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과 들, 그리고 산과 사람의 여행지, 하동
하동송림은 느긋하게 걷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위로한다.
하동읍내에서 섬진강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오른다. 경이로운 산과 들, 그리고 강변 풍경이 주변으로 들고난다. 그 길목에서 만나는 하동송림, 최참판댁과 악양들녘, 화개장터 등은 시니어층에게 정서적으로 친숙한 여행지다. 자가용 여행을 추천하지만 버스 여행도 가능하다.
하동팔경의 모래밭과 소나무 숲
자연스레 조영남의 노래가 떠오른다. “아랫말 하동 사람, 윗말 구례 사람~” 하는 구절이다. 하동은 경상남도의 서남쪽 가장자리로 전라남도 구례 등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의 지리산과 서쪽의 섬진강, 그리고 남쪽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남해를 아우른다. 산과 강, 바다까지 갖췄으니 남부럽지 않은 자연이다. 그럼에도 지명은 ‘하동(河東)’, 즉 강의 동쪽이다. 그 이름이 말하는 강은 당연히 섬진강이다. 하동을 제대로 느끼려면 섬진강을 낀 구간이 제격이다. 그 가운데 하동읍에서 화개장터에 이르는 섬진강대로변을 추천한다. 주변으로 최참판댁과 쌍계사 등도 만날 수 있다.
첫 출발지는 천연기념물 제445호 하동송림공원이다. 섬진강철교 아래 강변 모래사장이 어우러진 소나무 숲이다. 하동팔경 가운데 ‘백사청송(白沙靑松)’에 해당한다. 송림은 조선 영조 21년(1745)에 도호부사 전천상이 강변의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조림했다. 2만 6,000㎡에 소나무 1,000여 그루가 푸른 그늘을 드리운다. 200~300년은 족히 넘는 노송이 즐비하다. 하동 하면 쌍계사나 화개장터부터 떠올리지만, 하동 사람들에게는 하동송림이 그 못지않게 친근하다. 어린 시절 단골 소풍지였고 데이트 장소였으며 피서지였다. 하기야 하동뿐일까. 지역마다 송림은 대체로 비슷했다. 방풍림으로 조성해 소풍지로 쓰였다. 예전에는 그 숲에서 고기도 굽고, 확성기를 틀어놓고 술잔도 나눴다. 시니어층에게는 친숙한 추억이다. 송림은 크기의 차이는 있어도 공감의 정서는 다르지 않다. 다만 현재는 천연기념물로 귀하게 여겨야 하는 숲이다. 나무마다 일련번호를 매겨 관리하고 자연휴식년제를 시행해 3년씩 번갈아가며 절반만 개방한다.
송림공원 입구는 강 쪽으로 나란한 송림의 울타리 가운데에 있다. 숲 안으로 걸음을 내자 솔숲 특유의 청량감이 반긴다. 적당한 그늘을 드리워 초여름 더위를 잊기에 안성맞춤이다. 가끔씩 고개를 들면 하늘을 향해 뻗은 소나무와 푸른 솔잎이 모든 시름을 앗아간다. 옛날에 활을 쏘던 하상정(河上亭)이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숨을 골라도 좋겠다. 몸과 마음을 함께 다독이는 숲의 가치를 새삼스레 느낀다. 하동송림은 하동군청이나 하동터미널, 하동역 등지에서 1~2km 거리다. 이동이 편리한 것도 장점이다.
[왼쪽/오른쪽]하동송림의 소나무는 ‘푸르다, 나이들었다’의 의미를 담아 ‘창송(蒼松)’이라고도 부른다. / 하동송림의 소나무는 일련번호를 붙여 귀하게 관리한다. [왼쪽/오른쪽]강변에 울타리를 둬 천연기념물의 숲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 / 하동송림의 하상정에서는 과거 활쏘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방대한 《토지》와 장대한 악양들
숲을 나와서는 모래사장으로 걸음을 낸다. 백사청송의 나머지 절반, 백사에 해당하는 하얀 모래다. 한때는 바람에 실려 소나무 숲까지 밀려들었다. 모래가 많다는 의미의 ‘한다사군(韓多沙郡)’이라는 하동의 옛 지명을 실감한다. 모래밭을 지나 강물에 가볍게 발을 담근다. 물빛이 곱고 여리다. 지나온 발자국 뒤편에서 푸른 송림이 호위한다. 하동팔경다운 장관이다. 그렇다고 강물에 발 담그고 모래만 밟고 나올까. 섬진강 하면 가막조개라 부르는 재첩을 빼놓을 수 없다.
