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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광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박이수
컨테이너
분명 공중전화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쇠 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뜨막해진 뒤였다. 차도에서 건너온 진동이 이따금씩 컨테이너를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습기 먹은 구두들은 새벽이 깊을수록 매운 가죽냄새를 토해냈다. 눈알이 시큰거렸다. 차츰 더해가는 한기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전기요를 꽂을 수도 없었다. 습해진 콘센트는 자칫하면 합선되어 전기요를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던 대리기사의 발소리가 끊기고도 시간이 꽤 흘렀다. 강도가 들쭉날쭉한 진동이 연달아 등을 훑고 지나갔다. 또각또각 날카로운 구두굽이 사납게 보도블록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하천 쪽으로 사라진 뒤 분식집 화장실 쪽에서 유기견의 기척이 한 번 들려왔을 뿐이다. 나는 재채기가 차오르는 목을 눅눅한 담요로 감쌌다. 지독한 한기와 적당한 위태로움에 내 몸은 이미 익숙해졌지만, 어두운 동굴 속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소리란 소리가 모두 사라지자, 더욱 예민해진 내 귀는 밖에서 들리는 미세한 기척을 알아챘다. 공중전화 버튼 누르는 소리였다. 나는 몸을 질질 끌며 출입문 쪽으로 기어갔다. 전화 부스 앞에 여자가 하나 서 있었다.
전씨를 따라 나는 그의 안집으로 올라갔다. 삼층은 내게 숨이 컥컥 막힐 정도로 오르기 벅찬 높은 곳이다. 이 건물에서 생활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안집 거실로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널따란 거실엔 잡채, 떡, 갈비, 배추김치…. 색색의 먹음직스런 반찬들로 가득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 오늘이 이 양반 귀빠진 날이야.
전 씨의 부인이 주방에서 미역국을 내오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큼직한 원뿔모형무늬의 홈드레스를 입은 탓인지 덩치가 유난히 커보였고 목소리는 다른 때보다 부드러웠다. 상 위에 국그릇을 올려놓는 그녀의 팔뚝은 미어터질 듯이 튼튼했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거의 정장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도 두 사람이나 있었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세 사람 보였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상 앞에 둘러앉자, 낯선 남자들이 거실 귀퉁이에 놓인 카메라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 씨가 운영하는 스포츠용품점 벽에 걸려 있는 기이한 근육질의 사진들을 떠올리며, 크게 확대하여 걸어둔 전 씨네 가족사진을 올려다보았다.
- 많이 먹어라.
전 씨가 갈비찜이 담긴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놓으며 웃었다.
- 그분은 누구시죠?
낯선 남자가 물었다.
- 음,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입니다. 함께 지낸 지는 벌써 3년 정도 됐나 봅니다. 음, 가족이란 게 뭐 별 건가요. 서로 돕고 지내는 게…….
전 씨는 말을 하는 도중 자주 혓바닥을 꺼내 입술에 침을 발랐다. 길게 말을 이어가는 그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부인은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모으고 점잖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어색해보였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도 돌아가면서 아버지인 전 씨에 대해 각각 한 마디씩 했다. 나와 비슷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모두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손짓으로 대화하며 간간이 웃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 한 마디 하시겠습니까? 전영찬 선생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든 상관없습니다.
낯선 남자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 불쌍한 사람들을 많, 많이 도, 도와주시는 훌, 훌륭한,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저에게…… 커, 커, 컨테이너도 지, 지어주고, 나, 나무로 치, 치, 침대도 마, 만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겨우 두어 마디 하고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 잘했다.
전 씨가 속삭이며 내 밥 위에 갈비를 얹어주었다. 나는 처음 그가 내게 사주었던 달달한 제육볶음을 생각하며 갈비를 뜯었다. 고깃살은 여전히 달고 부드러웠다. 낯선 남자들은 식사를 하지 않고 돌아갔다.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전 씨 부인에게 이번 달 집세를 건네고 컨테이너로 돌아와, 수선을 마친 구두들을 다시 한 번씩 손질하여 진열대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나는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내가 타고 있는 차는 바로 쇠로 만들어진 상자, 컨테이너다. 하나뿐인 출입문 양쪽에는 빨간 단추 같기도 하고 무당벌레의 등판 같기도 한 헤드라이트가 켜져 있다. 나는 넓은 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발에 힘을 가한다.
나는 가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차도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과식을 한 탓에 목으로는 자꾸 트림이 차올랐다. 밖의 공기는 오월의 햇살과 자동차들의 열기로 다소 후끈거렸다. 나른한 오후였다.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 손님이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가게로 들어섰다. 여자는 진열된 신발들을 빙 둘러보고 나서 종이 백 안에 넣어온 구두를 꺼냈다.
