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시 일반론
“Sidney and Shelley pleaded this cause.
Because they spoke, must we be dumb?”
GEORGE E. WOODBERRY, A New Defense of Poetry
“시드니와 셸리가 이 변호를 간청하는구나.
그들이 말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입을 닫아야겠는가?”
-조지 E. 우드베리, 『신시의 옹호』
시의 연구
제1장 전체적 배경
흐린 가을날이다. 나는 책상에 앉아 시에 관한 첫 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창 밖에는 한 여인이 파헤쳐진 화단의 갈색 흙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다음 해 봄의 개화를 기대하듯 모종삽으로 튤립의 구근(球根)을 사랑스럽게 덮어주고 있다. 저 여인은 캐서린 티난(Katharine Tynan)의 시「구근 심기」(Planting Bulbs)를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꾸물거리는 펜을 내려놓고 그 시를 웅얼거리고 있다.
“Setting my bulbs a-row
In cold earth under the grasses,
Till the frost and the snow
Are gone and the Winter passes—
“Turning the sods and the clay
I think on the poor sad people
Hiding their dead away
In the churchyard, under the steeple.
“All poor women and men,
Broken-hearted and weeping,
Their dead they call on in vain,
Quietly smiling and sleeping.
“Friends, now listen and hear,
Give over crying and grieving,
There shall come a day and a year
When the dead shall be as the living.
“There shall come a call, a foot-fall,
And the golden trumpeters blowing
Shall stir the dead with their call,
Bid them be rising and going.
“Then in the daffodil weather,
Lover shall run to lover;
Friends all trooping together;
Death and Winter be over.
“Laying my bulbs in the dark,
Visions have I of hereafter.
Lip to lip, breast to breast, hark!
No more weeping, but laughter!"
“초원의 차가운 흙 아래
내 구근을 일렬로 묻는다
서리와 눈이 사라지고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잔디와 진흙을 뒤적이며
나는 가난하고 서러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첨탑 아래 교회 공동묘지에
죽은 이들을 묻은 그들을
“모든 가난한 사람들은
비탄에 잠긴 채 흐느끼며
죽은 이들을 부르지만 소용이 없구나
죽은 이들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잠들어 있을 뿐.
“친구들이여, 자 이제 귀 기울여 들으라
슬픔과 한탄일랑 그만 두고,
죽은 이들이 산 자들처럼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니.
“부르는 소리, 발자국 소리 들리고
황금빛 나팔소리 울려 퍼지며
그 소리로 죽은 이들 흔들어 깨워
일어나 걷게 하리라.
“마침내 수선화의 계절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에게 달려가고
친구들 모두 함께 모이리니;
죽음과 겨울은 끝이 나리라.
“내 뿌리 어둠 속에 누워 있으나
나 미래의 꿈을 꾸노라.
입술과 입술 맞추고, 가슴에 가슴 맞대고, 들으라!
더 이상 울지 말고, 환하게 웃으라!”
그러나 이것은 책의 한 장(章)을 시작하는 방식이 아니며 의도를 암시할 뿐이다. 창밖을 내다보며 캐서린 티난을 인용하기보다는 좋건 나쁘건 책을 시작하는 문장을 쓰는 것이 어떤가? 그러자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이기나 하듯 마침내 이 장을 시작할 한 가지 방법이 문득 떠올랐다. 이 책에서 내가 하려는 일이 적절한 산문으로 운문이 지닌 묘한 능력의 일부라도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란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구근을 심는 여인과 같은 물리적 이미지를 포착하여 그 이미지를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변형시키는 능력, 사실을 진실로, 갈색 흙을 미(美)로 변형시키는 능력, 인간 언어의 단속적인 음절들을 완전한 음악으로 개조하는 능력, 따분한 사고와 끝없이 출몰하는 두려움 때문에 풀이 죽은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켜 황홀하게 함으로써 울음은 웃음으로, 한창 때를 지나 떠오르는 죽음의 예감은 삶에 대한 확신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며, 나아가 개인적 경험이라는 좁디좁은 길을 상상력이 다스리는 무한한 공간으로 확장하는 능력이다. 분명히 시는 이 모든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또 왜? 문제는 이 질문들이다.
“시의 미래는 광대하다.”고 매튜 아널드(Matthew Arnold)는 선언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이 의기양양한 주장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시의 과거 또한 광대했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랫동안 존재해온 엄청난 양의 시들을 보라. 시는 그 어떤 역사의 기록보다 일찍 인간의 의식에 자리 잡았으며, 문명을 이룩해온 모든 종족 중 가장 세련된 영혼을 지닌 몇몇 존재들이 시 창작에 헌신해왔거나, 혹은 적어도 시를 암송하고 읽으며 그 의미를 명상하는 기쁨에 기꺼이 스스로를 바쳐왔다. 이처럼 풍부한 인간적 배경을 인식한다면 시에 대한 진술들을 연구하고 그 본질적 특성을 확정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수반되어야 함은 마땅할 것이다. 시에 대한 진술들은 실제로 다소 복잡하며, 시의 특성은 적어도 어떤 면에 있어서는 항상 신비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복잡함과 신비함 속에 깃든 시의 매력이 무수한 세대를 매혹해 왔으며, 과학의 발전과 학문의 결실에 의해 파괴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심오해졌다.
