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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Anton Schnack. 1892~ 1973
[1] 젊은 날의 전설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全文)
울고 있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쒸어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휠덜린(1770~1843). 독일 서정시인)의 시. 아이헨도르프(1788~1857. 독일 낭만과 민요시인)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이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날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많은 날을 도회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정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척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루트 함순’ (1859 ~1952. 노르웨이 작가. 1920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난, 방랑, 노동이 그의 작품의 주제다)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양 눈송이 -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 내가 사랑하는 소음, 음향, 음성들 (全文)
아득히 들려오는 장닭의 울음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졸음과 납덩어리 같은 나른함이 몰려오는 뜨거운 여름 한낮이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지상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지는 그때, 그 우렁찬 계명이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다.
9월의 어느 날 밤, 투명한 정적 속으로 한 알의 사과가 툭 떨어지는 소리는 쾌적하게 울려온다. 이튿날 아침 풀밭에서 그 열매를 찾다가 눈에 띄었을 때의 기쁨이란!
아침나절 길 다란 낫을 가는 망치 소리는 잠을 깨우는 울림이다. 공기에서는 취할 듯이 짙은 향내가 난다. 이제부터 뜨겁고 건조한 하루가 되리라. 이글이글 열을 지은 채원의 풀줄기가 햇볕 속에서 찌듯이 익어 가리라.
화려한 농촌의 소음으로는 길다란 장대에 달린 나무 갈퀴로 마른 풀을 뒤적거릴 때 들려오는 메마른 바삭거림이 있다. 그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어느덧 경건한 기도 소리 들리는 밤을 생각하게 된다. 초원 사이로 열린 오솔길을, 그리고 마주 걸어오는 자네트의 어깨 위로 드리워진 새하얀 수건을 생각하게 된다.
어느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펜촉의 사랑스러운 끄적임,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구절 다음에 한동안 막혀버린다.
마을 대장간의 망치 소리를 나는 즐겨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웃에서 들려와서는 안 된다. 얼마간 바람결을 타고 불어와 조화된 소리여야 한다. 그 금속성은 내 어린 가슴을 한껏 설레게 했었다. 프랑켄의 장터에 자리 잡은 대장간에서는 섬뜩한 느낌의 풀무가 훨훨 타오르는 석탄 불길 속에서 용해되고 있었고. 시커먼 칠을 묻힌 대장장이가 멀찌감치 서서 쇠망치로 달아오른 쇳덩이를 때리면, 불똥의 빛줄기가 꿈처럼 아름답게 곡선을 그으며 어두운 대장간 창고 안으로 비산하는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분수의 낙수 소리. 중세풍의 슈바벤 할시의 어느 주막 앞에는 분수가 하나 서 있어 온 달밤을 지새우도록 전설과 동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폭풍이 몰아칠 때 소나무 수관을 획획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 바람은 벽난로 안에서도 노래를 한다. 이 두 개의 소리에 나는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 있다. 바람 부는 날 고성이나 농장의 뜰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도깨비라도 나올 듯 매우 기묘한 것이다.
거울처럼 잔잔하게 잠든 호면에서 보트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보라. 끌어올린 노에서는 이따금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구원의 물방울. 알아보기도 힘든 자디잔 물체와 들릴 듯 말 듯 한 소음. 그것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스러져가는 것이다.
바다의 소음, 칠흑 같은 밤, 그것이 그윽하게 성난 듯이 백사장의 조약돌이나 해변의 암석에 탄식하듯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리를 야릇한 그리움과 설렘 속에 몰아 넣는다ㅣ. 그것은 속세의 음성이 아니라 해신의 음성이며, 수정의 유혹하는 호소이며, 인어의 노래이다.
산골짜기에서 와르르 꽝꽝 바위 구르는 소리, 자 푸른 절벽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무시무시하게 쿵쾅거리는 굉음! 다시 한 번 이 죽음의 음성은 바로 곁에까지 왔다가 다시금 스쳐 지나가버린다. 그러고 나면 얼마나 깊고 탐욕스럽게 가슴 깊숙이까지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었던가.
잔차바퀴의 덜컹거리는 운율을 나는 더없이 사랑한다. 또 그르릉거리는 뱃고동과 추진기 주변을 소용돌이치는 물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닻의 쇠사슬이 쩔렁거리는 소리, 배를 정박시키는 말뚝의 삐걱대는 소리, 투박한 시골의 우편마차 위에서 철썩 내리치는 채찍의 울림, 비행기 모터의 성급한 붕붕거림. 이것은 귀가 겪는 순수한 음향의 모험들이다. 고도의 아치 성문을 덜그럭덜그럭 지나는 말발굽 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방랑하는 tlo인 아이헨도르프를 생각하고, 마리안네 폰 빌레머(장년기 괴테의 애인)의 여행복에서 풍기는 라벤더의 방향을 생각하게 된다.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소리와 그 위에 얹힌 물주전자의 노랫소리는 나를 환상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부엌, 파란 그릇들로 가득 찬 할머니의 부엌, 곡식과 과일냄새 풍기는 농촌의 부엌에서 들려오는 자장가와 같은 소음인 것이다.
