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7장 1-4절
설교제목 : 흰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
통곡하는 여인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날이 많이 더워졌습니다. 봄을 뒤로하고 여름이 우리 곁에 와 있는 듯 합니다. 지난주 모 신문사에 호암아트홀에서 전시하는 불교미술과 관련한 기사[한겨레, 4월 20일]를 보았습니다. 조선시대 불화 중에 “석가출가도”란 그림이 인상 깊었습니다. 석가모니가 출가를 결심하고 왕궁을 떠나는 사실에 슬퍼하는 석가모니의 아내, 태자비 ‘구이’는 엎드려 있습니다. 혼란스런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바닥에 몸을 던져 비탄 속에 울고 있습니다. 바닥에 내동댕이친 악기와 빈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탄식하며 울고 있는 구이는 남편이 떠난 괴로움을 가누지 못할 만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탈을 이상적으로 표방하는 불교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한 여성상입니다. 인간이 되는 길, 또는 살아있음을 희노애락의 감정으로 지닌 자연적 인간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전시회에는 아주 특이한 발원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충남 청양군 장곡사에 있는 금동약사여래좌상에서 나온 발원문에는 한 여성의 간절한 소원이 적혀 있습니다. “남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중생정녀성남)” 다음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성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여성의 몸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석가모니의 근본 가르침도 시대의 전통과 관습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개인과 집단 안에서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는 근본원리에 대한 왜곡과 차별의 형태입니다. 우리 안에 보다 약하고 열등한 것을 배제하는 마음의 상태와 닮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소외되고 열등한 것을 돌보고 그것을 우리의 중심원리로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붙잡힌 바람
요한은 일곱인의 심판이 벌어지는 환상을 목격합니다. 여섯 번째인 떼질 때 천재지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서 땅이나 바다나 모든 나무에 바람이 불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의 모든 방위에서 네 천사들은 바람을 붙잡아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잡고 있는 장면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생명현상이 멈추고 그 자체로 활기를 잃고 죽어갈 것입니다.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는 네 천사의 모습은 당시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땅이 넓적하고 네모난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지구의 구조에 대한 인식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이는 세계는 극히 제한된 시각일 뿐입니다.
이런 네 바람은 초월적 세계와 일상적 현실(자연적 세계)을 순환합니다. 바람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숨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고, 살아있게 하는 영입니다. 히브리어로 ‘영’과 ‘바람’은 동일한 단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바람은 모든 것을 수태시키고, 풍요를 가져오는 영입니다. 바람은 사고나 관념을 구체적인 현실로 변환하는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의 역동적인 측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모든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은 멈추고, 우울과 정지의 상태에서 모든 생명력은 고갈되는 것입니다. 깊은 우울상태를 경험하는 분들은 무정동, 무감각을 지닌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바람이 불지않아서 살아있다는 어떤 느낌도 감흥도 없는 상태에 있는 경우입니다. 중년의 고비를 넘어가는 분에게 바람이 불어서 외도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 바람은 일종의 새로운 역동적 움직임을 추동하려는 무의식의 충동력입니다. 죽어가는 상태에서 일종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경험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실현되기 때문에 관계의 갈등으로 치닫고 맙니다.
네 바람을 네 천사가 붙잡고 모든 생명현상과 창조력을 차단하려고 하였지만,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돋는 곳에서 올라와 네 천사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아라(7:3).”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심판의 유예기간, 즉 하나님의 운명적 배열, 선험적 패턴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이 찍힐 때까지 유보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어떤 수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도장을 받은 자 –십사만 사천
요한은 이마에 도장을 받은 자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마의 표의 상징은 성서에서 하나님은 동생을 죽이니 가인에서 표를 주셔서 만나는 자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창 4:14-15). 이 표는 바로 보호의 표식입니다. 또한 출애굽을 할 때 문인방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일종의 표를 합니다. 이것은 죽음과 심판의 세력이 그 집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꿈에서도 이런 표식의 꿈은 항상 매우 중요합니다. 그 표식 자체가 그 사람에게 어떤 확고한 보호와 안내를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분의 꿈에서 길을 가던 끝에서 만난 것은 어떤 안내 표지판이었습니다. 그 꿈은 이미 정신 속에 삶의 길을 안내할 표지판이 있음을 확고한 상징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는 길을 잃지 않고 너에게 배열된 길을 갈거야라고 던져주는 메시지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마에 표식을 받은 자가 큰 무리로부터 분리되어 십사만 사천명이 됩니다. 이러한 구별이 바로 심판의 형국입니다. 선택받은 자이 일반인 사이의 구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셀 수 없는 인간 집단에서 14만 4천은 그 많지 않은 존재입니다. 많은 이단 종파에서는 이 숫자를 하나의 고정화된 숫자로 표시합니다. 이 숫자에 대하여 문자주의 해석은 실제로 유대인의 각 지파에서 구원받은 자의 숫자라고 보기도 하고 순교자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서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122×103=144,000 12라는 12지파의 혹은 완전성의 숫자에 1,000, 당시 세계관에서 가장 큰 수라 할 수 있는 숫자의 결합입니다. 결국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표상합니다. 이런 12와 10의 조합은 그 자체로 전체성, 개성화을 표상합니다. 집단적 무리, 그 자체의 무의식적 대중로부터 전체성, 개성화를 의식적으로 실현해가는 구별된 자는 모두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
그런데 그런 자들의 모습을 흰 옷을, 흰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이라 칭합니다(7:9-13). 이 흰옷을 입은 자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자들이며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다(7:14-15)라고 일러줍니다. 흰 옷은 바로 정화의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변환된 가치를 지닌 것을 상징합니다. 새롭고 순수한 태도로 변환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큰 환난을 겪었다는 것은 어떤 정신적 변환도 고통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변환, 새로운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어야 함을 일러줍니다. 새로운 삶의 이행은 반드시 고통이 수반되어, 마땅히 그 고통을 겪어낼 때만이 변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내담자들에게 지금의 고통은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스런 경험이며,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큰 환난을 겪은 자만이 흰 옷을 입을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고통은 새로운 변환을 위한 필수 과정임을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어린 양의 붉은 피로 옷을 빨아서 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피의 세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순교자의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이런 피의 세례는 일종의 원시종교에서 동물의 피를 뿌리고 마시는 제의의 형태와 유사합니다. 그 피의 세례를 통하여 그들은 신의 자녀로 정체성을 부여받습니다. 붉은 피로 옷을 빠는 것은 일종의 피의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성한 신분에 참여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동물적 충동을 희생하여 신성함에 이르는 순교적 삶, 종교적 정신적 삶에 귀의하는 형태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신적 형태로 고양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성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고양되면 순교자 콤플렉스, 성자 콤플렉스에 압도되어 지상의 현실과 몸과 본능을 터부시하게 합니다. 실제로 이런 성자 콤플렉스가 초기 기독교시대에서 나타난 결과, 도시는 비어있고, 사막에 사람들이 가득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빨아 흰 옷을 입은 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정체성의 고귀함은 어떤 효력과 어떤 고려도 용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신성함, 영혼에 대한 가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오직 물질적 세계에만 몰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토록 우리는 우리 존재의 존엄과 고귀함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존재의 불안과 부실함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어내고 피의 세례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이 우주에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흰 옷을 입은 자임을 우리의 마음 속에 굳게 품고 당당하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