민속학과 비교문학은 시의 비밀을 설명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어왔다. 심리학 실험, 비평사, 언어학적 탐구, 현대에 들어 음악과 여타 예술의 발전 또한 우리가 시 예술을 지적으로 즐기는 데, 그리고 인류의 삶에 있어서 시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는 데 기여해왔다. 지식의 상호연관 관계가 이보다 더 예리하게 인식되는 탐구 분야는 없다. 시 연구 영역의 초심자는 과학적 관찰 분야에서, 분석하는 습관 속에서, 민족과 역사적 시기의 연구 속에서, 언어의 사용 속에서, 순수 회화의 해석과 실행 속에서, 혹은 자신의 리듬감을 개발시켰던 그 어떤 육체적 훈련 속에서—이 모든 것 속에서 그가 이제까지 받아왔던 어떤 실질적인 훈련이라도 이 새로운 연구 분야에서 확인 가능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즉각 위안을 느끼고 자신의 열정을 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분야를 조사하기 위하여 그의 특별한 지식이나 태도를 적용하기 전에 먼저 시 연구가 포함하고 있는 보다 광범위한 질문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질문들 가운데 첫 질문은 시 연구가 미학 일반의 영역과 맺는 관계이다.
1. 시 연구와 미학 연구
그리스 인들은 시 연구를 설명하는 편리한 용어를 발명했다. 『시학』(Poetics)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너무도 유명한 단편논집이 저 제목을 취하고 있는데, 그 책은 특정한 유형의 시에 대한 성격과 법칙, 그리고 시와 다른 예술과 관계를 다루는 것이었다. 그리스 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를 하나의 예술로 간주하며, 시란 리듬감 있게 배열된 언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그들이 시에 유용한 특정한 종류의 감정과 시인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유형의 리듬감 있는 언어 배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다른 질문들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예술은 감정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그 과정에서 그들은 어떤 율동적 질서와 배열 속에 사실들을 활용하는가?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우리 내면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달리 말해 예술적 자극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
이러한 폭넓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우리 현대인들은 소위 미학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스어인 “aisthanomai”(지각하다)로부터 나온 미학이라는 용어는 “감각에 의한 지각과 관련 있는 모든 것”이라고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이 용어를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18세기 중엽의 독일 사상가 바움가르텐(Baumgarten)이었다. 그가 의미한 바에 따르면 그 용어는 “순수 예술 이론”이었다. 이 용어는 “미(美)에 대한 학문”과 “미의 철학” 양자, 즉 미 자체의 본성과 기원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에 대한 분석과 분류를 묘사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미학이론이라는 형식적 언어 사용보다 수천 년 앞서 미학적 탐구와 그에 대한 응답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엉의 이야기”(Story of Ung)는 현대의 스튜디오와 교실에서 확정짓기 위해 토론하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 바로 그 문제를 토굴인들이 논의하고 있는 모습을 명백하게 보여주지만, 예술의 영원한 문제인 그 주제에 대한 그들의 시도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자, 여기 두 얼굴, 나무 두 그루, 두 가지 색이 있다. 그 둘 중 다른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좋아 보인다. 그 대상들 사이에는 대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우리가 선호하는 얼굴, 나무, 색깔의 어떤 점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내면을 동요시키고 일깨우는가? 이런 질문들이 우리가 심미적 문제라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식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미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감각을 지닐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 대상들에 대한 인식은 물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미학적 성찰을 위한 재능에 수반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반대로 수많은 미학 교수들이 추한 집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여러분들은 그가 강과 하늘을 바라보거나 음악을 듣고 맥박이 고동치는 자극을 느낀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공식적인 미학사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 분야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외면적으로 가장 단순한 질문이 가장 민감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현대적인 질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보산퀘트(Bosanquet)가 언급한 미학이론에 대한 그리스 인들의 세 가지 철학적 공헌을 예로 들어보자.
⑴ 예술은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즉 미학적 “심미적 유사성”이나 혹은 예술가에게 보이는 대로 사물들을 다룬다는 개념.
⑵ 예술은 “모방”으로 이루어진다는 개념. 이 주장은 모방 자체보다 모방되는 존재가 더 “가치 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까지 나아간다.
⑶ 미란 대칭, 부분들의 조화, 한마디로 말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 할 수 있는 특정한 형식적 관계로 구성된다는 개념.
첫 번째 개념을 실행하지 않고는 코닥 카메라로 스냅 사진 한 장도 찍을 수 없다. 두 번째, 세 번째 개념을 고려하지 않고서 “새로운 음악”과 “자유시”를 이해할 도리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포함된 정말로 중요한 논의에서처럼 시를 공부하는 연구자가 미학 이론을 친숙하게 안다는 것의 가치는 때로 명백하다. 하지만 그 보다는 그의 공감과 기호에 영향을 미치는 간접적 자극 속에서 미학과의 친밀성이 지니는 가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고대에 널리 퍼졌던 미에 대한 의식과 중세의 화려한 예술 창조의 시기, 그리고 풍경과 보다 풍부하고 깊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새로운 감정의 성장과 예술 작품의 “의미” 혹은 개별적 “특징”의 등장 등을 연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미의 본질에 관한 칸트, 헤겔, 콜리지의 철학적인 논지에 몰두하거나 현대적 실험실의 호기심어린 실험 미학의 분석을 따랐을 수도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미학적 자극에 대한 정신물리학적 반응이 정교하게 기록되고, 선, 색, 어조가 인간의 기관에 미치는 영향이 수학적으로 엄정하게 설명된다. 이렇게 되면 그는 애초에 미를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과도하게 느낄 필요가 없다. 핵심은 인간이 아름다운 대상들과 아주 오랫동안 친숙하게 몰두해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시의 본성과 법칙에 대한 어떠한 연구도 틀림없이 그를 미학적 감정 일반의 본성과 표현과 같은 보다 깊은 호기심으로 이끌어 가리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