재첩은 섬진강과 남해의 바다가 만나는 지역에 산다. 5~10월까지 잡는데, 산란기에 접어드는 6월이 토실하고 맛있을 때다. 하동송림 앞 강변은 TV 드라마 <식객>에 나왔던 재첩잡이 촬영지다. 재첩 잡는 풍경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굳이 체험의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 나무작대기 하나로 모래를 파기만 해도 숨어 있던 재첩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둘 잡다 보면 그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6월이라도 여름 볕이다. 한낮을 피해 잠깐 재미를 느껴보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왼쪽/오른쪽]재첩잡이 체험은 도구가 없어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 섬진강의 재첩잡이 배들 또한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든다.
하동송림을 나와서는 북쪽으로 향한다. 10여 km 거리에 악양슬로시티와 최참판댁이 있다. 섬진강대로에서 살짝 벗어난 평사리다. 최참판댁은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최서희의 집이다. 그 주무대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지금의 악양슬로시티다. 최참판댁은 하동군이 소설의 무대를 현실에 재현한 공간이다. 마치 발끝으로 소설을 읽듯, 이야기의 장면을 찾아 걸을 수 있다. 지난 2006년에는 SBS 대하 드라마 <토지>를 촬영했다. <토지>를 시청한 이들은 눈으로 더듬어 흔적을 찾는다. 물론 드라마를 보지 않았어도, 또 600여 명이 등장하는 소설 《토지》를 읽지 않았어도 큰 문제는 없다. 1897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한 집안의 흥망성쇠는 그 자체로 우리네 지난 삶이 집약된 역사다. 시니어층에게 더 익숙한 고향의 정취와 옛 시절의 사연이다.
최참판댁까지는 매표소에서 경사로를 걸어 오른다. 그 좌우로 드라마 속 등장인물의 집과 이름이 들고난다. 길목에는 몇몇 카페도 들어섰다. 악양의 너른 들을 감상하며 쉬어가기 알맞다. 최참판댁 역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터를 잡았다. 최치수의 사랑채, 최서희가 머물던 별당채, 윤 씨 부인의 안채 등 10여 동의 건물로 이뤄졌다. 입구는 문간채와 행랑채 쪽으로 나 있다. 문간채로 들어서 왼쪽은 최서희의 별당채다. 작은 연못을 품어 한층 호젓하다. 마당을 가로질러 반대편 끝은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다. 사랑방에선 하동군 명예참판이 앉아 글을 읽는다. 인사를 드리고 잠시 담소를 나눠볼 수 있다. 사랑채 동쪽에는 악양들을 품은 누마루를 냈다. 최참판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악양의 풍경을 누려본다. 누마루는 풍수적으로도 백두대간 지리산의 기가 모여 좋은 기운을 받아갈 수 있다. 행랑채 대문에서 바라보는 악양들이나, 뒤편 초당에서 조금 떨어진 평사리문학관 가는 길도 운치 있다.
[왼쪽/중간/오른쪽]최참판댁 입구 카페에서 더위를 피해 악양들의 부부송 등을 조망할 수 있다. / 명예참판과 담소를 나누며 옛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 최참판댁 누마루는 풍경을 감상하고 잠깐 누워 쉬기도 하는 등 모두의 휴식공간으로 쓰인다.
호리병 속 별천지, 지리산 화개동
최참판댁을 나와서는 고소성 가는 길가의 전망대에 들른다. 평사리의 전경을 가장 또렷하게 품어 안을 수 있는 명소다. 악양들은 7세기 나당연합군의 소정방이 중국 악양의 지형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였다 전한다. 최참판댁과 동정호, 섬진강 등이 눈에 가득 찬다. 들녘에는 부부송도 눈길을 끈다. 최참판댁에서는 둘로 보이던 나무가 슬며시 하나로 합쳐지며 부부일심동체의 마음을 전한다. 그 황홀한 풍경 앞에서 누군들 욕심을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부부나 친구끼리 서로를 향한 다짐을 하나씩 나눠가져도 좋겠다.