-굽을 좀 높일 수 있을까요?
여자가 내민 구두를 받아든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기우뚱 흔들렸다.
-어, 얼마나 노, 높여드려요?
-10센티 쯤.
여자는 거추장스럽게 옆으로 뻗어 있는 내 오른쪽 다리로 두고 있던 시선을 돌려 어눌한 발음이 새나오는 내 입술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듯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여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진열된 신발들을 무연한 눈빛으로 구경했다. 내 가게에는 그녀처럼 젊고 예쁜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구두는 없다. 진열해놓은 신발들은 거의가 투박한 성인 남성용 신발들이다. 그것도 늘 진열대를 채우지 못하는 수량에 불과했다. 나는 진열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수선한 구두들을 빈칸에 올려놓곤 했다. 이틀 후에 들르겠다며 여자가 돌아가고 난 후, 왼쪽에 10센티 키높이 깔창을 넣은 운동화를 신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두 다리의 길이가 맞춰졌으나 오른쪽 다리는 여전히 바닥을 딛고 서지 못했다. 휜 채 굳어버린 복숭아뼈가 꺾일 듯이 아팠다. 나는 통증을 참기로 하고 간신히 한 걸음을 더 떼어놓았다. 이번엔 무릎관절이 팍팍해지더니 다리가 휙 꺾여버렸다. 양손을 바닥에 짚은 채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만 나는 출입구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문을 닫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쓸모없이 길게 뻗은 오른쪽 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인력사무소 소장이 양복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가게로 들어섰다. 외출을 할 모양이었다. 키높이 신발을 신지 않은 그의 키는 심하게 작아보였다.
- 조, 좋은 데 가시나 봐요?
나는 일주일 전 그가 주문한 키높이구두를 꺼내 그의 발치에 놓아주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구두를 신고 나서 양발을 탕탕 굴렀다. 뭉쳐 있던 바짓단이 구두 뒤축을 덮고 보기 좋게 내려왔다. 작은 키에 7센티를 보탠 그가 거울 앞으로 가 섰다. 그는 만족스런 얼굴로 양복 섶을 정리하고 나서 휘파람을 불며 가게를 나갔다.
나도 그를 따라 컨테이너를 나왔다. 단골 사무실에 들러 구두를 수거해올 시간이었다. 붕어빵장수가 활짝 웃으며 아는 체를 해왔다. 그는 노릇하게 익은 붕어빵을 보기 좋게 줄 세우고 있었다. 붕어빵도 모양새가 말짱하고 빛깔 좋은 잘생긴 놈이 앞줄을 차지했다. 몸통이 일그러지고 까맣게 그을린 놈은 맨 뒤에 숨겨졌다. 아마도 그것들은 누군가에게 덤으로 주어질 것이다.
나는 힘겹게 계단을 올라 부동산 컨설팅 사무실로 올라갔다. 어찌된 건지 문이 잠겨 있다. 나는 서늘한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간밤에 본 여자는 여기까지 따라와 머릿속에서 오락거렸다. 여자의 시퍼런 발등이 눈앞으로 스쳤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녀의 두 다리는 반듯하고 건강해보였다. 호흡이 진정되자 어수선한 통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닫힌 철문 틈에 붉은 도장이 찍힌 우편물이 꽂혀 있다. 계단 입구에 내놓은 박스 안에는 서류뭉치가 수북했다. 서류뭉치 사이로 빳빳한 금색 명함들이 흩어져 있다. 최 상무 책상 명함꽂이에 꽂혀 있던 것들이다. 최 상무가 있어 보이는 사장님들과 사모님들에게 정중하게 명함을 건네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나는 흩어진 명함 몇 장을 간추려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무스 냄새, 명함에서 최 상무가 늘 풍기던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입구에 놓인 화분은 나만큼이나 풀이 죽었다. 나는 층계참을 내려서려다 기우뚱거리는 몸을 끌고 창틀로 다가가 도로 쪽으로 고개를 내놓았다. 신호에 걸린 차들이 일제히 멈춰서 있는 횡단보도 중앙에 서 있는 여자는 어젯밤에 보았던 그 여자가 분명했다. 녹색등이 바삐 깜빡거렸고 사람들이 황급히 뛰어 인도로 올라서고 있었다.
