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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일운면 어촌의 곽전(藿田)과 홍합전(紅蛤田) 투채(偸採) 행위 보고서⑥>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는 19세기 거제시 일운면 항리(項里, 구조라리), 와현(臥峴, 눌일곶訥逸串), 망치(望峙), 양화(楊花), 왜구(倭仇, 예구) 5개 어촌 마을의 수산업 일터를 대상으로 어촌 주민들의 실상을 담은 각종 문건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문서로는 완문(完文), 등장(等狀), 서목(書目), 등 4건으로 ①「을축년(乙丑, 1865) 항리 등 5개 동(洞)의 완문(完文)」, ②「무진년(戊辰, 1868) 항리망치양화왜구 4동 거민 등장(項里望峙楊花倭仇四洞居民等狀)」, ③「무신년(戊申,1848) 항리(項里) 리임(里任)의 보고서(項里里任書目)」, ④「기사년(1869) 항리망치왜구양화 4동 두민서목(項里望峙倭仇楊花四洞頭民書目)」이다. 순서대로 소개하겠다.
거제시 일운면 항리(項里, 구조라리) 마을은 이웃한 와현(臥峴, 와일곶臥逸串) 망치(望峙) 양화(楊花) 왜구(倭仇, 예구) 등과 함께 5(四)개 동리가 같은 바다를 마주하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생계 활동을 서로 결속하는 특징이 있다. 더욱이 수산업 생계 일터(水業資生處)인 바다를 대상으로 위의 5개 동리는 서로 협동하면서 삶을 영위하였다.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항리(구조라)에 ‘조라포 수군진영’이 있었던 곳이라, 항리(구조라) 마을이 이 5개 마을의 중심지로 지금까지 그 전례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들 동리의 앞바다에 있는 내도(內島) 및 외도(外島)와 공고지와 서이말 등대 해안가는 어촌 마을의 중요 산물인 미역과 홍합의 생산처인 ‘곽전(藿田)’과 ‘홍합전(紅蛤田)’이 산재해 있다. 이곳 마을은 앞바다 수산물 생산처로부터 생산된 바다 산물을 가지고 진상이나 공물로 납부하고 나머지를 생활자원으로 하여 삶을 살아가는 어촌사회였다. 물론 그러한 진상 등의 공물 부담이 과중하였을 것임은 물론이고 그의 이행을 위해서는 동리 간의 협동이 더욱 요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동리의 주민이 생산물을 몰래 채취해 가거나, 자기 동리의 부담을 회피하려 할 경우는 다른 4개 동리가 직접적인 손해와 고통을 전가하게 되는 구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와현(臥峴, 臥逸串) 마을이 곽(藿)과 홍합(紅蛤) 등과 관련한 공전(公錢)의 부담에 제외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항리 등의 4개 동리는 와현도 동일한 부담을 져야할 것과 함께 투채(偸採, 훔쳐 캐다) 등의 혐의가 있는 와현에 대해 그러한 행위가 있을 경우, 그에 대한 징벌적 책임을 무겁게 부담할 것을 완의(完議)하는 상황이 4건의 문건에서 자세히 전개되고 있다. 당시 삶의 대부분을 바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어민들에게 담(擔, 떠맡김)과 첩징(疊徵, 거듭 징수)은 물론, 관사(官司)로부터 가해지는 각종 진상(進上) 및 공전(公錢)을 부담케 만드는 모습은 너무나 가혹(苛酷)하였다.
◉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4건의 문서 내용을 차례대로 간단히 나열하겠다.
먼저 ①첫 번째 「을축년(乙丑, 1865) 항리 등 5개 동(洞)의 완문(完文)」은 5개 마을의 공동 자산인 미역(藿) 채취권과 세금 납부 의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작성한 마을 공동 결정문(完議)다. 국가나 관청에 내야 하는 미역세(藿稅, 현금 35냥과 실물 미역 61단)를 공동으로 채취하고 납부해 왔다. 그래서 공평한 배분을 위해 채취 허가 전까지는 아무도 미역을 딸 수 없도록 엄격히 자원 관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규칙을 어기고 몰래 미역을 따다 걸리면, 마을 전체가 나누어 내던 거액의 세금을 혼자서 영구히 책임지게 하겠다는 매우 강력한 징벌 조항을 완문(完文)에 담았다.
