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9: 14.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 9: 15.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3. 금식 논쟁 ( 9: 14-17. 막 2: 18-22. 눅 5: 33-39 )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 9: 14.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었다. 율법에 의하면, 7월 10일 속죄일은 자기 영혼을 괴롭게 하는 금식일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한 주간에 이틀씩 금식하였다.
1] 그 때에(*, 토테)
앞뒤 상황의 연속성을 나타낸 말로써 마태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2]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마가는 당시 '혹'(some people)이라고 언급했고, 누가는 질문자를 바리새인으로 적고 있다.
* 눅 5: 33 -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금식 문제에 있어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당시 세례 요한은 헤롯의 일로 투옥된 상태였다.
* 마 4: 12 –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이 상황에서 요한의 몇몇 제자들은 자기 스승보다 권위에 찬 메시지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다. 그들은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강력한 증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수했다.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하지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 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3]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7월 10일 속죄일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날, 곧 금식의 날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다.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에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다.
* 눅 18: 12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요한이 메시야의 선구자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기들과 예수의 제자들 간에 율법준수, 특히 금식에 관한 외형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금식 규례는 유대 지방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관습이었다. 당시 요한은 자신이 금식을 폐기시킬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금식의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4]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질문은 요한이 헤롯에 의해 수감 된 이후 찾아와 질문한 내용이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투옥으로 인해 대단히 슬퍼하는 중에도 금식을 준수했던 것 같다.
금식은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선구자요 또 세례를 베푼 자인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다.
5] 금식에 대한 교훈
(1) 금식은 언제 하는가?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어느 때에 금식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무때나 금식하기보다는 금식해야 할 때를 살펴서 금식해야 한다.
① 비통한 일을 당했을 때
금식은 비통한 일을 당할 때 해야 한다. 다윗도 그 아들이 심히 앓자 하나님께 나아가 금식하였다.
* 삼하 12: 16 -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또 국가에 이러한 일이 임했을 때 온 백성 전체가 금식한 예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아하수에로의 치하시 속국인 유다의 모든 민족은 그에 의해 멸절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때 지혜로운 에스더와 그의 분부에 따른 유다 백성 전체는 사흘 밤낮을 금식하였다.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나 또 국가의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금식할 수 있어야 한다.
② 범죄 하였을 때
우리가 범죄했을 경우 특히 금식은 매우 유익하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도 자신들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는 심정으로 금식하였다.
* 느 9: 1-2 – 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회개하는 영이 영혼을 경계하는 금식과 함께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죄 사함받기를 더욱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③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앞두거나 전쟁에서 참패한 후에 하나님의 은총이나 도우심을 기원하면서 금식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베냐민 지파의 싸움에서 패한 후 금식한 예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 삿 20: 26 -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구할 때는 간절한 마음가짐과 함께 금식해야 한다.
(2) 금식의 목적
성도의 금식은 금식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① 회개를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는 목적 중 대부분이 범죄한 후에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함이었다. 즉 그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자백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하였다.
② 기도의 응답을 위하여
그들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고자 하였다.
* 스 8: 21 -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③ 영적 은사를 얻기 위하여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사와 특별한 능력을 얻기 위해 금식하였다.
* 행 13: 2-3 –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④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예수님은 40일간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금식의 힘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
(3) 금식할 때 주의사항
* 사 58: 1-5 –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① 오락을 금하라.
금식 기간에 오락이나 육적 쾌락을 구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오직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금식을 해야 한다.
② 자랑하지 말라.
바리새인은 금식하는 신앙 행위를 일종의 자기 자랑과 겉치레로 삼았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일수록 자신의 경건한 생활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다.
③ 시기, 시비, 투쟁을 피하라.
금식하면서 다툼이나 악한 행실을 일삼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다.
④ 마귀의 시험을 주의하라.
마귀는 인간의 가장 약한 곳만을 찾아 침투하는 동시에 은혜가 강해질수록 그를 시기하여 더욱 집요하게 유혹한다. 그러므로 금식할 때는 우리의 육이나 영이 시험을 받지 않도록 더욱 강건하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한다.
⑤ 몸을 정결하게 하라.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고, 머리를 헝크러트리며, 슬픈 안색을 짓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하는 행색이다. 금식할 때는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몸단장을 정결히 해야 한다.