헤센과 프랑켄의 작은 마을들, 고향에서의 잊을 수 없이 화려한 밤의 소음들이 잇다. 밀가루 덮인 농촌의 물방앗간 방파제 위로 단조로운 파도를 치면서 끊임없이 좔좔 흐르는 시냇물 소리. 버릇에 젖은 어느 주정뱅이가 포도 위를 비틀비틀 비척거리고 걸어가며 끊임없이 끄륵대는 트림 소리. 돌풍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이의 손마디인가, 덧문을 쾅쾅 두들겨대는 소리. 문간 구석에서 새어나오는 어느 처녀와 총각의 입맞춤 소리. 그리고 교회 탑의 시계가 뚝딱거릴 때마다 녹이 슨 듯 한숨을 쉬고 있었다.
몽롱한 잠결에, 가벼운 거품 같은 아침의 꿈속에서 듣기 좋은 정다운 멜로디에는 민첩한, 가느다란 또는 푸닥거리는 온갖 종류의 새 소리가 있다. 처마 끝을 똑똑 긁어대는 박새와 날쌘 발톱 소리. 세련된 타이프라이터의 끊임없는 두들김처럼 빨간 부리의 때까치가 성난 듯이 쪼아대는 소리. 그리고 후루룩 날아가는 제비의 지저귐.
풀베기를 끝낸 초원 위를 구름처럼 떼 지어 나르는 뇌명 같은 찌르레기의 날개 치는 소리도 나는 듣기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벌써 여름이 갔구나. 철새들이 먼 여행을 준비하는구나, 또 어느덧 한 해가 흘러가는구나 ―하는 가슴속의속의 일말의 울적함을 떨칠 수가 없다.
눈이 일으키는 소음도 내가 사랑하는 소리에 속한다. 섬세하고 알알한 싸라기 내리는 소리에서부터 봄철 높새바람에 무너져 내리는 눈사태의 우레 소리까지. 마을 우편배달부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걸어오는 발소리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 반갑고 굿은 소식, 아득히 먼 세계가 이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기차역의 덜커덕대는 소리, 도시의 왁자한 소음, 해변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뜨거운 그리움이 사박거리며 함께 들려오는 것이다. 미움과 사랑, 환희,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죽음의 발소리까지.
썰매를 끄는 말방울 소리, 그것 역시 신비스럽다. 들리는가 하면 어느덧 지나쳐버린다. 그렇게 불현듯 스쳐 불어가는 것이면서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소리이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연주할 때, 그것은 얼마나 묘한 일인가! 꽥꽥 긁어대며 활주 하는 불협화음 뒤에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의 장려하고 거창한 음의 바다가 높이 펼쳐지는 것이다.
뚝 ~~뚝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지난날 수업 시간에 들리던 납같이 무거운 소음. 교실에서는 선생님의 피로에 지친 울먹한 음성이 들려왔다. “Nemo ante mortem beatus" - 어느 누구도 죽음에 직면해서 행복을 구가할 수는 없다. 소년은 노교수의 육중한 지혜에는 아랑곳없이 창 앞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비스듬히 걸려 있는 전선줄 위로 수백 개의 물방울이 나란히 매달려 있어서, 일순간 가만히 방울 지어 있다가는 다음 방울에 밀려 곧 부서져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뚝 ~~~뚝~~~ 그것은 대자연의 언어이며, 구름의, 하늘의, 무한한 세계의 언어이다. 또한 그것은 바다의 인사이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넘쳐흐르는 샘물의, 돌고드름 열린 종유동으로부터의 인사이다. 소곤거리는 분수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인사이며, 나이아가라와 라인 강의 뇌성이며, 아득한 해안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이다 - 이렇듯 엄청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야성과 위대함, 충만함과 풍요함이 이 단 한 방울의 물방울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
봄날 저녁 떼지어 들끓는 풍뎅이의 붕붕거림. 이제 곧 붉은 만월이 떠오르리라. 거리는 어느덧 시골 처녀들의 다감한, 조금은 구슬픈 노랫소리로 가득 찬다. 하모니카의 부드러운 선율이라도 끼어든다면, 그곳에야말로 깊어가는 밤의 알 수 없는 고뇌와 감미로움이 자리 잡는 것이다.