여자는 어제 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차들이 일제히 클랙슨을 울려댔다. 도로 중앙에 서 있던 여자는 길을 건너지 못하고 허둥지둥 저쪽 인도로 되돌아갔다. 나는 계단을 굴러서라도 여자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몸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태고, 혹시 굼뜬 걸음으로 삼층이나 되는 층계를 내려가는 동안 여자가 기다려준대도 나는 여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여자가 어서 모습을 감추길 기다렸다. 통로를 서성거리던 나는 한참 후에야 고무나무 화분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부동산 컨설팅 사무실이 문을 닫으면 내 수입은 당장 하루에 만 원이 줄 터다. 요즘은 한 번 빈 사무실엔 좀처럼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학원만 모여 있던 사층 건물이 모조리 빈 지 벌써 여러 달째다.
컨테이너 안에 화분을 들여놓고 나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고 주입구에 동전을 세 개 넣었다.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적힌 순서대로 천천히 숫자를 눌렀다. 마지막 7자가 남는다. 나는 7자 위에 닿은 검지를 잠시 숫자에서 떼어놓았다.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하지, 최 상무님 지난달에 구두 닦은 돈 안 주셨는데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정작 생각나는 건 그 말뿐이다. 7자를 마저 눌렀다. 입안으로 고이는 쓴 침을 삼키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안내음이 들려왔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사정으로 인하여 …. 나는 얼른 수화기를 내렸다 다시 들었다. 명함에 적힌 숫자를 아까보다 더 또박또박 눌렀다. 이상하게도 내가 누른 숫자는 늘 한 자리가 잘 못 눌린다는 것을 상기하며 신중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똑같은 안내음이 반복되었다. 나는 거듭거듭 숫자를 눌렀다. 반복되어 들려오는 소리들이 점점 아득해졌다.
나는 사라져버린 번호를 좇는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하늘로 치솟아 개나 고양이, 사자와 코끼리 같은 형상을 하고 서 있는 길을 죽 따라간다. 한참 후 빨랫줄에 갈색 앙고라 담요를 널어놓은 집이 보인다. 나는 골목에 서서 집안을 기웃거린다. 안에서 발가벗은 소년이 쪼르르 뛰쳐나온다. 뒤쫓아 나온 아이들이 소년의 등짝을 마구 때린다. 소년이 이리저리 몸을 피하자 아이들은 소년을 붙들고 깡마른 몸뚱이를 닥치는 대로 꼬집는다. 소년의 비명이 터질 때마다 야윈 팔뚝과 등에 불긋불긋 자국이 남는다. 축축한 담요에서는 물씬물씬 지린내가 난다. 병신, 아이들이 합창하듯 외치고 안으로 사라진 후에도 소년은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결국 소년은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내달린다. 소년은 길가에 있는 컨테이너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안에서 자장면 냄새가 난다. 소년은 컨테이너 안을 기웃거린다. 그때 내게 자장면을 먹여주고 구두 닦는 일을 가르쳐주었던 상만이 아저씨는 한 평반짜리 컨테이너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에게 맞아서 죽었다. 나는 오랫동안 수화기를 붙든 채 전화부스 안에 서 있었다.
- 비오는 날은 안에 들어와 자라는데도 고집은.
비좁은 방안으로 들어서며 전 씨가 말했다. 전 씨의 덩치에 떠밀려 나는 기우뚱거리고 서 있던 몸을 간신히 침대에 걸쳐 놓았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 두어 군데 새로 못질을 해야겠군.
전 씨가 몸을 구부려 침대 밑을 살폈다. 나는 그의 육중한 몸집을 내려다보았다. 빈약한 내 다리에 올려놓은 그의 팔뚝은 육십 대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람했다.
나는 컨테이너가 딸린 건물의 주인이자, 내가 지내는 컨테이너를 마련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나의 왜소한 체구에 맞춰 나무로 간이침대를 짜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 구두센터를 열던 날, 그는 나를 데리고 근처 부동산 컨설팅 사무실과 모자보건센터 소장을 직접 찾아가 인사를 시켰다. 그때 그는 사람들에게 불쌍한 사람이니 많이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했다. 그 덕에 그들은 모두 나의 단골이 되었다. 그가 운영하는 스포츠용품점은 장사가 잘 안 되는 편이다. 그는 한가한 가게에서 아령을 들고 어깨근육 운동을 하거나 러닝머신 위에서 분침을 세는 것이 일과였다. 그는 유독 근육에 신경을 썼다. 근육 발달에 좋다는 음식들도 낱낱이 꿰고 있었다.
- 요즘 왜 이렇게 피곤하지.