②두 번째 「무진년(戊辰, 1868) 항리망치양화왜구 4동거민 등장(項里望峙楊花倭仇四洞居民等狀)」은 1868년 4월에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항리, 망치리, 양화리, 왜구리의 주민들이 해산물 채취(곽전, 홍합전)와 관련된 세금(공납) 문제에 대해 마을 대표 이임들이 관청 사또에게 올린 행정 청원서다. 이웃 와현리만 다른 4개 마을과 같은 어장을 공유하며 곽전 홍합전 등을 무수히 범채(犯採)하지만, 각양 진상공납은 한 푼도 부담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와현리(臥峴里) 이임(里任)을 엄치(嚴治)한 후에 우리 4개 동이 부담하는 진상(進上)과 각양의 공납(公納)을 균등하게 분담하게 할 것을 청원하고 있다.
③세 번째 「무신년(戊申,1848) 항리(項里) 리임(里任)의 보고서(項里里任書目)」 문건은 조선후기 지방 행정에서 흔히 발생하던 세금 부과의 오류와 그에 따른 민원을 보여준다. 원래 두 마을이 하나였을 때는 동백 열매 '두 말(二斗)'을 냈는데, 마을이 둘로 갈라지면서 각각 '한 말(一斗)'씩 내기로 합의되었다. 이후 항리 마을 이장은 자기 마을 몫인 한 말을 이미 냈다. 그런데 관아의 행정 착오인지, 혹은 예전 관습(두 말 납부)을 그대로 적용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관아에서 이미 낸 세금을 또 내라고 하거나, 과거의 합산 금액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이장은 "이미 낼 것을 다 냈으니, 옛날 장부나 상황을 잘 살펴서 우리 마을 백성들이 억울하게 이중으로 세금을 내지 않게 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④네 번째 「기사년(1869) 항리망치왜구양화 4동 두민서목(項里望峙倭仇楊花四洞頭民書目)」은 1869년 5월 12일에 여러 마을(항리, 망치, 왜구, 양화) 4개 마을의 주민 대표들이 작성한, 조선후기 지방 행정 및 백성들의 공납(貢納) 관련 민원을 담고 있는 상소문이다. 민원의 핵심은 와현 마을 주민들이 내도와 외도에 위치한 미역과 조개 어장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을 몰래 채취 했으니 행정처분을 바란다고 제소했다. 이에 엄히 다스려 처결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 덧붙인 기록(後錄)에 적혀있는 <항리(項里)의 진상 및 공상(供上)> 등의 내용을 살펴보면, 홍합(紅蛤)과 곽(藿, 미역) 항목만으로도 적지 않은 분량을 항리 1개동이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여타의 공전(公錢) 등까지를 고려한다면 어촌사회의 동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징세 부담액이 얼마나 과중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항리(項里) 진상(進上) 홍합 2도5합9석, 상주 진상 홍합 3도4석, 가마련(추가 마련) 진상 홍합 5합5석, 동지사(동짓날 중국 사신) 구청 홍합 7도9합3석, 십동양삭(한겨울 2달) 진상 홍합 4도8합2석, 윤삭(윤달) 진상 홍합 2도5합9석, 춘등(봄철) 공상 홍합 7도, 추등(가을철) 공상 홍합 7(8)도, 장곽대전 1냥, 관청곽 16단, 곽세 7(8)냥 87복” [項里 進上紅蛤二刀五合九夕 尙州 進上紅蛤三刀四夕 加磨鍊 (進上)紅蛤五合五夕 冬至使求請紅蛤七刀九合三夕 十冬兩朔 進上紅蛤四刀八合二夕 潤朔 進上紅蛤二刀五合九夕 春等供上紅蛤七刀 秋等供上紅蛤七(八)刀 長藿代錢 一兩 官廳藿 十六丹 藿稅七(八)兩八十七卜]
○ 이러한 어민들이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 중에 있게 되는 태풍의 내습은 또한 많은 동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그 밖에도 이웃하는 마을들과의 사이에서 관방(關防)을 위한다는 막사건축(幕舍建築)의 책임, 공용선척(公用船隻)의 표박(漂泊)하는 왜선들에 대한 건조(建造) 등과 관련하여 부담하는 지공(支供)과 각종 부역 부담의 조정 등도 구명된다. 그리고 명당(明堂)을 찾아 항리 마을의 원맥처(源脈處)에 이루어진 투장(偸葬)에 대한 대응과, 또 가난을 못 이겨 떠돌이 걸인으로 유랑하는 어촌 사람들의 실상 등에 대해서도 검토가 가능하다.