아코디언 키는 소리.. 그 소리를 못 들어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깊은 밤, 방 안에서 무엇인가 가구에 딱 부딪히는 소리. 누가 오는 것일까? 아니면 가는 걸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었을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들의 잠자리를 굽어보시는 어머니였을까? 요정이었을까? 겁 많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한 밤중 방 안에서 나는 유령 같은 소리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환희에 겨운 두 연인의 잔 부딪치는 소리, 춘삼월, 습기 찬 풀밭에서 연주하는 개구리의 울음소리 - 그것은 목신(牧神)이 새로이 인생의 불멸을 구가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눈 녹은 물줄기가 홈통으로 흐느낌처럼 후둑후둑 쏟아지는 소리. 물고기가 잔잔한 수면으로 팔딱 뛰어오르는 소리. 어린아이의 종종거리는 발소리. 바람 잠든 날, 전선줄의 윙윙거리는 소리 -이것은 마을 소년들이 먼 곳의 사람들의 욕설처럼 변덕스럽게 생각하는 신비스런 기상의 신호이다.
아, 한 잎 가랑잎이 살그머니 떨어질 때, 가슴 아프도록 지친 소리. 아직도 나무에는 여름이 달려 있는데 어느덧 한 잎이 떨어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의 펄럭거림이나 출발을 앞둔 말의 울음소리는 얼마나 우렁차고 자랑스러운 힘의 소리이며 승리의 소리인가! 대목을 앞둔 장터에서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목쉰 음성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희가 막 사이로 미끄러져 나와 감사와 축복, 자랑과 기쁨의 미소를 띄울 때, 터져 나오는 갈채 소리는 얼마나 감동적인가.
찾아오는 여인의 발소리는 온 심장과 기대를 끌어당긴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정원에 깔린 자갈 위로 그녀의 발소리가 울려온다. 가볍고 날렵하게 시쁜 사쁜 걷는 우아하고 경쾌한 발소리, 축복의 발소리, 후광을 지닌 발걸음, 그것은 걸음 중의 걸음 소리이다.
정적의 소리야말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무위로부터, 근원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듯한 심연의 흐름 -바로 오르간의 음악 소리요, 조개껍질의 소리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 속을 흐르는 피의 음악이다. 심실의 노래이며, 자체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인 것이다.
한껏 부풀어 격동하는 심장을 가진 자는 축복을 받은 자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입맞춤은 심장을 그렇게 고동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질주하며 울리는 격동을 듣고 있다. 이 이중창을 듣는 것보다 더 충만하고 축복받은 일이란 지상에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이다.
● 프랑켄에서 성장하다
어린 시절, 학교가 파한 뒷면 나는 새까맣게 타르 칠이 된 고깃배를 타고는 개기비(휘파람새의 작은 새)의 주먹 크기만 한 둥지를 찾기 위해서 프랑켄의 잘레 강 언저리, 갈대 많은 벌 속을 헤집으며 노를 저어가곤 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모든 것을, 나무와 새와 물고기를 알아보았다. 그 모든 것과 나는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쭉쭉 뻗은 담색의 꽃황새냉이며, 수영의 물기 많은 줄기를, 그리고 개암나무의 갈색 가지와 물버들의 매끈한 가지를 나는 알아보았다. 또한 새까맣고 날쌘 대가리를 가진 놈은 수서에 속한다는 것을 , 혀를 날름거리며 이리저리 흔드는 조그만 대가리를 가진 놈은 강변에서 강변으로 헤엄쳐 이동하는 율모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불붙은 남자들
9월도 저물어가는 어느 날, 잿빛으로 흐른 푸근한 오후였다. 나는 야외의 광장에서 조그만 나무 굴렁쇠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
맑고 별 밝은 겨울밤이면 우리는 혹시나 인형과 불타는 나무들, 마차와 반짝이는 방울을 손에 든 천사의 무리들이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무서운 선물자루를 멘 니콜라우스와 그의 종자 류프리히트가 겨울 밤 지상으로 내려오는 황금 사닥다리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갖고 니콜라우스의 별자리를 올려다보고는 했었다.
●마인 강의 예선(曳船)
나와 이제는 그럭저럭 잊고 지내는 옛 친구들, 날쌔고 대담했던 프랑켄의 친구들에게는 메쿠라고 불리는 소리, 마인강에서 사슬로 배를 끄는 어둡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야말로 가슴 설레게 했던 매혹적인 울림이었다. 그것은 섬뜻한 느낌을 주는 소리였다. 고풍의 창유리를 흔들어대던 소리, 끓어오르는 강 안개를 뚫고 무엇인가 갈구하듯이, 경고하듯이 들려오던 소리. 푸른 잿빛의 어스름 황혼 속에서 음산하게 울려 퍼지던 소리, 이슬 반짝이는 여름 새벽, 어린 마음에 대담한 모험심을 불러일으켜주던 소리, 또한 그것을 바다 여행에 관해, 강의 비밀에 관해, 음악 소리 쿵쾅거리는 항구의 주막에 관해, 화려하게 용솟음치는 위태로운 인생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소리이기도 했었다.
이 소리는 마인 강변에서 꿈처럼 흘려보냈던 어린 시절과 내밀의 부도덕과 반항에 가득 차 있고 터무니없이 용기에 충만해 있던 프랑켄에서의 소년 시절을 계속해서 나와 동반했었다.
