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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 율법을 지키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분명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율법은 저주인가?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가?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증언하고 있다. 즉 율법을 행하는 것은 의로운 행위이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책망하고 있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이다. 이처럼 바울은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고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롬2:13,23). 그러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을 자랑하는 제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2:13,23)
2 의로움을 위해 무엇에 의존하는가?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91~92참조)
개역 성경에서 ‘속한’은 헬라어로 ἐξ(에크)이며 ‘원인, 동기, 이유’를 뜻한다. 즉 율법의 행위가 원인이 되고, 동기가 되고, 이유가 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로는 ‘속한’을 על קיום (알 키움) ‘~에 의존하다’로 번역했다. 즉 의로워지기 위해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자들이며 이런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율법에 순종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행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의존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술 취하고 방탕하게 살면서 교회 나오고 헌금을 한다면 그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살 거면 교회를 다니지 마세요. 헌금할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성도가 되세요, 회개하세요.”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나 헌금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마음의 중심을 책망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고 헌금하는 것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율법의 행위를 책망할 때 율법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잘못된 마음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 행위가 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방인이 믿음으로 의로움에 이르렀지만 의로운 법도를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믿음이 없이 행위로 의로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믿음의 없는 할례는 헛될 뿐이며 믿음이 없는 예배도 헛될 뿐이다. 그렇다고 율법의 행위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의로움은 행위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믿음으로 의의 법(율법)을 준행해야만 율법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30-33)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본질이 아니다. 율법의 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때 말씀을 행할 수 있다. 본질은 행위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할 때 행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행위에 의존한다면 율법이 추구하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고 지킬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저주가 되지만, 믿음을 의지한다면 율법이 추구하는 의로움에 이르기 위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더욱 행하여 완전하게 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보여준 의로움에 이르는 삶이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17:1)
3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율법이다
바울은 율법이 죄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무엇이 죄인지 알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범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회개는 율법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할까? 당연히 행위는 필요하다. 다만 의로와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법'이다. 즉 믿음으로 지키는 율법을 말한다.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의로와진다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의로와진다면 하나님께 자랑할 것이 있는 것이다. 같은 거 같으나 다르다(롬3:20,27,28).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3:20,27,28)
#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4 율법은 마음만으로 지킬 수 없다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93~95참조)
예슈아께서는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23:23).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율법이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은 아니지만, 믿음은 율법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율법은 행함으로 지킨다. 그리고 행함은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삶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분을 신뢰하고자 하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먼저 의롭다 하셨다. 그러나 믿음이 아직 온전한 의로움에 이른 것은 아니다. 어린 신앙(초신자)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움의 수준은 낮다. 그리고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청종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즉 순종하는 믿음으로 율법과 계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많은 이방인이 예슈아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회당으로 들어왔다. 율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살지 않던 부정한 이교도들이 회당으로 들어올 때, 유대인들은 무척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을 잘 모르고, 율법도 잘 모르면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들어오는 이방인들을, 초신자의 믿음으로써 의로운 자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가르쳤다. 마치 아브라함이 먼저 믿고 그 후에 토라를 준행함으로 언약을 성취한 것처럼, 이방인들이 밟는 믿음의 여정을 인정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행15:19~21)
그리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가식적인 자들에게 마음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을 믿으면 율법을 지킨다.(지금은 반대로 생각하지만 성경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모두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문화가 된 나라에서, 마음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행함과 믿음을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다. 분명 토라를 준행하는 것은 마음(믿음)으로만 할 수 없다. 행동으로 순종해야만 한다. 믿음으로 우리가 살게되리라는 언약은 명령을 준행함으로 살게 되리라는 언약은 서로 상충될 수 없고 서로 모순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두 언약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 이는 믿음으로 율법을 더 굳게 세운다는 바울의 말과도 일치한다(롬3:31).