(4) 금식하는 방법
성도들은 금식 기간에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과 더욱 가까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해야 한다.
* 왕상 8: 28-30, 33-34, 38-39, 44-45, 49, 54-56 – 솔로몬의 기도 – 28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33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38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44 주의 백성이 그들의 적국과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그들이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45 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옵소서. 4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54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일어나 55 서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며 이르되, 56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② 죄를 고백해야 한다.
* 삼상 7: 6 –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③ 마음을 찢어야 한다.
* 욜 2: 12-15 –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④ 울며 애통해야 한다. (욜 2: 12)
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 렘 36: 6 - 너는 들어가서 내가 말한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5)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 사 58: 6-12 –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마 9: 15.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님은 그들에게 결혼 비유로 대답하셨다. 그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고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제자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동안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므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기뻐할 때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준 바 되실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할 것이다.
금식은 특별한 때, 비상한 때에 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 방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 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었다.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丈人)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간 들러리였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로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다.
* 요 3: 29 -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따라서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기뻐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하다. 구약에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다.
* 사 54: 5-6 – 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 사 62: 4-5 – 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 렘 3: 14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 렘 31: 31-32 –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호 2: 16-20 -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야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신약에서도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비유한다.
* 마 25: 1 -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고후 11: 2 -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 엡 5: 22-32 –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가리킨 표현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 신랑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다.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4]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 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다.
또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떤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때는 바로 신랑이 되신 주님을 잃게 될 때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은 그가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준 바 되실 날을 가리킨다. 그때는 금식할 때이다.
금식은 특별한 때, 비상한 시기에 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약 아래서는 더욱 그러하다.
5] 혼인집 신랑
요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하고도 확고한 대답으로써 그 내용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대속죄일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금식하지만, 혼인 잔치 기간만큼은 금식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혼인 잔치가 기쁨의 때요, 즐거움의 때인 까닭이다. 이러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문이 말하는 혼인 잔치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혼인 잔치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율법적인 금식을 논박(論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올바른 금식의 의미를 살펴보자.
(1) 은혜 시대에 대한 교훈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 이는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하면서도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 낡은 율법 시대에 머무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은혜 시대의 기쁨 속에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 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같은 은혜 시대에 살면서도 금식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세례 요한이 율법 시대 사람이요, 그의 종교나 사상이 율법 안에 갇혀 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오늘날도 같은 시대에 살면서 어떤 자들은 낡고 구태의연한 율법 시대에 살고 어떤 사람은 예수의 은혜 시대에 살고 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축복의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시대에 예수님의 초대를 받은 자들임을 믿고 기쁨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2) 예수는 기쁨의 본질이며 근원이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슬퍼하고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샘솟는 기쁨과 강 같은 평화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와 함께 있다고 하는 자체가 기쁨이요 행복이다.
예수를 따르며 예수와 함께 있는 그의 제자들은 바리새인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종교는 예수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즐거운 축제의 종교요 기쁨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은 사명을 잊지 않으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즉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할 자신의 사명을 잠시도 잊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하면서 목표를 향하여 그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계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다.
우리도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으며, 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삶의 목적과 걸어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사명을 분명히 알고 세상의 쾌락이나 유혹에 흔들림 없이 푯대를 향하여 꿋꿋하게 전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4)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을 위한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서 선택된 친구들이다. 그들은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그 기쁨과 축복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랑인 예수님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제자들이 슬퍼한다는 어울리지 않는다.
세례 요한도 요 3: 29에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니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와 친구로서 그와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예수님의 영원한 기쁨을 이웃에게 보여주고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금식을 위한 금식이나 자기를 위한 금식, 혹은 고행적인 금식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금식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는 기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5) 진정한 금식은 예수를 위한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되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만민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의 고난과 슬픔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서 스스로 슬퍼하고 금식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만큼 큰 슬픔은 없으며, 그때야말로 손님이 신랑을 빼앗기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는 금식은 참 금식이 아니며. 그러한 금식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과 슬픔은 잠시 후면 부활의 찬란하고 위대한 영광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하고자 하는 자는 예수의 십자가의 슬픔으로 인하여 스스로 기뻐하며 선택해야 한다.
* 행 26: 23 –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빌 1: 29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딤후 2: 3 –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벧전 4: 13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