●프랑켄의 꽃동산
어린 시절의 강림절에는 얼마나 사랑에 차서 프랑켄의 초원 풍경을 정관했던가. 그곳 언덕에는 너도밤나무 숲이 자작나무와 신선한 낙엽송과 어우러져 있었다. 국도에는 아직도 뽀얀 먼지가 뒤덮여 있었는데, 느닷없이 몰려오는 돌개바람이 먼지를 몰아붙이더니 빨아들이듯 회오리를 치면서, 금속처럼 반짝이는 포플러 나무의 행렬 위로 흩날려버렸었다.
초원의 여기저기에는 사람스럽게 불쑥 자란 여름풀들이 머리를 숙이고 한들거리고 있었다. 어리뒤영벌이 붕붕거리고 나비가 하늘거리는 차가운 풀밭에 누워본 사람만이 이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자칫 부드러운 미풍만 불어와도 고개를 숙이는 풀밭의 파도.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만개했을 때 그 꽃은 흡사 빨간 여우 꼬리처럼 보였고, 초록빛 솜털 외투를 입고 딱딱해져 있는 조그마한 꽃의 표면은 어린이의 손가락에 구릿빛 꽃가루를 묻혀주는 것이었다.
● 실종된 아저씨
● 아버지와의 대화
아버지가 거니시던 산책길은 대체로 돌벗나무 덤불과 불쑥 자란 풀들이 어우러져 있고, 즐거운 멧새의 엉성하게 엉클진 둥지들이 그 밑에 감추어져 있는 두렁길이었다.
● 불세례
라틴어 학교의 가죽 챙이 달린 푸른 모자를 쓰고 아둔하고 서투른 걸음걸이에 상처투성이의 소년이었던 나는, 반드시 훤하게 트인 장터를 거쳐서 다니도록 되어 있었다. 고풍의 정교한 대리석 분수가 치장되어 있는 그 장터에서는 아직도 지나간 장날의 무시무시한 열기가 느껴질 것 같았었다. 이 장터를 지나면 돌 포장이 된 도로가 어느덧 유유히 꼬불꼬불 흐르는 강 쪽으로 굽어들었다. 강 위로는 사암으로 된 낡은 구름다리가 아치를 이루고 있었다.
●허풍선이
서커스! 어릿광대며 사자를 다루는 곡예사와 불을 내뿜는 검둥이 - 아버지를 따라 난생 처음 마인 강변 뷔르츠부르크로 거창하고 왁자한 서커스 구경을 갔을 때, 꿈에나 그리던 동경의 실체들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칠흑처럼 새까만 검둥이는, 일찍이 책에서 해적과 노예 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서 꺼질 줄 모르는 관심과 감탄의 염으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검둥이의 인상은 너무나 폐부를 찌르는, 차라리 섬뜩하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검둥이는 황무지와 원시림 같은 분위기를, 사자의 울부짖음과 숲 사이를 쿵쿵 무섭게 내딛는 코끼리의 씩씩거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알록달록 차려입은 그 검둥이와 더불어 굽이쳐 흐르는 강변 소도시에 등장해서, 중인환시리에 번쩍 뽐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더라면 얼마나 신이 났을까? 매일 아침 책가방을 메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이어 씨가 양귀비를 뿌려 만든 둥근 빨 맛으로 인해 입 안에는 조금 메스꺼움을 느끼며 걸어가던 등굣길을 검둥이를 대동하고 온통 휩쓸었더라면. 넓은 초록빛 장식을 몸에 주렁주렁 휘감고 머리에는 빨간 터키식 터번을 쓰고, 나무토막처럼 새까만 발톱을 불처럼 빨간 샌들에 찔러 신은 채, 거기다가 눈처럼 흰 커다란 이빨을 얼음처럼 번득이는, 까만 래커를 입힌 듯한 검둥이를 나란히 대동하고 걸었더라면,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 한 걸음 내 뒤를 따르게 했더라면, 꼭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장터의 버터와 달걀 파는 아주머니들이 도깨비 같은 광경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예수, 마리아, 요세프”를 외치면서 성호를 긋고, 그중 어떤 행상은 혼비백산한 나머지 지방법원 판사 댁의 하녀에게 마늘을 10페니히어치나 더 집어 내주는 일이 벌어지고, 바야흐로 신선한 아홉 시의 아침 바람에 연미복 자락을 휘날리며, 돌계단을 걸어 나오시던 요리집 주인장 요세프 도오더 비이히 씨께서, 내가 멋진 검둥이를 대동한 진풍경을 보고는 그 부석부석하고 탁한 실눈에 갑자기 두 알의 보석 같은 불을 번쩍했더라면. “어떻게 슈낙 씨 집의 안톤이 검둥이 노예를 거느리게 되었지?” 장터근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수군댔을 것이다. “김나지움의 오 학년짜리밖에 안 되는 철부지 애송이가 어떻게 모로코의 슐탄도 쉽게는 부리지 못하는 노예를 거느리게 되었지?”