● 「을축년(乙丑) 항리 등 5개 동(洞)의 완문(完文)」 1865년 5월
이 「완문(完文)」은 을축년(乙丑, 1865) 5월(五月) 日에 작성된 것이다. 완의(完議)의 작성 주체는 항리(項里) 왜구(倭仇) 망치(望峙) 양화(楊花) 와일곶(臥逸串, 臥峴)의 5개 동의 소임(所任, 근무지 책임자)들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문건은 조선시대 어촌 5개 마을(伍洞)에서 주민들이 공동체 자산인 미역(藿) 채취권과 세금 납부 의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작성한 '완의(完議, 마을 공동 결정문)'다. 본디 [항리(項里) 왜구(倭仇) 망치(望峙) 양화(楊花) 와일곶(臥逸串, 臥峴)] 등의 5개 동이 곽세전 35냥(藿稅錢三十伍兩)과 관청곽 61단(官廳藿陸拾壹丹)을 납부하여 왔던 것으로, 곽전(藿田)은 매년 5개동 모두가 미역을 금양(禁養)하여 오다가 서로 합의(發文)를 통하여 곽전에 가서 미역을 채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5개 마을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미역이 주요 경제 자원이었다. 국가나 관청에 내야 하는 미역세(藿稅, 현금 35냥과 실물 미역 61단)를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채취하여 충당해 왔다. 또 미역의 성장을 보호하고 공평한 배분을 위해 채취 허가 전까지는 아무도 미역을 딸 수 없도록 엄격히 자원 관리해 왔다. 만약 이 규칙을 어기고 몰래 미역을 따다 걸리면, 마을 전체가 나누어 내던 거액의 세금을 혼자서 영구히 책임지게 하겠다는 매우 강력한 징벌 조항을 완문(完文)에 담았다. 이 문서는 조선 후기 지방 사회에서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자치를 행하고, 공동의 자원을 관리하며 국가 세금을 어떻게 분담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특히 '완의(完議)'라는 형식을 통해 마을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1) **「을축년(乙丑) 5월, 5개 마을(伍洞) 완문(完文)」**
"이 글은 완의(完議, 마을 합의)를 위한 일입니다. 우리 5개 마을(伍洞)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각종 공납으로 바치는 미역세(藿稅) 돈 35냥과 관청에 바치는 미역 61단을 예로부터 지금까지 관례에 따라 공동으로 채취하여 납부해 왔습니다.
