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전11:9~10
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0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설교>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일반적이지 않는 내용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려운 용어나 문장이 이유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현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해가 있고 햇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은총이라는 말은 인정을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은총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해를 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빛이 아름답다 해도 그것으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을 인생의 의미와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가치 있는 인생을 꿈꿉니다. 이런 우리에게 단지 해를 보는 것만으로는 즐거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말은 우리가 추구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전도자가 인간 됨을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이상적인 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 자체의 문제일까요? 결국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해를 보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것과는 너무 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온통 세상일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해를 본다 해도 즐거움은 고사하고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고백한다면 과연 그것이 참된 고백일지가 의문입니다.
시 19:1절을 보면“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말하고, 5,6절에서는“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늘과 해는 말 그대로 그냥 하늘과 해입니다.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19편을 기록한 다윗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해의 움직임에서 하늘의 끝과 끝을 다스리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하늘과 해에 대한 다윗의 표현과 고백은 지금의 기독교인에게서 볼 수 있는 열정이나 관념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면 파랗다, 맑다, 흐리다는 표현만 있을 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해를 봐도 눈이 부시다는 반응이 있을 뿐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인생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소유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다시 말해서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기는 것에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둔다면 분명 사람들의 인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유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해를 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해를 보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특별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유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해를 보는 것은 아무런 느낌이 없고 감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유가 아닌 죽음이라는 존재 문제에서 생각하면 인생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입고 살았든 그것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은 어느 순간 해를 보지 못하는 캄캄한 날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유가 아닌 인간의 존재에 마음을 두게 되면 오늘 해를 보게 되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일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은혜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해를 보는 것은 감사와 즐거움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9절을 보면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합니다.
어린 때를 즐거워하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어린 때는 지나간 과거입니다. 그리고 항상 지금의 현재에 집중합니다. 현재가 좋지 못하면 과거가 아무리 좋았다 해도 즐거움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현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어린 때를 즐거워하라는 것은 어렸을 때라는 과거를 추억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로 있을 때를 즐거워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눅 18:17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랍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소유를 위해 일하고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되면서 어른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청년이란 이러한 어린 아이의 마음이 없는 어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자기를 위해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속성으로 무장된 인간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됩니다. 이것을 알게 된다면 어린 아이의 때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자기 힘으로 살지 않는 세계로 다가올 것이고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고 즐거움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한편 강도는 예수께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복된 선언을 남기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선언처럼 주께서 함께 하는 자로 세상에 존재합니다.
세상은 심판 아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캄캄한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보다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주만 의지하는 어린 아이 마음으로 만들어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