그래서 - 나는 모두의 귓구멍에 대고 고함을 쳤을 것이다 - 그래서 좀 나은 점수를 받는다 해서 나는 너희들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지금 너희들은 마땅히 내가 부러울 것이다. 나는 지금 막 파나마의 원시림에서 왔으니까. 기다란 꼬리 달린 원숭이가 우글거리고, 나무마다 노란 대가리의 왕뱀이 살며, 갈라진 혓바닥을 널름대면서 꿀꿀거리며 지나가는 멧돼지를 노리고 있는 밀림, 그곳에서 나는 온 것이다. 알리바바가 나의 증인이다! 알리바바, 나서라!“
● 학창시절의 친구들
그들과 더불어 나는 격동에 찬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한 무리의 영상들, 판사나 목사가 된, 농부가 되어 기억 속에서 라틴어의 시구를 뿌리며 경작하는, 아니면 은행원이 되어 모험을 갈구하던 젊은 알의 웅대한 꿈을 장부의 차변과 대변 속으로 녹아 없애버린 친구들, 머릿속에는 반항과 고집, 뜨거운 동경과 설렘으로 꽉 차 있던 소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차례차례 더듬어 보노라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나 자신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
마르라는 친구는 프랑켄 주 뢰엔의 아늑한 숲 속에서 태어난 산지기 아들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상 물과 숲의 입김이 서리고 송진과 건초의 향내가 풍기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어느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에게는 예쁘고 날씬한 누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한 누이를 우리의 라틴어 선생님이 사랑하고 있었다. 겨울날 그 선생님은 이 사랑스러운 처녀와 얼음판에서 멋있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여름날 오후면 나는 외딴 숲 계곡에서 곧장 이 여인들과 부딪쳤었다.
알프레드는 겁이 많고 추위를 잘 탔고 추워지면 뺨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성적이 불량한 학생이었다. 언제든지 정신은 다른 데 가 있고, 수업 과목에 취미를 못 붙였다. 다만 피아노만은 묘하게 힘찬 터치로 조금도 거침없이 거의 예술적으로 연주했다.
우리 모두가 졸업을 해 학교를 떠난 뒤 어느 날, 나는 프랑켄의 클라인슈타트의 장터를 걸어가다가 그를 만났다. 그때 그는 다보스의 폐결핵 요양소 안에서의 묘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 그는 그곳에서 알게 된 어느 조그만 러시아 계집애한테 홀딱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 년 뒤 나는 신문에 그의 부고가 난 것을 읽었다. 그의 나이 미처 열아홉도 되기 전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마일게겐트 태생의 어느 소농의 아들이 있었다. 유난히 눈자위가 좁고 음침하게 쏘는 듯한 시선을 한 외고집쟁이였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성직자, 이를테면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들은 툭 하면 욕설이나 입에 담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시간이 나면 소형 피스톨을 들고 산울타리를 따라 다니거나 숲가를 돌아다니며 새를 쏘아 잡았다.
그는 달리기와 기어오르기에는 선수였다. 한 번은 알을 품은 부엉이의 둥지를 망쳐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부엉이 한 쌍이 무시무시하게 울부짖어대면서 둥지 도둑이 앉아 있는 소나무 수관 주변을 맴맴 맴도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돌맹이를 던져 암놈의 머리통을 으깨어버렸다. 지금은 돌이켜 생각만 해도 혐오감이 있지만 그때 우리들은 어쩔 줄 모르게 좋아하며 이런 장난을 쳤었다. ~~~~훗날 그는 프랑스의 이역으로 도망을 쳤다가 폭도 압트 텔 크림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전사했다.
프라츠라는 이름이 또 다른 친구는 흡사 할아버지 같은 얼굴 모습을 한 홀쭉하고 융통성 없는 소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수도원 부속 양조장이었던 어느 양조장에서 기사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양조장은 시내에서 20분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언덕의 연변으로 넓은 하얀 길이 숲과 포도원 마을로 이어지고 있었다. 프리츠는 책 보따리를 어깨에 바짝 둘러메고 겨울이나 여름이나 이 길을 걸어 다녔다. 그는 식물 선생님한테 표본용 꽃의 대부분을 갖다 바쳤다. 그가 다니던 큰 길은 언덕을 타고 울라와 수풀 사이로 들어서기까지는 초원으로 뒤덮인 습하고 널찍한 골짜기를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잘래 강에서 멱을 감다가 익사했다. 밀물이 몰려와 강물이 초원을 흘탕의 물결로 뒤덮으며 흐르고 있었다. 햇빛이 화사하게 쏟아지는 넓고 깊은 웅덩이 속에서 우리는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 앞에서 그가 물속으로 잠기더니 손을 위로 허우적거리며 불쑥 솟았다가는 다시 가라앉았다. ~~~우리는 미친듯이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며 흙탕물 속으로 잠수를 해보았지만 그런 수고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불과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그는 엄숙한 행렬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립묘지에 묻혔다. 그 장례식에서 나는 촛불을 켜 들고 있었다.
