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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얼마전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쇼킹한 증언을 하여 체포당한 조웅 목사의 정보라인이었던
문명자 기자의 취재 파일(단행본) 전문(全文)인데 분량이 많은 관계로 편의상 1, 2편으로
나눠 게시합니다.
1편(1~3부 수록), 2편(4~7부 수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문명자 지음
-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4부 박정희의 비자금
제 2장 이후락이 관리한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 것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 것"
한국 정부가 기용한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이 미 의회 의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뿌린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조사하던 미 의회 외교위원회 국제관계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위원회)는 박동선이 뿌린 박정희 비자금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둘째
아들 이동훈을 몇 차례 소환했다. 78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이 씨는 계속 피해 다니다 결국 소재지가 발각돼 비밀 증언 형식으로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그는 증언대에서 "내 아버지 명의의 스위스은행 비밀구좌는 박정희의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박정희 비밀구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물론 "도대체 이동훈이 왜 입을 열었을까" 라고 궁금해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한보청문회에 출두한 정태수 회장처럼 '자물쇠 입'이나 '실어증'으로 버티면 되는 것 아니가 하는 의문일텐데, 그것은 완전히 한국식 사고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증인출석 요구를 받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이동훈의 소재를 FBI를 통해 파악한 프레이저위원회는 그에게 소피나(강제소환장)를 발부했다. 소피나를 받고도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FBI에 의해 강제구인 당한다. 프레이저위원회는 그를 증언대에 세우기 위해 '비밀증언'이란 타협책을
제시했다. 미 의회의 조사활동 목표가 박 정권의 비밀자금으로 미국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려 한
한국인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뇌물을 받은 의원들을 밝혀 내 처벌하고 의회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동훈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프레이저청문회의 비밀증언대에 선 것이다.
그런데 일단 증언대에 선 이동훈은 결코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프레이저청문회의 조사반들은
이미 이후락 일가가 박정희 정권의 비밀자금을 조성하고 비축하고 유통시킨 과정에 대한 상당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증거자료들은 CIA, FBI, 법무성, 국세청, 국무성의 회계전문가들이
미국 내는 물론 스위스. 바하마. 도쿄 등 전 세계의 박 정권 비자금 거래 은행들의 거래기록을
뒤져 확보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걸프가 스위스은행의 이후락의 비밀구좌에 입금시킨 돈의 내역을 은행측이 이후락의
사위 정화섭에게 통보한 명세서 같은것이 바로 그것이다. 명백한 증거자료를 들이대며 심문하는
특별검사들의 칼날 같은 질문 앞에서 이동훈이 무슨 수로 비밀구좌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었겠
는가. 또 이동훈은 "일본 모 은행의, 당신 이름으로 되어 있는 구좌에 예치돼 있는 2백만 불은
누구 돈이냐"는 추궁에 "그 돈은 아버지(이후락)로부터 받았지만 실제로는 박 대통령의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미국 최고의 일류 변호사까지 동원했지만 명백한 증거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끝내 사실을 부인했다가는 위증죄로 법정에 서는 일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5.16 직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63년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직에 있던 이후락이란 인물을
나는 공식 석상에서 몇 차례 만난 일이 있다. 그런데 이후락에 대해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사람은 정일권의 후임으로 63년부터 주미대사로 일했던 김정렬이었다. 그는 은퇴 후
서울에서 만났을 때 이런 말까지 했다.
"문 기자, 이후락이같이 교활한 놈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거요. 이후락과 김형욱이란 악당 손에
박 정권은 결국 몰락하고 말 거야. 3선개헌 때 우리 공화당 의원들이 그 두 놈 손에 어떻게 끌려
갔는지 아시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앞 사람 벨트를 붙잡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소경처럼
질질 끌려간 곳이 제3별관이야. 가 보니 촛불 몇개 켜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
의장이 시간을 뜬다고 장경순(당시 부의장)이가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 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 하면서 땅땅 때리는데, 개헌안 통과시키는 데 1분도 안 걸렸어요.
모두가 화적단 같은 놈들이야. 문 기자, 내가 죽은 후에 언젠가 이것만은 역사에 밝혀 주시오."
"대사님, 그러게 5.16 나고 나서 공화당 사전 직후 의혹이다 뭐다 해서 모두들 들고 일어나 공화당 해체하라고까지 하는 판국에 무엇 때문에 공화당에 참여하셨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5.16 났을 때 내무장관으로 있던 홍진기가 발포 명령자에다 사사오입 개헌 관련으로 잡혀 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거든. 그런데 홍진기하고 나하고는 일제
때부터 아는 사이로, 자유당 때 각료도 같이 했고 해서 인간적으로 몰라라 할 수 없는 관계였어요. 그런 판에 하루는 박 의장이 나를 부르더니 '공화당 의장을 좀 맡으라'고 하더구먼. 그래서 나도
'청이 있다. 공화당에 갈 테니 홍진기 좀 풀어 달라'고 했지. 홍진기 살리려고 공화당 간 거야."
