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新孝)의 미학
한국효단체 총 연합회 / 대표회장 최기복
효(孝)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부모를 섬김이다. 사전적 의미가 내과는 효를 일컬어 우리들은 유교적 효라고 부르기도 하고 고전적 효라고 하여 신효와 대별되는 개념으로 치부하고 있다. 효에 신효와 수효를 분류하여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그 말이 옳기도 하지만 대답을 한다면 상당한 시간도 요구되고 상대방의 질문 의도도 읽어야 해서 난감할 때가 많다. 유교적인 효의 배경은 봉건사회이다. 봉건사회란 지주가 득세(得勢)하는 시대다 땅이 부(富)의 척도가 되기도 하고 부는 자본주의의 표상으로 소작농과 많은 농노를 거느리며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적 취약점을 시스템으로 하여 이루어진 구도이다.
이 시대의 효를 우리는 공급자와 수요자의 관계로 규정한다면 직계 존비속 간의 주고받는 수급관계이다. 용역의 제공자는 비속이고 수요자는 존속이다. 더불어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간의 관계로도 규정지을 수 있다. 여기에 합당한 가족제도는 대가족 제도이다. 대가족 제도하에 가부장은 절대 권력자로 군림한다. 명령은 추상같고 불호령은 절대적이다. 가장으로부터 쫓겨나면 생계는 물론이요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의 낙인이 찍히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게 된다. 하여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 ‘내 몸의 털 한 개 피부조차 부모로 받은 것이기에 상하게 하면 불효’라는 효경 구절을 통해 생명윤리의 기조를 설파한 것이 좋은 예다.
하여 옛날 효자의 효행 사례란 생명까지도 부모를 위해서 기꺼이 바쳐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한자적 의미의 효란 직계 존비속 간의 관계를 벗어나 노인과 젊은이의 관계로 양적 영역을 넓혔다. 어쩌면 신효의 새로운 아젠다를 제시한 것일 수도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대가족 제도가 붕괴되고 핵가족 제도가 도래하면서 효행의 수급관계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이름하여 신효의 시대를 향한 학문적 노-크가 시작된 것이다.
농노사회에서는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었지만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농노들은 공장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갔고 가장이 아니면 굶주림으로 아사를 면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핵가족 시대가 다시 핵분열을 시작하여 독거 가족 시대를 만들어 냈다. 직장 따라 학교 교육을 이유로 하여 한 지붕 아래서 기거를 함께 할 수 없게 되어 홀로 가족으로 혼자서 생활하는 시대가 독거 가족 시대이다. 혼자라는 이유로 단조롭고 외로운 생활은 반려동물을 불러들이게 되었고 반려동물을 식구 개념으로 하여 부모를 모시는 것보다 더 정성을 들였다. 그 과도한 정성은 고양이나 애완견의 부모를 자처하는 젊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신효의 시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의 영역에 도전장을 낸 컴퓨터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개와 고양이 하고 지내는 것보다 무한대의 지식과 오락이 탑재된 컴퓨터에 눈을 뗄 수 없게 되고 휴대폰을 24시간 움켜쥐고 살게 되면서 사물 인터넷의 시대로 시대 상황이 옮겨졌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컴퓨터 영역은 다시 인공지능을 탑재하게 되고 탑재된 인공지능은 사람 노릇을 대신하게 되면서 효문화는 지리멸렬하게 된 것이다. 한때는 컴퓨터 자판의 키로 대신했던 소통이 명령어를 삽입하면 인공지능이 척척 해결해 주는 시대가 지금 목도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를 우리는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로 명명한다.
효 가족제도는 대가족 – 핵가족 – 나노 가족 – 독거 가족 - 사물인터넷 가족 - 4차 산업 혁명시대의 가족으로 변천해 오면서 효문화의 동반 변경이 시대의 요구상이 되면서 구효(舊孝)를 모른 체할 수는 없지만 효학자나 효행자들도 낡은 세리프를 멈추고 신효를 향한 구애를 시작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효문화란 인류 구원의 생명 문화이고 생명윤리의 극점에 있다. 자아의 발견이 자신의 정체성임을 이제는 교육을 통하여 알려야 하는 시대다. 나이 든 어른들이 내가 효를 받을 나이인데 무슨 효냐고 내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스터한 한학자인데 효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를 묻는 사람들은 시대를 못 읽거나 무식의 꼬리를 달고 다니며 흔들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고전적 효행의 대명사가 살신공양(殺身供養)이었다면 신효의 효행은 나눔과 소통의 시너지다. 고적적 효가 직계 존비속 간에 이루어지는 수직적 종속적 관계였다면 신효는 수평적 호혜적 이어야 한다. 고전적인 효가 수구적 암묵적이었다면 신효는 대중적 선행이어야 한다. 고전적 효가 일방적 희생을 요구했다면 신효는 상호 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쌍방형 나눔의 철학이다. 드려서 즐겁고 받아서 행복해야 한다. 신효에 효행자는 효를 행하면서 선택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심청전에서 심청의 효행은 청사에 남을 수 있지만 신효의 차원에서 보면 불효막심한 행위였다. 효를 받는 심봉사 입장에서 딸의 목숨을 팔아 눈을 떴다면 눈을 뜬 것만으로 행복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승상댁 양녀가 되어 공양미 삼 백석을 시주하고 눈 뜬 아버지와 여생을 행복하게 한다면 현대적인 효행의 선택은 자명해진다. 재벌 아버지에게 효행이랍시고 신형 냉장고를 사드리는 행위가 주는 자도 즐겁고 받는 자도 행복할 수 있을까.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필자가 효학계에 입문하고 나서의 고민은 또 하나 있다. HYO (Hamony of Young & Old)라고 하는 수사이다. 효는 노인과 젊은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유식자와 무식자. 건강한 자와 병약한 자, 그리고 갈등 해소의 명약이 되어야 한다. 남북 간의 갈등, 남녀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정파 간의 갈등, 이념 간의 갈등 등 갈등의 천국 대한민국 신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