칼은 눈에 띄게 단아한 귀공자 같은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와 나의 부모들은 날씨 좋은 일요일이면 곧잘, 그 지방 특유의 포도주를 파는 프랑켄의 어느 마을 주막을 찾아 시골로 가곤 했다. 학교 과목이라면 하나같이 냉소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슬프고 커다란 눈, 그의 눈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과 맺은 우정이 이후의 내 인생에까지 살아 이어진 친구는 내게 한 사람도 없었다. 학창 시절이 흘러간 뒤의 인생행로에서 나는 아무와도 재회를 한 적이 없다. 대부분의 친구가 피의 그름 속으로 사라져간 것이다. 하기야 죽음이란 이미 그때 교실 의자 위로 그들 사이에 내려와 앉아 있었다. 그들이 배운 라틴어는 장송전례처럼 울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음악 시간
● 건초 예찬(全文)
마른풀의 향내, 프랑켄 평야의 어린 시절부터의 구원의 향기여! 그 시절 뜨거운 여름날이면 프랑켄의 잘레 강 계곡과 마인강 유역의 풍경은 온통 이 향기로 뒤덮였었다. 어스름 황혼이 되면 내려오는 밤의 촉촉한 습기 속에서 그 향내는 유난히 격렬했다. 이런 무렵이면 소년의 가슴은 언제나 뒤집히듯 설레고는 했다. 이 끈끈하고 짙은 향내 속에서는 또 다른 향내가, 땅 밑의 입김이 서려 부동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상 속에서의 여행의 향기,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다가 던져놓고 간 마른 해조의 알알한 향기. 서랍에서 끄집어낸 지도에서 나는 곰팡이 얼룩의 향기, 유랑민이 거두어들인 포도의 향기, 칙칙폭폭 떠나가는 기관차가 남겨주는 축축한 유황의 냄새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켄 농가의 광에서 나는 마른풀 냄새는 구원의 향기이다. 매혹적인 대들보 밑의 서늘한 기운, 햇빛 비친 한 송이 수련 뿌리 위로 정기 있게 어렸던 초록빛 여명처럼 으스름한 등불, 어둑한 가을날이면 나는 이 마른풀 더미 지대를 오르락내리락 서성이며 묵은 향내 속에서 지나간 여름의 영혼을 찾고 있었다.
새하얀 달팽이의 자취와 나비의 날개 무늬와 수줍은 토끼의 무리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먼지와 발효로 한층 탁해진 공기가 지붕 밑에 무겁게 드리워 있었고, 이제는 힘없이 축 늘어져 서 있는 초목의 온기가 육감적인 입김처럼 살갗을 스쳤다. 마른풀 줄기를 잇새에 물고, 떨어진 거미줄을 흰 깃발처럼 초록빛 윗도리에 걸친 채 나는 사다리에서 사다리로, 바닥에서 바닥으로 무릎을 펄썩 주저앉아 기며, 어느 때는 건초 웅덩이 속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낯선 고양이를 쫓아가면서 비트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농부의 아내는 과에서 암탉이 낳아놓은 달걀을 찾는다는 것을, 총각은 위쪽에서 다진 바닥(마당)으로 건초를 내리느라 갈퀴질을 하고 있는 싱싱한 처녀를 찾아서 못살게 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 중 어느 것도 찾고 있지 않았었다. 다만 꿈과 공상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아지랑이가 일더니 꿈과 공상의 불을 붙였고, 수수께끼처럼 아롱아롱하는 언어를 내게 불어넣어주었다. 나는 이 언어에 괴팍스런 자부심과 리듬을 붙여가며 끝없이 독백을 이어갔던 것이다.
마치 벌초하기 전, 아직 풀들이 살랑살랑 흔들거리며 꽃망울을 숙이고 서 있는 동안 메뚜기 무리의 윙윙대는 울음소리야말로 웅장한 것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물결의 멜로디요, 끝을 모르고 드르륵찔그럭 톰을 켜는 소리였다. 거기에 간간이 끼어드는 귀뚜라미의 울음, 그것은 땅 구멍에서 솟아나오는 바이올린의 진동이었다. 그 위에서 풀을 베는 긴 낫이 내는 단조로운 노랫소리.
건초를 수확하는 동안에는 드르륵드르륵 바위에 낫을 가는 소리가 들린다. 또한 날을 가는 망치 소리 - 잠을 깨워주는 아침의 망치 소리와 은은히 스러져가는 저녁의 그 소리. 나무 갈퀴 밑에서 미처 덜 마른 풀이 내는 바삭거림. 찌는 듯한 무더위가 서쪽에서 뇌우가 쏟아질 것을 경고해준다. 높이 적재한 마차의 삐걱거림, 진한 땀방울 냄새 - 그것은 넓게 챙 달린 밀짚모자 밑에서 늙은 농부의 주름 진 얼굴위로 투명하게 방울져 굴러 내리더니 먼지 속으로 슬그머니 날아가 버렸다.