전 씨가 눈자위를 쓱쓱 문지르며 길게 하품을 했다. 그와의 인연은 생전처음 보는 남자의 부탁을 받고 그의 가게에 심부름을 가서였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길바닥에 있는 구두박스를 일일이 찾아다니던 때였다. 나는 지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서른 살 정도의 처음 보는 청년이 내게로 다가왔다. 잘생기고 똑똑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혹시 저 아래 사거리 쪽에 있는 스포츠용품점을 아는지 물었다. 청년은 정중했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몇 마디 더 말을 시키고 나서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스포츠용품점 사장에게 이걸 건네주기만 하면 돼요. 꼭 사장 손에 전해줘야 해요. 청년은 거듭 당부하고 나서 심부름 값이라며 이만 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가 맡긴 상자는 부피에 비해 가벼웠다. 나는 나와 다른 건장한 내 또래 청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전 씨는 상자를 건네받은 자리에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상자 안에는 낱낱이 포장된 참외씨만 한 타원형의 알약들이 들어 있었다. 심부름을 갔던 시간은 점심참이었다. 그날 전 씨는 근처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밥과 야채 쌈을 곁들인 제육볶음을 사줬다. 밥을 먹는 동안 내게 이것저것 묻던 그는 가족이 없다는 말에 가장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식사가 끝나자 내게 가게 일을 좀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뜬금없었지만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취직을 했다는 뿌듯한 마음에 오른쪽 대퇴부가 뻐근하도록 가게 곳곳을 쓸고 닦았다. 한 달이 지나자, 그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가게청소와 어쩌다 드는 손님에게 압박붕대나 줄넘기 같은 물건들을 파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가 내게 과한 친절을 베푸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심각한 언어장애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걸음도 똑바로 걷지 못하는 내가 사람 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힘을 길러준다는, 생김새가 기이한 물건들을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아내가 나를 군식구 취급하며 대놓고 눈치를 주는 것도 당연했다. 주변에서는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사람을 거두어준다고 그를 칭찬했다. 사람들은 그가 베푸는 것들에 대한 대가를 내게 얼마나 혹독하게 받아내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러닝머신 분침을 통해 자신의 근력 상태를 확인하듯 나를 통해서도 자신을 확인하려 들었다. 그가 균형 틀어진 내 몸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은 그의 몸이 내게 가할 수 있는 통증의 강도였다. 아프냐? 얼마나? 그가 내게 하는 말들은 거의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의 살림집은 삼 층에 따로 있었지만, 그는 거의 24시간을 가게에서 지냈다. 그의 부인은 가게에 내려오는 일이 드물었다. 용건이 생기면 가게와 안집으로 통하는 인터폰을 이용했다. 가끔씩 그의 자식들이 가게로 무언가를 의논하러 들렀는데, 그의 며느리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진열된 운동기구들이랑 그와 내가 함께 쓰는 어두운 방을 염탐하듯 둘러보곤 했다. 그녀는 목소리가 조용한 편인데, 약간 느려 더욱 차분하게 들리는 말투로 시아버지인 그에게 할 말을 따박따박 다 하는 야무진 성격이었다. 굳이 이 가게에 저 사람이 필요해요, 아버님? 그녀가 나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약간 높여 말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그에게 다소곳한 자세로 인사를 하고 돌아갔던 날 나는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전 씨는 나를 보내지 않았다. 그가 어디선가 사들여 스포츠용품점 귀퉁이에 이어붙인 컨테이너는 누군가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있는 중고였다. 군데군데 칠이 까이고 검은 녹이 슬어 있는 사각박스는 나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람을 사서 컨테이너에 새로 페인트칠을 했다. 흠집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는 컨테이너의 실내를 직접 꾸몄다. 칸막이를 하여 가게와 방을 만들고 관 같은 목침대를 짜 비좁은 방 귀퉁이에 놓았다. 침대를 놓은 맞은편에 녹슨 수도꼭지와 싱크대가 있는 걸로 보아 전에 쓰던 사람이 주방으로 사용한듯했다. 창문이 없는 컨테이너 안은 지하처럼 어둡고 습했다. 빛이라곤 두꺼운 철문 틈새로 드는 조각볕이 전부였다. 문은 딱 출입문 하나뿐이다. 원래 있던 출입문과 마주본 창문을 그가 칸막이를 하는 작업 중에 폐쇄했다. 단단히 못질을 한 창문이 갑갑했지만 나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구두센터 주인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 점심 먹어야지.
전 씨가 밖으로 나갔다. 그는 그의 아내가 외출을 했을 때만 나랑 밥을 먹었다. 그것도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고도 점심약속이 잡히지 않을 때만 나를 찾았다.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를 따라 분식집으로 갔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만 원짜리 네 장과 오천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열다섯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 달에 세 번으로 나누어 내는 밥값이다. 돈을 챙긴 아줌마가 계란프라이 세 개를 서비스라며 내다 주었다. 나는 그중 한 개를 식당 밖에서 얼쩡거리는 유기견에게 던져주었다.