미역밭(藿田)의 경우, 매년 우리 마을에서 일체 채취를 금지하다가 채취 명령이 내려졌을 때 비로소 채취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만약 어느 마을 사이에서 몰래 채취(偷採)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자가 미역세 35냥과 관청 미역 61단을 영원히 전담하여 납부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 문서를 작성하니, 이대로 영구히 준행하도록 하십시오.“ 을축년(乙丑 1865년) 5월(五月). / 관련 담당자 항리(項里) 소임(책임자)은 노업이, 왜구(倭仇) 소임은 김봉현, 망치(望峙) 소임은 김문종, 양화(楊花) 소임은 박점복, 와일곶(臥逸串) 소임은 제득종
[右文爲完議事 惟我伍洞處在海濱 各項供納藿稅錢三十伍兩與官廳藿陸拾壹丹所納是如 自故至今例爲同採 而藿田段每年伍洞一切禁採爲發文採藿之際 某洞間若有偸採之端則 藿稅參拾伍兩與官廳藿陸拾壹丹 永爲擔當之意如是成文爲去乎以此永久遵行事 乙丑(1865)五月 日 / 該參員 項里所任盧業伊 倭仇所任金奉賢 望峙所任金文宗 楊花所任朴占福 臥逸串所任諸得宗]
[주1] 완문(完文) : 관에서 향교, 서원, 결사(結社), 촌락, 개인 등에게 발급하는 문서로, 어떠한 사실의 확인 또는 권리나 특전을 부여하거나 분쟁 예방, 폐단의 광정(匡正) 등을 행정적으로 처리하고 난 뒤에 이를 보장하기 위하여 발급한 일종의 확인 또는 공증(公證) 문서이다.
[주2] 완의(完議) : 마을 합의. 충분히 의논하여 모두가 합의한 내용
[주3] 소임(所任) :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 소규모 단체 따위에서 아래 급의 임원.
[주4] 시여(是如) : 이두어 ─이다. ─이라고. ─이라는. 시여즉(是如則)은 이다즉, ─이라고 한즉. 시여위(是如爲)는 ─이라고 하여.
● 「무진년(戊辰) 항리망치양화왜구 4동거민 등장(項里望峙楊花倭仇四洞居民等狀)」 1868년.
이 등장(等狀)은 1868년(고종 5년, 무진년) 4월에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항리, 망치리, 양화리, 왜구리의 주민들이 해산물 채취(곽전, 홍합전)와 관련된 세금(공납) 문제에 대해 마을 이임들이 관청 사또에게 올린 행정 청원서 또는 진정서다. "와현리 주민들도 우리와 똑같이 앞바다에서 미역과 홍합을 채취해 먹고 사는데, 왜 세금(공납)은 우리 4개 마을만 내야 하느냐"며 세금 부담의 형평성을 요구하였다.
이 지역 4개 마을 주민들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접한 곳에 살며, 앞바다에서 나는 곽(해조류)과 홍합을 채취하여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와현리 주민들은 다른 4개 마을과 같은 어장을 공유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납(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밭농사 짓는 사람이 밭세(전세)를 내고, 어업하는 사람이 어세(수세)를 내는 것은 오랜 관례이므로, 와현리도 다른 4개 마을과 동등하게 공납을 분담하도록 엄중히 처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거제도 어민들의 생활상과 어장 이용권, 그리고 공납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향토사 자료다.
2) **「무진년(戊辰) 항리망치양화왜구 4동거민 등장(項里望峙楊花倭仇四洞居民等狀)」 1868년**
삼가 뜻하는 바를 아룁니다(謹陳所志矣段). 저희 주민들이(矣徒等) 사는 마을은 본래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한 배산임해(背山臨海)한 곳으로서, 내외도(안섬과 밖섬) 앞바다의 미역밭(藿田)과 홍합밭(紅蛤田)은 한 동네가 기르는 것을 금지하고 각각 채취하여, 나라에 바칠 진상품을 다 납부한 뒤에 4개 마을(사동) 주민들이 이 수산업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와현 한 마을 또한 한 포구의 물가에 거주하며 우리 4개 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주민들이 수산업을 하는 곳이 내외도 앞바다를 벗어나지 않으니, 우리와 한 동네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내는 세금을 수없이 범하여 채취하면서도, 각양의 진상 공납은 단돈 1전도 담당하지 않으니 이는 (가까운 사이임에도) 남남처럼 구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근거 없는 마을 백성들이 있겠습니까?
