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이명철
긴 겨울 한파 몰아치는 날 큰처남이 산악회원들과 산행을 가다 경상도 함양 근방 어디서 쓰러져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두 달 가까이 있을 때 문병을 가지 못했는데. 엊그제 전주예수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진주에 있을 때는 거리도 멀고 면회도 안 된다하여 가지 못하고, 전주로 옮긴 후에는 제한적 문병이 허용된다기에, 처제들과 같이 가는데, 제주에서 막내처제가 오고, 전주 처제는 우리들을 태우고 가기 위하여 차를 운전하고 우리 집으로 왔다.
예수병원에 가서도 바로 면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처남이 치료 중이고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고 해서 처남댁ㆍ처제들과 같이 병원 밖으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퇴원을 언제 할지 모르기에 분위기는 무거웠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인가, 모두 말 수가 부쩍 줄어든 것 같았다.
식사 후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처남댁은 ‘코로나’로 면회가 1회에 한 사람씩만 허용된다며 한사람씩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처제 둘이 먼저 들어갔다 오고, 우리 내외는 두 번째 들어갔다.
조선족 간병인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처남은 손발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바싹 마른 상태로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은 뜨고 있으나 뜬 눈도 초점이 없는 것 같았다.
“고창 고모부 오셨어. 오셨는지 알면 눈 깜박여봐.”라고 여러 번 말하자 조금 깜박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감각 없이 눈만 뜨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처남이 처남댁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니, 식물인간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참으로 답답하였다. 내가 이럴 때 처남댁은 어떤 심정일까. 딱하고 안쓰러웠다.
몸은 정신이 사는 집이라는데, 뇌에서 실핏줄이 터져 정신의 집이 부실하니 꼼짝도 못하는 것인가. 성한 우리들에게 아무 반응을 못하는 걸 오래 지켜보지 못하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았다.
“오빠, 오 서방이 오늘 아침 떠났어.”
불행이 겹쳐 한동안 정신이 몽롱하였다.
며칠 전 여주세종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단 말 들었을 땐 ‘곧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허망 없이 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매제는 응급실 가기 전에는 밖에 나가던 못했어도 방안에서는 걸어 다닐 수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사람 목숨이 이처럼 허망할 수 있단 말인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내 주위에서 하나 둘 떠나가고 있구나ⵈⵈ. 두렵고 서글픈 마음 어디에 둘 수가 없었다.
처갓집을 들려 고창에 왔다. 습관적으로 카톡을 열어보았다.
한때 직장 동료였고, 전북문화관광해설사를 같이 하고, 고창문인협회에서 활동도 같이 한 분이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고 단체 카톡에 부음이 떠있었다.
착잡하다.
‘나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나보구나’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스친다. 가슴이 써늘해 옴을 느낀다. 대지에는 새순 돋아나는 연둣빛 봄이 왔는데, 바람 끝은 겨울처럼 차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숨을 쉬고, 웃음 뒤에 슬픔을 숨기며 나의 생을 이어간다.
며칠 후면 산수유며 매화꽃 피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도 잡혀있다. 가다보면 들판에 노랗게 핀 유채꽃도 볼 것이다. 그리되면 아프고 죽는 일 다 잊고, 산수유 매화꽃밭 거닐며 슬픈 사연들도 다 잊어버린 채 서로의 삶을 축복하며 즐기겠지.
내가 이 세상에 봄나들이 나온 때가 어언 여든한 해. 봄길 따라 발길 옮기며 여름을 거치고 가을을 지나고, 이제 겨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자연의 봄은 춘분(春分)을 지나고 있는데, 인생의 봄은 겨울에 머물러 떠나는 사람들을 전송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해마다 사계절 거치면서 삶의 뿌리를 깊게 내렸고,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와 잎과 꽃들을 위해 지고지순(至高至純)한 마음으로 그 세월 기다리고 보냈었다.
모든 것은 세월을 따라 변해간다.
세상에서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이별해야 하는 법이기에, 나또한 떠나갈 때 기쁨도 슬픔도, 영원히 변치 않는 우주와 자연 속에 묻고, 내 가슴속 우주, 태허의 공간에, 못 다한 사랑의 밀어들을 새겨 두고 가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