- 사람이 먹는 걸 함부로 짐승에게 주는 거 아니다.
전 씨가 못마땅한 듯 나를 나무랐다.
먹을 거라면 뭐가 됐건 환장을 하는 개의 허리통은 옆으로 툭 불거져 있었다. 개는 입안에서 막 뱉어놓은 수박씨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와 전 씨를 올려다보더니 잽싸게 먹을 것을 물고 달아났다.
나는 순두부국에 밥을 절반만 말고 나머지를 전 씨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는 내가 남긴 밥을 국그릇에 마저 부었다.
- 몸이 왜 이리 뻐근하지, 잠깐 가게 문을 닫자.
나는 벌건 입술을 핥고 있는 전 씨의 긴 혓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수, 수선 맡긴 구, 구두를 찾으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 하는 수 없지, 바쁜 일부터 해치워라. 사람이 태어나서 밥을 먹고 사는 게 그리 만만치는 않은 일이다.
전 씨는 군말이 없었다. 나는 컨테이너로 돌아와 재료상자에서 10센티 구두 굽을 찾다가 문득 공중전화부스 쪽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그 여자는 펑퍼짐한 원피스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일제히 여자에게로 쏠리자, 광대뼈 언저리까지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여자의 푸석한 얼굴이 드러났다. 여자는 사람인지 유령인지 헛갈릴 정도로 움직임이 적었다. 나는 여자를 엿보던 문틈에 눈 대신 귀를 가져다 댔다. 괜찮을 거리고 했잖아…거긴 따뜻하니. 바람결에 설핏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자는 수화기를 든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웅크리고 앉은 채 밤을 샐 듯했다. 처음 본 얼굴이었다. 차림새로 보아서는 이 근처 어디에 사는 것 같았다. 가방을 들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슬리퍼 안에 퐁 빠져 있는 듯한 발은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늘어진 구두들을 정리하고 어질러진 구두약 통들을 한쪽으로 치운 다음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여자는 가고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부스로 갔다. 수화기를 들고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내음이 끝난 후까지 전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졌고 눈빛에 초점이 흐렸고 시퍼런 발등을 드러낸 맨발벗은 여자는 어디에 전화를 걸려고 했던 걸까. 나는 컨테이너로 들어와 누군가 맡겨놓고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고 있는 여자구두를 꺼냈다. 한쪽 구두 축이 움푹 눌려 있었다. 나는 헝겊 쪼가리를 뭉쳐 구두 속에 집어넣었다. 누군가 맡긴 지 이 년을 넘기도록 찾아가지 않고 있는 구두였다. 유일하게 구두 주인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구두를 찾아가지 않는 걸 보면 구두 주인은 죽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하늘색 구두에 광을 내기 시작했다. 구두는 전등처럼 빛났다. 실내가 환해졌다.
바퀴를 단 컨테이너는 넓은 도로를 벗어나 어느 새 해변도로로 접어든다. 수평선 끝으로 몰린 노을이 온통 덩어리져 있다. 왼쪽으론 조각조각 계단식 밭이 있는 야산이 보인다. 한참을 달려 담이 없는 집 몇 채가 모여 있는 마을로 들어선다. 해변으로 이어진 소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소나무 사이로는 반질반질한 황토흙 길이 나 있다. 길에서는 먼지 한 점 일지 않는다.
전 씨는 목침대 여러 곳에 못질을 해놓고 거듭 침대를 흔들어보았다. 그러고도 못미더운 듯 육중한 엉덩이를 침대 위에 텅텅 부려보고 있었다.
- 됐다, 이젠 잠자리가 훨씬 편안할 거다.
그는 내가 그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가 바지를 벗고 침대 위로 누웠다. 그는 옷을 벗을 때면 늘 바지를 먼저 벗는다. 나는 담요 속으로 기어 들어가 불편한 몸을 꼼지락거려 옷을 벗는다. 지렁이처럼 굴곡이 없는 내 몸은 신체에 두 개 있는 모든 것의 균형이 맞지 않다. 눈, 콧구멍, 귀, 유방, 팔, 특히 현저하게 가늘고 굵고 길고 짧은 게 드러나는 두 다리. 그는 보통사람들과 다른 기이한 내 몸을 관찰하듯 들여다본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수치심 때문에 두 눈을 감는다. 40킬로 밖에 안 되는 내 몸을 앞뒤로 되작거리던 그가 내 항문 언저리에 차가운 젤을 바르고 성기를 밀어 넣으며 아프냐고 묻는다. 그의 성기는 흐물흐물한 편이다. 여자 손가락처럼 매끈하고 가는 내 성기가 번데기처럼 오그라든다. 내가 견디는 동안 그는 숨을 헉헉거리며 또 다시 아프냐고 묻는다. 그의 뼈와 근육이 단단해지는 순간이다. 아프다고 대답하자 그가 화를 낸다. 그러니까 얼마나 아프냐고 새끼야. 나는 속으로만 대답한다. 날카로운 송곳 끝이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 같다고. 그리고 죽은 듯이 엎드려 밖의 소리들을 긁어모은다. 사나운 힐이 보도블록을 때리는 소리, 그의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찾는 소리, 미친 듯 질주하며 울려대는 자동차들의 클랙슨 소리. 소리들의 틈새로 다급하게 공중전화 버튼을 눌러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 아파 뒤지겠냐?