건초의 향내 속에서, 이미 죽음에 의해 베어지고 망각의 세계에 묻혀버린 그 옛날의 풀을 베던 무리들이 아물아물 떠오른다. 온통 햇볕에 그을러 거무튀튀한 얼굴의 기다란 사슬, 교회의 축성일이면 클라리넷을 불었던 그들. 나무껍질의 담배통에서 흙 묻은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냄새 맡는 담배를 집어 올리던 그들.
콧마루를 벌름거리며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마른풀의 아물거리는 향내를 함뿍 들이마실 때면, 그들 모두의 모습이 내 가슴속에서 되살아 움직인다. 또한 젖은 수건을 휘감은 포도주 항아리랑, 더위로 인해 기름이 번질번질 배어 나온 훈제한 고기를 바구니에 담아 들고 어느 버드나무 엷은 그늘 밑에 내려놓던 마을 처녀와 아낙네들까지도.
그들은 갓 베어낸 건초의 행렬을 갈퀴로 뒤집으며, 땅바닥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눅눅한 풀들을 햇볕에 널어놓았었다. 이렇듯 소용돌이치며 풍기는 진한 향내는 육감적이며 자극적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들뜬 가슴은 황혼을 지나 한밤중이 되도록 가라않지를 않아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맨발의 발걸음을 충동질했던 것이다.
하지만 건초의 향기 속에 스며있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여독에 못 이긴 지나가는 나그네들까지도 반쯤 그늘진 두둑에 다리를 뻗고 누웠었다. 그곳의 버림받은 웅덩이 속에서는 귀뚜라미가 다른 세계의 귀뚜라미를 향해 불붙는 사랑의 고백을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나그네의 길에 눈과 처녀의 푸른 눈 사이에 시선이 오고갔다.
마치 그때 먼지투성이로 싸늘한 두둑에 드러누워 마른 풀을 뒤집고 있는 맨발의 여인네들을 바라보던 내 모습처럼. 마른 풀의 향내는 어떠한 화학적인 대충물로도 몰아내질 수가 없으리라. 사랑의 시선이 어떠한 새로운 종교로도 대치될 수 없듯이.
화사한 여름날 동안 프랑켄의 잘레 강, 묵묵한 사랑이 흐르고 있는 소박한 농촌의 강의 연변으로는 위로 거슬러 올라가나 아래로 내려오나, 거대한 건초의 더미들이 헤아릴 수 없는 침침한 무리를 지어 등을 돌리고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흐름을 정지한 듯한 고요한 수면 위로는 솟고 잠기면서 밤의 무도회를 열고 있는 하얀 각다귀 떼를 쫓아 제비들이 여전히 철썩철썩 물을 차고 있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층층 쌓아올린 풀 더미에는 아직도 낮의 태양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강물은 느릿느릿 들릴 듯 말 듯 소곤대고 있었고 보랏빛 과일처럼 숲 위로는 달이 떠올랐다. 게다가 육중한 성이 자리 잡은 포도원의 언덕은 물빛 음영의 장막 속에 들어서서 강물의 신선함을 마시고 있었다. 사랑을 하는 데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 그곳의 별 하늘 밑에서 그대들은 내게 수줍은 키스를, 시든 장미꽃이 꽃힌, 푸른 꽃무늬의 옷 속에 감추어진 그대들의 젊고 발랄한 육체를 선사했었다.
그때의 입맞춤은 가장 아름다운 입맞춤이었다. 그 이상 아름다운 입맞춤은 영원히 없었다. 그대들도 아직 이따금씩 그 시절을 회상하는가? 건초를 거두어들이는 향내가 해 지는 골목으로 불어올 때면 나는 눈앞에 보듯이 고향을 생각 한다 - 고향은 지금도 그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으리라.
열려진 창으로 흘러들어와 자란(紫蘭)의 방향(芳香)과 어우러 드는 밤의 건초의 향기여, 알 수 없는 향료여, 너는 얼마나 많은 수천 수 많의 꽃봉오리가 발효하여 이루어진 것이냐? 그중에는 햇볕에 익은 물방울을 빨기 위해 벌들이 찾아드는 하얀 클로버 꽃이 있었다. 또한 아직 아침 햇볕을 받아 이슬방울이 보랏빛으로 반짝일 때, 목동들이 가지째로 곧잘 꺽어 가는 가새풀의 별 모양 연분홍 꽃이 있었다.
어찌 그뿐이랴. 이 향기 속에는 야생 완두류와 황금 클로버, 마디풀과 조팝나무. 그리고도 수많은 사랑스러운 꽃망울들, 수호신과 요정을 위한 부산물의 향기가 서릭어 부동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 풍기는 건초의 향기는 촉촉한 습기가 있었다. 그 습기는 늪지로부터 넓게 퍼진 부연 안개 속으로 발산한 이슬에서 연유한다. 수줍은 작은 짐승들이 숱하게 이 습한 향내 속을 획 스치며 달려가 버렸다. 이제 이 향기는 한층 격렬하고 짙게 퍼지리라.