김정렬 씨는 이후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 주기도 했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요. 해방 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들 군사영어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 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측과 거래가 있었겠지."
공화당 정책위원장 박준규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자가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
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 나가더구만."
이 때 이후락이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CIA의 뒷받침 덕분이었다. 민주당 정권에서 장면의 비서를 지내 선우종원은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 정권 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 할 '정보조사국'을 만들었다. 당초 정보조사국 창설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 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 맡게 된 것을 보니 CIA 한국 지부에서 그를 민 것 같았다."
사실 이후락은 5.16 이후 CIA가 박정희 주변에 깊숙이 박아 놓은 첩자였다. 그는 최고회의 공보
실장 시절부터 최고회의 정보를 미국측에 보고했다. 미국으로서는 창군 초기부터 내내 미국 정보
기관의 끄나풀이었던 이후락을 좌익 전력을 가진 박정희 옆에 붙여 놓았으니까 박정희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일방적으로 감시만 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이후락 같은 미국 끄나풀을 곁에 둠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63년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이후락의 이른바 '떡고물' 정치가 본격화 되었다. 비단 국내
에서만이 아니었다. 이후락은 자신의 아들 딸, 사위 등을 모두 미국에 보내 놓고 미국에서조차
축재에 열을 올렸다. 당시 그의 사위 정화섭과 둘째 아들 이동훈은 LA에 있었다. 그들은 현지에
은행을 설립해 함께 주주로 참여했고 교포방송인 LA방송국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 실무 작업을
위해 MBC 직원들이 LA에 파견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재력을 기반으로 정화섭은 LA한인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정화섭은 또 LA의 부자동네인 윌셔 블루버드에서 당시 돈으로 3천만 달러를 주고 빌딩을 사들여 한국 교포들에게 세놓았다.
이 과정에서 교포들 사이에 "이 빌딩은 실은 이후락 것이다."라는 소문이 나서 현지의 민주화운동 그룹들이 "이후락의 부정부패와 재산 해외도피의 산 증거인 문제의 건물을 불태워 버리겠다" 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훗날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에서 FBI가 조사에 들어갔을 때 정화섭은 그
빌딩을 이미 매각한 뒤인 것으로 확인 되었다.
이후락은 70년 중정부장에 취임한 후 그 해 12월 정보 분야에 아무 경험도 없던 사위 정화섭을
중정 국제담당 2국장으로 앉히고 둘째 아들 이동훈도 자신의 비서로 임명해 72년 남북회담 당시
모두 북한까지 자신을 수행하게 했다.
게다가 그는 아들들을 재벌 딸들과 결혼시켜 온 나라를 사돈 관계로 얽어 놓았다. 이후락의 첫째
아들 이동진(50)은 서정귀(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 흥국상사, 호남정유 사장)의 사위가 됐는데,
김동조 주미대사 시절 대사관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둘째 아들 이동훈(49)은 한국화약 창업주
이자 전 회장인 김종희(일명 다이너마이트 김)의 사위가 됐다. 이들 사돈기업을 포함해 이후락의
후원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다섯 개 기업의 회장들은 세칭 '이후락의 5인방'이라 불렸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가 바로 그들이다.
사실, 미국의 석유재벌 칼텍스와 유니언 오일 사의 한국 내 합작선 선정은 제 3공화국 사상 최대의 이권이었다. 한국 재벌들이 석유 합작선을 놓고 벌인 혈투에서 호남정유와 한국화약 그룹이 최후
승리를 거둔 데에는 이후락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 호남정유와 한국화약그룹(경인에너지)이
모두 사돈기업이고 보면, 이후락은 유공.호남정유.경인에너지 이 3대 정유공장을 가진 한국의 석유재벌들과 사돈이 된 셈이다.
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 등 미국의 국제적 석유자본들은 기름값을 정부가 결정하는 한국에서
석유 공급을 독점함으로써 폭리를 취하고 그 대가로 박정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그것을
관리한 것이 이후락 일가였다.
내가 이후락 일가 부정부패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게 된 것은 사실 친구 ㅊ 덕분이다. 50년대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그녀는 이후락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이후락과 부인 그리고 자녀들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ㅊ은 후암동 이후락의 집에 드나들면서 접하게 된 기기묘묘한 일들을 나에게 들려 주었다.
그 집에 돈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 보니 집주인이 내방객으로부터 받은 봉투를 소파 밑에 밀어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버려 청소하던 식모가 수백, 수천만 원짜리 수표가 든 돈봉투를 주은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초등생이던 이후락의 셋째 아들 이동욱이 ㅊ의 집에 놀러 왔다가 ㅊ의 어린 딸에게 돈 세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폐를 한 장씩 넘기며)
"돈은 1억, 2억, 3억... 이렇게 세는 거야."
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평양을 왔다갔다하던 이후락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때에
나는 서울을 방문해 ㅊ의 집에 며칠 머물렀다. 그 때 영어를 배우러 온 이후락의 부인 정윤회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ㅊ이 나를 "미국 친구"라고만 소개했기 때문에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말끝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남북 통일을 시킬 것이다"라고 자랑을
하기에 나는 한마디 쏘아붙였다.