- 그래, 아파 뒤지겠다. 개새끼야.
나는 몸을 뒤틀며 그를 힘껏 밀쳐냈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그가 눈을 부라렸다.
- 이 새끼가 미쳤나.
- 이, 이제 그만해요. 여, 여길 떠날 거예요.
- 니가 갈 데가 어딨어, 새끼야. 너는 사내새끼가 아니야. 병신아. 슨 적 있냐? 슨 적 있냐고?
그가 쪼그라든 내 성기를 툭툭 쳤다.
- 어젯밤에도 섰어요.
- 세워 봐, 새끼야. 세워보라고 병신아.
그가 헛웃음을 쳤다.
나는 문 쪽으로 돌아서서 미친 듯이 성기를 흔들어댔다. 어디까지나 남자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눈에 초점이 없는 여자를 생각했다. 얇은 원피스를 떠올렸다. 시퍼런 발등을 떠올렸다. 그의 며느리를 떠올리고 구두 굽을 높여달라고 가게에 찾아왔던 예쁜 여자도 떠올렸다. 몸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거렸다. 그것은 어젯밤과는 달리 목울대를 차고 올라와 눈으로 솟구쳤다.
- 시, 신발을 찾으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 꼴에 사내새끼라고.
전 씨가 성급히 컨테이너를 나갔다.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몸을 씻기 시작했다. 거울에 몸을 비춰가며 흠집투성이의 구두에 광을 내듯 구석구석을 박박 문질렀다. 두 다리를 거울에 바짝 대보았다.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고 서자 다리의 굵기와 길이가 같아 보이는 듯도 하다. 오랫동안 샤워를 한 나는 진열대에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구두들을 반듯하게 정리했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가져온 고무나무 잎을 마른걸레로 닦고 넓적한 잎이 싱그러워 보이게 잔뜩 물을 부어줬다. 담요도 툴툴 털어 반듯하게 깔아두었다. 나는 분명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리 부르셨습니까. 보도블록을 뛰어다니던 남자의 걸음소리가 오늘따라 활기차게 들렸다. 밤이 깊어갔다. 누군가 분식집 담벼락에 웩웩 음식물을 게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컨테이너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컨테이너 벽에 기대고 선 채 오랫동안 오줌을 눴다. 분식집 건너 ‘성인용품’이라고 새긴 도마만한 간판 아래 서 있던 남자는 도둑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쪽문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바닥에 웅크리고 누웠다. 뜨막하게 자동차들이 지나다녔다. 잠들기 딱 좋은 밤이다. 잠결에 자동차 소리를 따라가면 가끔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 자동차들은 잠결에만 나를 이리저리 데려간다. 그래서 저 소리를 들어야만 잠이 오는지도 모른다. 운전면허도 없는 내가 반듯하게 앉아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처럼 신나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느 땐 앞차를 따라가고 때로는 컨테이너가 앞장선다. 구두 굽을 붙여 만든 액셀러레이터만 밟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번쩍번쩍 광을 내놓은 구두들이 오색으로 등을 켜 실내가 환해지면 머리맡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면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자꾸 오한이 들었다. 나는 얼굴까지 뒤집어썼던 담요를 걷어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무렵 단골이 맡기고 간 밤색 구두를 꺼내들었다. 천근만근 가라앉는 몸을 움직여 침대 아래 처박아 두었던 약품 통들을 꺼냈다. 약품들은 오래전에 쓰다 두었던 거라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약품은 제가 지닌 독성 때문에 변질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구두를 염색할 약품을 배합했다. 배합한 약품을 천천히 구두에 발라나갔다. 약품들은 독한 냄새를 내뿜었다. 화공약품이 내 몸 구석구석으로 스미는 듯 뼈와 살과 심장이 따끔거렸다. 얼룩은 강했다. 자국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다섯 번씩이나 배합한 약품을 덧바른 뒤에야 가까스로 얼룩이 가려졌다. 얼룩이 사리진 순간 나는 혼절하듯 바닥으로 쓰러졌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제 여자가 맡기고 간 구두를 꺼내 굽을 떼어냈다. 밋밋해진 구두에 10센티 굽을 붙이자, 구두는 다른 신발이 되었다. 나는 내 두 다리를 떼어내고 균형미 넘치는 건강한 다리로 붙여 넣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여자를 끝까지 쫓아가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건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얘기나 좀 해보라고 캐물을 수 있었을 테다. 나는 자꾸 컨테이너 출입문 쪽으로 눈을 가져갔다. 여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주억거리며 고개를 쓱 들이밀 것 같았다. 그리고 시퍼런 발등을 가게 안으로 머뭇머뭇 들여놓을 것만 같았다.