잘레 강 저편 산등성이 위로는 밤의 뇌우가 몰려와서 잔잔한 아지랑이 위로 굵은 물방울을 몇 방울 뿌리고 있는 것이다. 오오, 밤의 향기여. 수많은 감미로움의 씨앗이여! 그리고 인간이여, 그대는 잠들어 있는가? 깨어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취해보라! 처녀의 덧창을 두드리는 목신처럼 맨발로 걸어보라!
[2] 밤의 해후
● 사랑의 아득함
토요일이었다. 오늘은 그녀에게서 전화가 올까? 이렇듯 내가 팽팽하게 기대감을 갖고 생각을 한다면, 그녀는 마땅히 전화를 걸어와야 하는 것이다.
● 라일락 숲에서의 입맞춤
어머니가 사시던 집은 사방이 이미 경작지로 둘러싸인 길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길에서부터 새들의 천국인 과수원 언덕이 뻗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지요.
● 밤의 해후
황혼 무렵, 사나이들과 어울려 마인 강 유역의 고도시에 있는 그 주막으로 들어섰을 때, 브론자르트는 몇 년 전인가 이곳에 와서 특산 포도주를 마시던 기억이 떠올랐다.
● 마인 강의 목재 화물선
대체로 6월, 7월, 8월을 지나는 동안 오후가 되면,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는 예선(曳船)과 삼판선(三板船)의 예색(曳索)이 강물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서 지나간다. ~~~~ 이 화물선들은 원래 라인 지대의 공업 항도로부터 석탄을 잔뜩 채워 마인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이번에는 목재를 싣고 라인 강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껍질을 벗기어 다듬어진 그 목재들은 시커먼 검댕이 천지의 탄광에서 갱도에 쓰여질 것이었다.
[Review]
‘피에르 쌍소’ 는 수필집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가난은 구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슬픔은 가난에서 나온 것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슬픔은 모호하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이고, 정신적 개념이지만 실존하며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늘 떠나지 않고 배회한다.
“울고 있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본문)
중학교 1학년 때인가,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글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까까머리 철부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세파를 넘은 희끗희끗한 머리, 중년에게 어울리는 글이다.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본문)
올해 여름엔 더위를 피해 도서관에 가는 날이 많았다. 도서관에는 대부분 젊은이지만 간혹 중년이 훌쩍 넘어 보이는 사람들도 꽤 눈에 띈다. 읽을 책을 고르다가 몇몇 노인들이 시험 문제집에 열심히 줄을 그으며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보아 넘길 일이지만, 문득 슬픈 마음이 일어나고, 어린 시절 ‘안톤 슈낙’의 글이 생각났다. 한나절이면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멈춰지는 대목이 많아서 아예 책을 빌려다가 한 주간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1892년 독일 출생하여 신문기자와 편집인으로 일했고, 젊은 날에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다. 1945년 종전과 함께 미국의 포로에게서 풀려나 마인 강변에 있는 칼 시로 돌아와 자유로운 작가로서 만년을 보냈다.
이 책은 ‘젊은 날의 전설’(1941년)과 ‘밤의 해후‘(1940년), 두 편의 산문집을 묶은 것으로 유명한 수필’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자는 어린 시절, 고향, 자연이 소재이며, 후자는 젊음과 사랑, 방랑과 숲이 이야기의 주제이다.
책을 읽으면서, 풍요롭지 못하던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면 감추고 싶은 기억뿐인데, 그 기억에 아름다운 채색을 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에는 채색 도구들이 가득 들어 있다. 한해를 돌아보는 계절, 구월에 어울리는 책이다.
(본문)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이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9월의 어느 날 밤, 투명한 정적 속으로 한 알의 사과가 툭 떨어지는 소리는 쾌적하게 울려온다. 이튿날 아침 풀밭에서 그 열매를 찾다가 눈에 띄었을 때의 기쁨이란! ”
“폭풍이 몰아칠 때 소나무 수관을 획획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 바람은 벽난로 안에서도 노래를 한다. 이 두 개의 소리에 나는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 있다.”
“9월도 저물어가는 어느 날, 잿빛으로 흐른 푸근한 오후였다. 나는 야외의 광장에서 조그만 나무 굴렁쇠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한 무리의 영상들, 판사나 목사가 된, 농부가 되어 기억 속에서 라틴어의 시구를 뿌리며 경작하는, 아니면 은행원이 되어 모험을 갈구하던 젊은 알의 웅대한 꿈을 장부의 차변과 대변 속으로 녹아 없애버린 친구들, 머릿속에는 반항과 고집, 뜨거운 동경과 설렘으로 꽉 차 있던 소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차례차례 더듬어 보노라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나 자신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
“건초의 향내 속에서, 이미 죽음에 의해 베어지고 망각의 세계에 묻혀버린 그 옛날의 풀을 베던 무리들이 아물아물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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