대개 들판에서 농사짓는 자는 전세를 내고, 바다에서 어업하는 자는 수세를 내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는 떳떳한 경전(법도)입니다. 감히 이 4개 마을의 공납 액수를 뒤에 기록하여 붙여서, 연명으로 소리 높여 밝으신 정치의 뜻에 호소하오니, 자세히 살펴보신 뒤에(參商敎是後) 와현리 이임(마을 책임자)을 불러 엄히 다스리시고, 위에서 언급한 진상 및 각양 공납을 우리 4개 마을과 균등하게 분담하도록 엄하게 판결하여 처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관청의)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바랍니다. 사또(使道主) 처분 무진년(1868년) 4월 일. / 항리 이임 강시철, 망치리 이임 이경준, 양화리 이임 최상복, 왜구리(예구리) 이임 이출목.
[右謹陳所志矣段 矣徒等 洞本以居於背山臨海之地 內外島前洋藿田與紅蛤田 一坊禁養 各採 進上當納後 四洞居民以此水業資生是乎所 臥峴一里段置居於一浦之濱 處於四洞之間 其所以居民水業莫不過內外島前洋是乎則無異一洞也 公納之錢蕪數犯採是乎乃 各樣進上公納一分錢不當是乎則此乃楚越也 是豈有無據之洞民乎 蓋耕於野者納其田稅 漁於海者納其水稅 我東流來常經是乎等以 敢此四洞公納數爻後錄帖連齊聲仰訴于明政之意爲去乎 參商敎是後 同臥峴里任時爲嚴治後 上項 進上與各樣公納與四洞均爲分當之意嚴題 處分之地行下爲只爲 行下向敎是事 使道主 處分 戊辰四月 日 / 項里里任 姜時哲 望峙里任 李京準 楊花里任 崔尙卜 倭仇里任 李出木]
[주1] 등장(等狀) :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호소함
[주2] 배산임해(背山臨海) :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바다에 면하여 있음
[주3] 수업자생(水業資生) : 수산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감.
[주4] 시호소(是乎所) : 이두어 ─인 바. ─이온 바. 문장 연결을 위해 이두(吏讀)식 표현. 또 시호내(是乎乃)는 이두어 ‘이오나’, 이나, 이지마는 뜻임.
[주5] 시호등이(是乎等以) : 이두어 ─이온 줄로. ─이온 바로. 문장 연결을 위해 이두(吏讀)식 표현
● 「무신년(戊申, 1848) 항리이임서목(項里里任書目)」
이 서목(書目)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말단 행정 구역인 '리(里)'의 책임자 이임(里任)이 상부 관아에 올린 보고서다. 주요 내용은 마을 분리 후에도 세금이 중복 부과된 것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항리(項里)는 인접하는 동리인 왜구(倭仇, 예구)와 합동(合洞)하였다가 수십 년 전 다시 분동(分洞)하는 등의 사정을 경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 마을이었을 때 동백(冬柏) 두 말(二斗)을 납부했다가 분동하면서, 두 마을이 각각 한 말(一斗)씩 납부하기로 했다. 그런데 올해 우리 항리 마을은 이미 한 말을 납부했는데 거듭 징수(疊徵)하려고 하니 억울하게 되었다. 이에 ”이중으로 세금을 내지 않게 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였다.