달려왔던 황토흙 길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바다에서 내 머리통만한 게들이 바글바글 기어 나온다. 손에 쥔 핸들이 갑자기 뻑뻑해지며 말을 듣지 않는다. 숲에는 맨발 벗은 여자가 서 있다. 초점이 흐린 여자의 눈빛은 따뜻하다. 내 흉한 몰골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민망해하지 않을 것 같다. 수십 마리의 게들이 일제히 여자에게로 몰려간다. 여자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 밖으로 뛰쳐나가야 하는데, 철체로 된 문은 누군가 밖에서 단단히 못질을 한 듯 열리지 않는다. 나는 힘껏 문을 걷어찬다. 통증으로 눈에서 불꽃이 인다. 순간 내 팔목이 불뚝거린다. 수년 동안 구두에 광을 냈던 오른쪽 팔목에서 나는 푸른 정맥들을 발견한다. 지도 속 산맥처럼 시퍼런 정맥들이 꿈틀거린다. 나는 주먹에 힘을 모아 문을 박살낸다.
출입문이 열렸다. 전 씨였다.
- 시, 신발을 찾아갈 사람이 있어요.
나는 주인 없는 구두를 높이 치켜들었다.
- 잠깐이면 된다.
전 씨가 꾸역꾸역 안으로 들어섰다.
- 아파요, 아프다고요. 아파서 돌아버릴 것 같다고요.
전 씨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진열장에 가지런히 구두를 세워놓고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차도에서 건너온 소음이 기우뚱 컨테이너를 흔들었다. 트럭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사위가 잠잠해지고도 꽤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누워 간절하게 밖의 기척을 기다렸다. 조용했다. 유기견이 연거푸 꼬리를 흔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온 후 조용하고 느린 발걸음 소리가 머리맡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문틈으로 밖을 살폈다. 그 여자였다.
여자는 컨테이너 옆에 우두커니 서 있다. 오늘은 전화를 걸러 나온 것도 아닌 듯하다. 컨테이너 쪽으로 바싹 붙어 있는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헐렁한 원피스의 해바라기 꽃문양 때문에 그 여자란 걸 알 수 있었다. 사거리 쪽에서 트럭 한 대가 달려온다. 여자가 차도로 내려선다. 트럭이 멈춰서는 소리에 이어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 새벽부터 재수 없게. 여자가 휘청거리며 인도로 올라선다. 트럭기사가 목안에서 끌어올린 가래침이 여자 앞으로 떨어진 순간, 트럭이 둔중한 소리를 남겨놓고 자리를 뜬다. 트럭이 일으키고 간 바람에 원피스 자락이 여자의 몸에 착 달라붙는다. 여자의 배는 만삭이다. 임산부가 잠옷 같은 원피스차림으로 나다니기엔 새벽 공기가 차다. 구겨진 담요를 목침대 위에 가지런히 펴놓고 나서 나는 다시 밖을 살폈다. 여자가 막 전화부스로 들어서고 있다. 이상하게도 여자는 걸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여자는 수화기를 든 채 말없이 서 있다. 바람결에 언뜻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나는 몇 번이나 담요를 폈다 접었다 펄럭거리다가 콘센트에 전기요를 꽂았다. 전기요가 금방 달아오른다. 나는 여자가 입고 있는 얇은 원피스와 따끈하게 달아오르는 전기요를 번갈아가며 살폈다. 여자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다. 전기요는 차츰 뜨겁게 달아오르고 철체의 얇은 벽은 점점 차가워졌다. 하마터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무슨 말인가 중얼거렸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자가 전화부스를 벗어나자, 그때까지 잠잠하던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여자의 얇은 원피스를 마구 흩날렸다. 나는 지난밤 정성껏 손질해둔 주인 없는 구두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불편한 다리에 쥐가 내린 탓에 두 번이나 넘어졌다.