율법은 행함으로 지킨다. 그리고 행함이 모여 삶이 된다. 만약 행함이 없이 믿음만 필요하다면 우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도, 우리 삶이 변화될 필요도 없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 여호와의 법도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슈아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지 않으실 것이다 (눅18:8).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모두 믿었지만 순종하지 않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믿음으로 시작한 우리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5 행복을 주는 율법(토라)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95~96참조)
율법은 저주일까? 바울은 “율법이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롬7:12) 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의 저주’라고 말했을까? 왜냐하면, 율법에는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순종의 법과 불순종의 법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 두가지가 있다(롬8:2). 신명기 28장에 순종에 따른 복의 언약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의 언약이 나오는데, 순종은 성령의 법으로 생명을 얻게 하지만, 불순종은 죄의 법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즉, 율법의 저주는 불순종에 따른 저주이다. 순종으로 축복이 돼야 할 것이 불순종으로 저주가 되었고, 그 저주를 담당하기 위해 예슈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이 없어 원망하고 불평하자, 불 뱀이 그들을 물게 하셨다. 그들이 죽게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놋 뱀을 장대에 매달게 하시고, 그 놋 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셨다. 놋 뱀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슈아일까? 아니다. 예슈아께서 담당하신 죄이고 불순종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죽기를 원치 않으셨고, 회개함으로 다시 생명의 길을 가기 원하셨다.
당시에 놋 뱀이 죄를 상기시켰다면, 오늘날 예슈아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의 죄를 상기시키고 회개하게 하며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겠는가? 그러므로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바라보는 자는, 자신의 죄성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불순종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죄성이 죽은 우리는 예슈아처럼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 저주가 아니라 율법에 불순종(죄)하는 것이 저주이다.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순종한다면 반드시 그의 목적과 같이 행복하게 될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생명의 율례를 지키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거라고 대언하고 있다(겔33:14,15).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10:13)
에스겔 33:14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5.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 갈라디아서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6 모두 믿음으로 비롯되도록 정하신 이유
아브라함이 무할례때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써 무할례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또한 믿음으로 명령에 순종한 의를 할례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또한 할례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아브라함도 토라를 지켜 온전하게 된 것 처럼 믿음으로 시작한 이방인도 토라에 순종함으로 온전해 질 수 있고, 할례로 시작한 유대인도 믿음으로 토라를 준행해야 온전해 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차별이 없이 동등하다(롬4:11,12).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롬4:11,12)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창26:4,5)
이처럼 모든 민족을 은혜 안에서 상속자들로 삼기 위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예슈아를 통해 믿음으로 언약을 취하도록 정하셨다. 이것은 율법에 속한 자나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나 동일하다(롬4:16).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예슈아 안에서 하나(동일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갈3:28). 또한 예슈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령도 예슈아의 믿음안에 거하는 자들이 받도록 정하셔서 모두 믿음에서 비롯되도록 만드셨다. 이는 예슈아께서 아브라함의 복을 모든 민족에게 차별없이 부어주시고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다(행2:33 요7:39).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4:16)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8)
7 믿음이 율법을 헛되게 할 수 없다
바울은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분으로서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이고 동일하다(살3:28).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면 율법을 파기해도 될까?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금하셨다(God forbid)고 말하고 있다. 율법(토라)을 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도리어 믿음으로 율법을 세운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롬3:30,31). 여기서 '파기하다'의 헬라어 뜻은 '완전히 쓸모없게 하다, 폐지하다, 멀리하다, 소용없게 하다, 헛되다' 등이다. 즉 믿음으로 율법을 쓸모없게하고 헛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슈아께서도 말씀하셨다. 예슈아께서 초림하신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마5:17). 여기서 '폐하다'의 헬라어 뜻은 '파괴하다, 분리하다, 무효하게 하다, 뒤엎다, 내던지다' 등이다 앞에 '파기하다'와 거의 비슷한 뜻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슈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율법을 무효화하고 헛되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믿음이 율법을 세운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슈아께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완성의 헬라어 뜻은 '충만'이다. 즉 율법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바울과 예슈아는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같은 가르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롬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Seeing it is one God, which shall justify the circumcision by faith, and uncircumcision through faith.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Do we then make void the law through faith? God forbid: yea, we establish the law.
8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신다. 오직 진정한 유대인과 진정한 할례자를 찾으실 뿐이다. 육체적인 유대인이어도 내면까지 유대인이길 원하시며 육체가 이방인이어도 내면이 유대인이길 원하시는 것이다. 또한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육체에 할례가 있어도 내면도 할례받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육체에 할례가 없어도 내면이 먼저 할례받기를 원하시는 것이다(롬2:28,29).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율법을 준행한다면 할례는 유익하다(롬2:25). 내면의 할례를 말한다고 해서 육체의 할례를 폐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할례가 범사에 유익이 많다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롬3:1,2). 그러므로 성경의 어떤 것도 폐한 것 처럼 보인다면 모두 오해이다. 성경을 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폐한것 같은 어떠한 말씀도 우리의 착각일 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8,29)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3:1,2)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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