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정권 시절, 광화문을 뒤덮었던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집회 이후, 서울광장 집회는 늘 경찰버스에 둘러싸인 채 가졌기에 ‘가두리 집회’라는 슬픈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슬픈 광장이 몇 년 만에 자유와 해방을 만끽했다. ‘퀴어 문화축제’를 갖는 성소수자들을 혐오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경찰버스가 아닌 자원봉사자와 외국인, 성직자 등 시민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인간 띠를 만들어 광장을 둘러싸는 장면은 성소수자 운동을 상징하는 여섯 빛깔 무지개 퀴어 컬러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사랑하라, 저항하라, 퀴어 레볼루션’을 주제로 지난 6월 9일부터 시작되었던 ‘2015년 제16회 퀴어 문화축제’는 숱한 난관을 뚫고 3주간의 대장정을 그렇게 시민들과 함께하며 마무리했다. 마침 축제기간 중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민적 관심까지 모아져 더욱 축제 분위기를 돋우었다. 물론 ‘퀴어 문화축제’에 반대하는 일부 보수 개신교 신자들의 동성애 혐오 집회는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때 ‘리퍼트 대사 쾌유 기원 및 국가안위를 위한 경배 찬양행사’를 거행했던 그들은 이번에도 한복을 입고 부채춤 추고 난타공연에 발레까지 하며 동성애 혐오 집회를 열었지만, 그 집회 자체가 오히려 더 혐오스러웠다는 평가다. 거기에다 그 리퍼트 대사가 축제 현장을 찾아와 그들 눈앞에서 동성결혼 법제화에 성공한 미국의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 보고 충격 받는 웃지 못 할 상황도 펼쳐졌다. 이런 소란스러움이 일부 있었지만, 서울광장에서 명동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광장으로 돌아오는 2시간 걸친 퀴어 퍼레이드는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평화롭게 진행되어 참가자들을 고무시켰다. 이미 동성애 수용 증가율에서 조사대상 39개국 중 가장 높게 나왔다는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결과도 있지만, 이번 행사가 우리 국민의 소수자 인권 감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프란치스코 교황 “나는 비정상적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마침 지난 6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성 베드로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이혼자나 재혼자를 비정상적인 가족관계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면서 “나는 비정상적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밝혔다. 교황은 “폭력 등으로 연약한 배우자나 어린이 등이 심하게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별거가 불가피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 신에 대한 믿음과 자녀에 대한 사랑을 계속 유지한 사람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정상적으로 생활하기 매우 어렵다”면서 교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보듬어야 함을 촉구했다. 사회로부터 비정상적이라고 낙인 받는 자들에 대한 교황의 이런 자세는 도덕률에 대한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 통찰을 위한 섬세한 접근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에서 무수히 만난 자들, 간음한 여인이나 죄를 뒤집어썼다고 여겨졌던 장애인들,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비난받았던 제자들 등 율법에 다친 자들에게 다가선 마음 자세가 그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율법학자들은 펄쩍 뛰며 하늘이 무너질 듯 반발했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양 같은 그들은 그렇게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미 “동성애자가 신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각별한 마음을 표현했던 교황은 지난해 세계주교대의원대회(주교시노드)에 동성애자 문제를 의제로 올렸다. 하지만 ‘동성애자도 은사(gifts)가 있으며, 가톨릭 사회에 헌신할 자격이 있다’는 문구를 ‘동성애 성향이 있는 남녀를 존중하는 태도로 환대해야 한다’로 수위를 낮추기까지 했지만, 결국 보수파의 벽에 막혀 최종보고서 채택엔 실패하고 말았다. 최종보고서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소극적인 언급에 그쳤으며, 결혼은 남녀만 할 수 있다고 확실한 선을 그었다. | | | ▲ 6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 시민들이 행진하고 있다. (사진 제공 = 강은주) |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고, 묶인 것을 푸는 자유와 해방의 ‘자비의 특별 희년’ 교회 내 이런 보수의 장벽이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하여금 자비의 특별희년(Jubilee of Mercy)을 선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교황 스스로 희년 선포 이유를 설명하면서 “교회가 자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하면 더 분명히 할 수 있을지 자주 생각해 왔다”고 밝힌 것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일인 12월 8일에 희년이 시작하도록 한 것 역시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시작한 일을 교회가 계속 추진해 나아가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의미 부여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후에 개최되었던 트리엔트공의회 체제였다. 종교개혁에다 프랑스대혁명 등의 위기를 겪으면서 수세적 입장에 처하다보니 어느덧 세상에 대해 문을 걸어 잠그고 울타리부터 치는 교회, 고고의 성에 갇혀 무엇이든 금지시키는 데 관심을 두는 검열관이 되어 금서목록이나 만드는 교회, 세상을 단죄하며 심판하는 교회가 되었다. 교회가 세상에서 고립되는 게토적 상황에 처하게 됨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400년 동안의 그 틀을 깨고 세상 속으로 나가자는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다. 단죄하거나 심판하기에 앞서 세상을 이해하고 보듬는 교회, 울타리를 걷어버리고 세상과 사귀려는 교회, 시대의 징표를 받아들이며 오히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포지티브한 교회가 되고자 했다. 그런데 이 묶인 것을 푸는 것이야말로 바로 희년 정신이 아닌가. 부처님과 예수님이 지금 다시 오신다면 성소수자들을 껴안을까 인류의 인권발달사란 결국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하나 둘 받아들인 것 외 다른 것이 아니었다. 100년 전만 해도 여성은 서구에서 시민이 아니었다. 50년 전만 해도 흑인은 미국사회에서 시민이 아니었다. 20년 전만 해도 동남아 이주민은 한국사회에서 시민이 아니었다. 10년 전만 해도 장애인은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아니었다. 2000년 전 갈릴리 땅에서 예수께서 당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펼치신 작업도 그것이었다. 그 시대의 가장 소외된 울타리 밖 사람들에게 종교권력이 찍었던 죄인이란 ‘낙인’을 풀어주고 울타리 안으로 모두 불러들이셨다. 그런 행위가 그 시대의 권력자들에 의해 불온한 자로 ‘낙인’ 찍히도록 해 미움 받고 죽임까지 당하시게 만든 유일한 이유였다. 지난 6월 17일, 조계종 노동위원회 ‘성소수자 초청법회’에서 효록 스님이 “부처님께서 2015년 지구라는 별, 한국이라는 문화에 계신다면 뭐라고 했을까. 성소수자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말할 것 같다"고 했는데, 이 시대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일반사회보다 교회에서 더 혐오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성소수자들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은 분명하다. 내가 아무리 동성을 사랑하려 해도 끌리지가 않듯이, 아무리 이성을 사랑하려 해도 끌리지 않는 성소수자들만의 특성을 인권 차원에서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황의 바람대로 성소수자나 이혼자, 낙태자 등 교회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교회의 전향적 태도가 요구되는 까닭도 그러하다. 자비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자비의 특별희년에 교회 안에 그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가. 비록 한 걸음에 다가가지는 못하겠지만, 이 자비의 특별희년에 우리는 당신 선교의 전부인양 공생활 내내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몸소 찾아다니셨던 예수의 그 마음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