- 저, 저기요.
나는 황급히 여자를 불러 세웠다. 여자가 흠칫 나를 바라봤다.
- 나, 날이 추운데.
여자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태연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내 말을 듣긴 한 걸까. 나는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여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천을 따라 걷던 여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길가에 앉아 오줌을 눴다. 달이 쪼그려 앉은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또렷이 비추고 들었다. 여자는 모자보건세터를 지나 큰길을 건너갔다.
나는 여자를 따라 걸었다. 계절이 바뀔 모양이었다. 몸에서 자꾸 더운 김이 솟았다.
[당선소감]
스터디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란다 창 커튼을 걷어놓은 채였어요. 거세게 부는 바람으로 온갖 사물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설을 공부하려고 문학회를 처음 찾던 날도 날씨가 꼭 오늘 같았습니다.
“오늘 날씨 참 소설적이죠?”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소설은 정말 짓궂은 날씨 같아요. 해와 구름과 빗방울이 눈앞을 흐려놓기고 하고 때론 부시게도 합니다.
겨우 70매 정도의 단편을 쓰는 동안에도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가 번개처럼 번쩍거리기도 하니까요. 쓰고 있는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까, 늘 의심스러웠습니다.
응모한 사실조차 깜빡하고 있었는데, 당선소식을 접했다는 당선자들의 소감을 읽을 때면 믿기지 않았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렸던 날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말들을 이제야 믿게 되네요. 정말 저도 깜빡, 하고 있었거든요.
당선소식을 듣고 나서 읽고 있던 책을 두어 문장 소리 내어 읽다보니 비로소 실감이 나며 목이 젖어왔습니다. 이제 소설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얻었다는 것이 너무 기쁩니다.
광주대에서 소설을 가르치시는 이화경 교수님, 이기호 교수님 그리고 신덕룡 교수님,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생오지에 계시는 문순태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저에게 넉넉한 그늘이 되어주시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멀리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만세형 고마워요. 꿍꿍이 문우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미흡한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1966년 나주 출생
▲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광주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심사평] 소설 자체의 힘과 필연성 느껴져
예심을 통과해온 10여 편의 작품 중 ‘박쥐’ ‘여기 안나는 없다’ ‘컨테이너’ ‘문신’ 네 작품을 관심 있게 읽었다. ‘박쥐’의 경우 박쥐라는 강렬한 메타포에 비해 이야기 구조가 허술했고 ‘여기 안나는 없다’는 구조는 탄탄하지만 분위기만 만들어갈 뿐 끝까지 결정적인 사건이랄 게 담기지 않아 허전했다. 소설적 기본기가 되어 있으면서도 기존 소설의 한 줄기를 잘라내며 낯설게 접목해 들어오는 신선한 작품을 기대했으나 대부분의 작품이 소설의 방법적인 면에 대해서는 안일했다.
‘컨테이너’와 ‘문신’을 두고 고민이 좀 길었다. ‘컨테이너’는 세상의 커튼을 걷으면 보이게 되는 힘의 비극적인 균형을 불우함에 대한 연민 없이, 의미 부여도 없이 있는 그대로 하드보일드하게 그려냈다. 추악하고 어둡고 아픈 삶의 이야기지만 소설 자체의 힘과 필연성으로 인해 한순간 풍경의 아름다움으로 전도되면서 당혹감을 준다.
‘문신’은 타인의 폭력으로 인한 수동적인 상처 위에 적극적인 상처를 스스로 새겨 넣어 삶의 무늬로 관리해가는 치유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다. 담담하고 잔잔한 문체로 집중력 있게 주제를 쫓아 의미에 도달했고 소설적 요건도 충실하게 갖춘 작품이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구조가 전형적이고 계산된 작위성이 드러나며 결말이 허약하다.
‘컨테이너’의 경우도 장애자가 의지하는 사람에게 교환적인 성 착취를 당하는 소설의 구조가 낯익고 결말이 허황하게 열려있는 듯해 망설였다. 그러나 결말이 불안정하다기 보다는 첫 문장과 조응하며 다음 연작을 향해 흘러가는 느낌이다. 이 탄탄한 문체와 거리의 낮은 곳을 조망하는 중립적인 시선이 세상의 연약하고 사소한 개연성들을 어떤 강렬한 그림으로 그려 우리 삶에 선사할 지 궁금해진다.
▲본명 안애금 경남 함안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중편소설부문‘사막의 달’로 등단
▲2007년 제 31회 이상 문학상 수상 ‘천사는 여기 머문다’
▲경남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