라트가 구약성경(신명기 1:2,19,2:1, 민수기 13:3-21)이 말하는 카데쉬 바네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네게브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토기들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비잔틴 시대에 네게브에 있던 도시들이 왜 망하고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도 믿을만한 설을 내놓았다. 그때까지는 비잔틴 도시들은 그곳의 기후가 바뀌면서 삶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렌스와 울리는 비잔틴 시대(기원 후 4-6세기)와 20세기의 자연조건은 거의 같기 때문에 기후 문제가 비잔틴 도시들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외적인 침입 같은 인간적 조건들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 보다 40년 후에 미국인 넬슨 글뤽(Nelson Glueek)이 이 지역을 탐사하고 얻은 결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들의 조사는 아주 철저하였기 때문에 이론이나 도면도 다 믿을만 하였다. 예를 들면 나바티아 도시 시브타(Shivta)를 그린 도면은 아주 정밀하여 지금도 그 이상의 좋은 자료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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