다시 섬진강대로로 접어들면, 강줄기가 갈라질 때 즈음 남도대교가 나타난다. 그리고 시끌벅적 복작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쳤다는 화개장터다. 평사리가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였듯, 화개장터는 김동리 단편소설 <역마>의 무대다. 한때 우리나라 5대 장터로 꼽히던 곳이다. 고사리, 더덕, 감자 등을 팔러 온 지리산 화전민, 광양과 여수에서 수산물을 가져온 어민들, 전국을 떠도는 보부상들이 한데 모여 큰 장을 펼쳤다. 당시에는 화개교 너머에 장이 섰다. 장터를 복원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2014년 한 차례 화재를 겪었으나 올 3월 한층 말끔하게 단장했다. 변함없이 지리산 약초와 장터 먹을거리들이 시장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가수 조영남도 빠질 수 없다. 화개장터를 되살린 원동력이 그의 노래 <화개장터>다. 장터 마당에 조영남 동상이 있다. 기타를 들고 너털웃음을 짓는 모습 그대로다. 장터를 찾는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인기다. 면사무소 옆 골목으로 난 길에는 조영남갤러리와 카페도 있다. 자그마한 갤러리지만 그가 그린 작품과 노래가 담긴 음반 등을 전시한다. ‘쎄시봉’ 시절의 ‘젊은 조영남’ 사진도 시니어층을 반긴다.
[왼쪽/중간/오른쪽]최참판댁에서 고소성 가는 길의 전망대에서 하동의 매력이 모두 담긴 풍경을 볼 수 있다./ 악양들의 너른 풍경은 인간사의 사소한 시름을 잊게 하는 힘이 있다. / 화개장터의 명물로 자리 잡은 조영남 동상
화개장터의 여흥이 가시지 않을 때는 지리산 자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는 최치원의 글을 빌려 언급한 지리산 화개동이다. 봄날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쌍계사 십리길이던가. 하지만 쌍계사가 벚꽃으로만 기억될까.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 보물 제500호 대웅전 등 국보 1점에 보물 6점을 간직한 고찰이다. 특히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썼다.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에 자리하는데, 3.63m에 이르는 높이가 그 위용을 뽐낸다. 우리나라 불교음악 범패의 발상지인 팔영루와 보물 제500호 대웅전, 보물 제1378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등도 천천히 둘러볼 일이다. 다만, 쌍계사는 금당까지 오르막이거나 계단이 많은 편이다. 걸음이 불편한 이는 화개장터에서 여행을 마무리해도 무방하다.
하동공용터미널에서 쌍계사까지는 시내버스가 운행된다. 악양과 화개를 지나는 버스다. 버스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움직이면 대중교통으로 돌아볼 수 있다. 다만 초여름 날씨를 감안하면 자가용을 권한다. 버스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읍내에서 가까운 하동송림과 다른 여행지 한두 곳을 엮어 돌아보는 것이 대안일 듯하다.
[왼쪽/오른쪽]최치원이 짓고 쓴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 / 쌍계사는 경내에 이르는 숲길 또한 깊고 푸르다.
추천 여행 코스 (당일 코스)
하동송림공원(음수대, 벤치, 장애인화장실, 장애인주차장, 제방 자전거도로 휠체어 이동 가능) → 재첩잡이 체험(각종 시설 하동송림공원 이용) → 점심식사 → 최참판댁(관광안내소, 경로 무료, 카페, 장애인주차장, 장애인화장실, 장애인 전동차 이동 서비스, 최참판댁 휠체어 이동 가능) → 화개장터(관광안내소, 장애인화장실, 장애인주차장)
추천 여행 코스 (1박2일 코스)
첫째날 : 하동송림공원 → 재첩잡이 체험 → 점심식사 → 최참판댁 → 저녁식사 및 숙박
둘째날 : 화개장터 → 점심식사 → 쌍계사(경로 무료, 장애인화장실, 사찰 앞 식당가) → 귀가
여행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