3) **「무신년(戊申,1848) 항리(項里) 리임(里任)의 보고서(項里里任書目)」**
본디 우리 마을이 왜구(倭仇) 마을과 합쳐져 있었을 당시에는 동백(冬柏, 동백 열매) 두 말(二斗)을 관례적으로 납부해 왔습니다. 수십 년 전 두 마을이 나누어진 후에는 각 마을이 한 말(一斗)씩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올해 분량인 한 말을 이미 납부하였는데, 이제 와서 다시 (세금을) 매기니 그 곡절을 알지 못하겠습니다(未知委折). 상세히 조사하여 (주민들의 고통을) 침해하지 말아 달라는 이러한 연유의 일(緣由事)로 보고합니다. 무신년(戊申) 1848년 12월 21일 이임(里任)
[項里里任書目 本里與倭仇合洞之時 供上冬柏二斗例納是如可 數十年前分洞之後 各其一斗式分當而本里段今年條一斗已爲當納 到今更抄 未知委折 詳査勿侵之意 緣由事 戊申 十二月二十一日里任]
[주1] 이임 서목(里任 書目) : 마을의 이장(리임)이 관아에 올리는 공식 보고 문서다.
[주2] 항리(項里) : 現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왜구(倭仇)는 現 예구리
[주3] 동백 이두(冬柏 二斗) : 동백나무 열매 두 말. 당시 동백기름은 불을 밝히거나 머릿기름 등으로 쓰였던 중요한 공납물(세금)이었다.
[주4] 시여가(是如可) : 이두어 ─이다가. 시가가(是加可). 문장 연결을 위해 이두(吏讀)식 표현
[주5] 갱초(更抄) : 다시 뽑아서 부과함(중복 징수).
[주6] 미지위절(未知委折) : 그런 상세한 곡절을 모르고서. 위절(委折)은 순조(順調)롭지 아니하게 얽힌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事情)이나 까닭.
[주7] 상사물침(詳査勿侵) : 자세히 조사하여 침해(괴롭힘)하지 말 것.
● 「기사년(1869) 항리망치왜구양화 4동 두민서목(項里望峙倭仇楊花四洞頭民書目)」
이 서목(書目)은 1869년(己巳, 고종 6년) 5월 12일에 여러 마을(항리, 망치, 왜구, 양화, 사동)의 주민 대표들이 작성한, 조선 후기 지방 행정 및 백성들의 공납(貢納) 관련 민원을 담고 있는 상소문 또는 보고서다. 주민 대표들이 제기한 민원의 핵심은 와현 마을 주민들이 내도와 외도에 위치한 미역과 조개 어장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을 몰래 채취했으며, 이에 대한 공납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되어 있었고, 이러한 어장도 국가 세금 징수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는 특정 지역의 자원에 대한 소유권 및 세금 징수 방식(공납)과 관련된 당시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의 애환과 지방 행정의 실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공동 민원임을 알 수 있다. 기사년(己巳, 1869년) 5월20일(五月十二日). / 이러한 민원에 대해 4동의 주민 등(四洞民人等)에게 “이번에 엄히 다스려 처결할 것이니, 당장 잡아 오라(嚴治決處次 捉來)“고 명하고 있다.
4) **기사년(己巳) 「항리망치왜구양화 4동 두민서목(項里望峙倭仇楊花四洞頭民書目)」**
“항리(項里), 망치(望峙), 왜구(倭仇), 양화(楊花), 4동(四洞) 등 여러 마을의 주민 대표(頭民)들이 올린 서목(書目)이다. 내도(內島)와 외도(外島)에 있는 곽합전(藿蛤田), 즉 미역, 조개 등을 채취할 수 있는 어장(漁場)인 '어장 안(良中)'에서, 와현(臥峴) 마을 사람들이 (허가 없이) 몰래 채취(偸採)를 했다. 이는 (몰래 채취한 것에 대한) 공납(公納), 즉 나라에 바치는 세금‧공물 문제와 분납(分納), 즉 세금을 나누어 내는 일에 해당된다. 기사년(1869) 5월12일 4동의 주민 대표 이덕량, 장흥복, 최석권, 정인권 / 제사(題辭) : 이번에 엄히 다스려 처결할 것이니, 당장 잡아 오라
[項里望峙倭仇楊花四洞頭民書目 內外島藿蛤田良中 臥峴之民偸採 公納分納事 己巳五月十二日頭民 李德良 張興福 崔碩權 丁寅權 /題辭 : 嚴治決處次 捉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