"정 여사, 당신 남편은 도둑놈이오."
그러자 이후락의 부인은 펄펄 뛰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건 다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세간에서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우리
주인은 절대로 결백합니다. 부정이라고는 모르는 분이예요."
이후락 부인과 나는 이후락이 도둑놈인가 아닌가를 놓고 한참이나 설전을 벌였다.
내가 자리를 뜨자 이후락의 부인이 ㅊ에게 "그 사람 누구냐"고 물었다라고 한다. ㅊ이 "워싱턴의
문 기자"라고 하자 다음 날 그녀는 돈봉투를 가지고 와서 내게 내밀었다. 기가 막힌 나는 그녀에게 목청을 높였다.
"나까지 도둑놈으로 만들려고 이러십니까?"
5공 시절, 나는 동향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 온 박영옥(김종필 부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부정축재 액수에서) 우리보다 이후락이가 적게 나왔는데 이럴수가 있나. 신군부 놈들이 이후락이는 봐준 거다. 당시 신군부 군인들의 기세가 어땠는 줄 아니? 그들은 나에게 '이 도둑년' 하면서 내 손가락에 낀 반지까지 빼 갔다. 그러면서도 이후락이는 봐줬으니 신군부에다 뭐를 먹였는지..., 목숨 바쳐 혁명한 사람은 두 번이나 외국으로 쫓아내고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권력은 다 해먹은게 바로 그 자다."
이처럼 온 나라를 혼맥으로 엮어 가며 차기 권력을 향한 기반을 착착 다져 가던 이후락도 73년
12월 박정희의 '가지치기'에 의해 해임되고 만다. 권좌를 떠난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후락은
74년 4월 조계종 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을 빠져나와 런던으로 갔다. 그 곳에서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미국측이 말썽 많은 그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자, 당시 한.영 영사
협정에 따라 비자 없이 갈 수 있었던 영국령 바하마로 갔다.
거기서 그는 그 때 돈으로 50만 불을 주고 저택을 사들이려고 했다. 이후락이 50년대에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으로 있을 때 알고 지내던 한 여성이 이후락의 부탁으로 바하마로 가서 집 구입 계약을 대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아챈 미 국무성 레이너드 한국과장이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 간의 채널을 통해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결국 영국 정부가 브레이크를 걸어 이후락의 저택
구입 계약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락이 바하마에 집을 사서 정착하려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하마는 은행에 돈을
갖다 넣어도 비밀이 보장되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의 대부호들이 재산도피 장소로 애용하는 곳 중 하나가 바하마 은행이다. 이후락이 바하마에 정착하려 한 것은
그 역시 재산들을 상당 부분 바하마에 도피시켜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형욱에 이어 이후락마저 해외로 도망가자 박정희는 이후락을 다시 귀국시키기 위해 노심초사
한다. 자신의 엄청난 치부들이 폭로될 것을 극도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후락을 설득하기
위해 보낸 밀사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조선일보 외신부의 김아무 기자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잔인
성을 잘 아는 이후락 역시 노심초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서울과 바하마 사이에 몇 차례나
밀사가 오갔다. 최종적으로 이후락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을 확약하는 박정희의 친필 편지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박정희로부터 그것을 받고서야 74년 2월 극비리에 귀국했다.
[워싱턴포스트]가 최초로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74년 당시 정화섭, 이동훈은 모두 뉴저지
의 호화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이동훈. 정화섭이 아직 프레이저청문회에 출두하기 전에 필자는
그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뉴저지의 저택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상대가 상대인만큼 나는 가발을
쓰고 미국 기자를 기사석에 앉혔다. 우선 그 지역 부동산 브로커들을 만나 봤더니 "이동훈, 정화섭이 70년대 초에 모두 현금으로 35만 불을 지불하고 지금 살고 있는 저택을 사들여 깜짝 놀랐다"고
증언했다.
이동훈. 정화섭의 저택 사진을 찍으며 들여다 보니 정화섭의 집안에는 캐딜락, 벤츠 등 자가용만
세 대가 서 있었다.
우리는 집 근처에 잠복했다. 한나절이나 지난 뒤에 마침내 정화섭의 처(이후락의 외동딸)가 아이를 태운 채 차를 몰고 나왔다. 우리는 그녀와 인터뷰하기 위해 그 차를 추격했다. 그러나 우리의 추격을 알아챈 이후락의 딸이 아이까지 자동차 안에 버려 두고 도로변의 대형상가 안으로 피신해 버리는
바람에 인터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73년 이후락 해임 후 박정희의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박정희
는 비밀구좌의 예금주 이름을 모두 박근혜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10.26 이후 전두환이 보안사 요원 5명과 박근혜를 스위스로 보내 그 비밀구좌의 돈을
모두 찾아 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 때 따라갔던 요원 중 한 사람이 미국에 와서 "그 때 수고비로
5만 달러를 받았다"고 발설한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