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우리의 무지만이 무한할 뿐입니다 >-카를로 로벨리
지금 우리가 보고 이해하고 있는 우주는 무한의 심연이 아닙니다. 광대한 바다이기는 하지만 유한합니다.
성서의 외경 가운데 하나인 <집회서>는 거창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누가 바다의 모래와 빗방울과 영원의 날들을 셀 수 있으랴?
누가 하늘의 높이와 땅의 넓이를, 심연과 지혜를 헤아릴 수 있으랴?]
그 누구도 바닷가 모래알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글이 지어진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위대한 문헌이 만들어집니다. 그 첫머리는 여전히 울림을 줍니다.
[겔론 왕이여, 어떤 사람들은 모래알의 수가 무한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아르키메데스의 <모래알 계산 Pslammites>의 첫머리입니다. 이 책에서 고대의 위대한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모래알을 셉니다. 그는 모래알의 수가 유한하며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고대의 산법으로 큰 수를 다룰 수 없었습니다. <모래알 계산>에서 아르키메데스는 현대의 지수와 유사한 새로운 산법을 개발합니다. 이로써 아주 큰 수를 다를 수 있게 되었고, 바닷가에 있는 모래알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 있는 모래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주 손쉽게 셀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래알 계산>은 쾌활하면서도 깊이가 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시대를 앞지른 계몽주의로 비상하여, 애초에 인간의 정신으로 접근할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통속적 믿음에 반기를 듭니다. 그렇다고 우주의 정확한 크기나 모래알의 정확한 개수를 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가 옹호한 것은 지식의 완전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신이 추정한 값이 근사치이며 잠정적임을 명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완전한 지식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중요한 것은, 어제의 무지가 오늘 밝혀질 수 있고, 오늘의 무지가 내일 밝혀질 수 있다는 인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알려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반항입니다. 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명이며, 무지에 만족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무한이라 부르면서 앎은 다른 곳(God이라든지 기독교 신앙)에 위임해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당당한 회답입니다.
수 세기가 지나고 <집회서>는 성서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집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책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그리스의 마지막 자부심이었던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스가 로마에 점령당할 때 로마인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후 로마제국은 <집회서>를 국교의 근본 문서로 채택함으로써 천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합니다. 그 천년의 시간 동안 아르키메데스의 계산법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시라쿠스 근처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인
타오르미나 극장이 있습니다. 지중해와 에트나 산을 굽어보고 있죠. 아르키메데스 시대에는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을 상연하던 곳을 로마인들은 검투장으로 사용하면 검투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죠.
<모래알 계산>의 세련된 쾌활함은 대담한 수학적 구성이나 지성의 탁월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알지만 지식의 원천을 다른 것들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 이성의 당당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한에 맞서는 작고 신중하며 더없이 지성적인 선언, 몽매주의에 반대하는 선언입니다.
우주는 광대하지만 유한합니다. 오직 우리의 무지만이 무한할 뿐입니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카를로 로벨리> p230~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