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303
■ 1부 황하의 영웅 (303)
제 5권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제37장 첫 출정 (3)
감공 대(帶)가 적적 수장과 함께 강병(强兵) 5천을 동원하여 낙양을 향해 쳐들어온다는 급보에 접한 주양왕(周襄王)은 크게 놀랐다.
그는 급히 군대를 조직하여 적적에 맞섰지만, 왕사군은 보잘것 없었다.
취운산 전투에서 크게 패해 모백(毛伯, 모나라 군주) 위(衛)가 허무하게 전사하고, 주공 기보(忌父)와 원백 관(貫)은 포로가 되었다.
주양왕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모두 잃어버린 셈이었다.
- 왕성을 탈출해야 합니다.
충신 부신(富辰)이 주양왕의 피신을 간했다.
- 우리 주나라와 접경한 나라는 오직 정(鄭)과 진(陳), 위(衛) 세 나라뿐이다.
나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부신이 대답했다.
- 위(衛)와 진(陳)은 약합니다. 정(鄭)나라로 가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렇게 의논하는 사이, 감공 대(帶)가 이끄는 적적군이 왕사군을 격파하고 낙양 교외에 이르렀다.
부신(富辰)이 다시 아뢰었다.
- 사세가 다급합니다.
신이 일족(一族)을 거느리고 적적과 싸우는 동안 왕께서는 성을 탈출하여 정(鄭)나라로 달아나십시오.
그런 후에 각국 제후들에게 밀서를 보내어 근왕토록 명하십시오.
그러면 능히 왕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양왕(周襄王)은 부신의 말에 따라 10여 명의 시종만을 거느리고 낙양을 빠져나가 정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그에 앞서 부신(富辰)은 자신의 일가 친척을 모두 불러모아 무장한 뒤 적적의 병영을 공격했다.
부신(富辰)을 비롯한 그 일족 3백 명은 주양왕의 탈출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 덕분에 주양왕(周襄王)은 무사히 정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신과 그 일족 3백 결사대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장렬한 전사였다.
주양왕이 도망침으로써 감공 대(帶)는 손쉽게 낙양성을 점령했다.
그는 퇴숙과 도자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냉궁에 갇혀 있는 외후(隗后)를 구출하여 왕후로 삼았다.
태후인 혜후는 병을 앓고 있다가 아들 감공 대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심장이 멎어 죽고 말았다.
이제 감공 대(帶)의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낙양 백성들은 사건의 전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감공 대(帶)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민심이 어수선했다.
거리마다 이상한 노래가 불리었다.
아내라는 것이 지난날의 형수라네
신하가 왕후를 아내로 삼았구나.
그래도 부끄럼을 모르니
입에 담기 치사하구나.
누가 저를 쫓아낼까
장차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로다.
감공 대(帶)는 백성들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늘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낙양을 버리고 기내(畿內)의 땅인 온(溫)이란 읍으로 옮겨갔다.
한때 온(溫)은 주왕실의 직할령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적적(赤狄) 세력권 안에 들게 되었다.
지금의 하남성 온현 서남부일대이다.
감공 대(帶)는 온읍에다 궁을 새로 짓고 신하들에게 선언했다.
- 이제부터 이곳이 왕성이다.
한편,
낙양을 탈출한 주양왕(周襄王)은 10여 명의 신료만을 거느리고 정(鄭)나라 땅으로 들어갔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도중에 길을 잃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정나라 영토인 범(氾) 땅.
유달리 대나무가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죽천(竹川)이라고도 불린다.
범(氾) 땅은 정나라 수도인 신정보다도 훨씬 남쪽에 치우쳐 있다.
오히려 초(楚)나라쪽에 가까웠다.
주양왕(周襄王)이 얼마나 정신 없이 달아났었는가를 짐작할 수있다.
주양왕은 범(氾) 땅의 작은 초당 하나를 빌려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죽은 부신의 말대로 제(齊), 송(宋), 정(鄭), 위(衛), 진(陳), 진(秦), 진(晉) 등 각나라 제후들에게 밀사를 보냈다.
내가 덕이 없어 감공 대(帶)에게 낭패를 당하고 이제 정나라 범(氾) 땅에 와 있음을 알리노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도 주양왕(周襄王)을 위해 군대를 보내주질 않는 것이었다.
고작해야 사자를 보내 문안 인사만 올릴 뿐이었다.
정문공(鄭文公) 또한 주양왕의 형편없는 꼬락서니가 통쾌하다는 듯 신하들만 보내어 궁 하나를 지어주었다.
위문공(衛文公) 같은 경우는 아예 문안 사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주양왕(周襄王)으로서는 이만저만 체면이 손상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 짐을 도우라!
새로이 군위에 올라 막 나라의 안정을 찾아가려는 진문공에게도 주양왕의 호소어린 밀서가 당도했다.
"어찌할 것인가?“
진문공(晉文公)은 고민했다.
이제까지 진(晉)나라는 중원 일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
중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여러 적족과 융족들이 가로막고 있기도 하였거니와,
오랜 내란으로 인해 중원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진문공(晉文公)이 즉위함으로써 내란이 겨우 종식되었을 뿐, 중원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막혀 있다.
더욱이 이번 일은 단순히 주왕실과의 문제만이 아니고 적적(赤狄)과의 일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헌공 때 증강시켜 놓은 군사력도 진혜공, 진회공 대를 거치면서 많이 약화되었다.
과연 지금의 진(晉)나라 병력으로 적적을 이길 수 있을까?
진문공(晉文公)은 자신이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국내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 등을 들어 진문공은 불참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중 특히 호언(狐偃)은 목에서 피를 토할 정도도 강한 어조로 진문공(晉文公)의 참여를 주창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
"무슨 기회라는 말이오?“
"패자(覇者)가 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지난날 제환공이 천하 제후를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주왕실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진(晉)은 그동안 수차례 임금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임금이 자주 바뀌는 것을 예사로 알고 있다.
이는 대의(大義)의 상실이다.
아무리 이름뿐인 천자라고는 하지만 이러할 때 진문공(晉文公)이 정나라 땅에 피신해 있는 주양왕(周襄王)을 천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준다면,
이는 백성들에게 하늘에 해가 둘이 없음을 철저히 인식시켜 주는 것이요,
정의를 수행하는 일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번 거사는 주문왕(周文王)의 업(業)을 계승하는 것이다.
또한 주무왕(周武王)의 공을 다시 정립하는 것이다.
"만일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공께선 주왕실의 빈 자리를 보충하고 천자의 환난을 극복하고, 교화를 성취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찌 청사(靑史)에 드리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진(晉)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느냐, 못 하느냐는 이 한 번 거사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공은 의심하지 마시고 군사를 일으키십시오."
호언(狐偃)은 이번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 19년의 유랑생활. 단순히 중이를 임금 자리에 올리기 위해 그런 고생을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기어코 우리 주공을 천하의 패자(覇者)로 올리리라!
호언의 비원(悲願)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문공(晉文公)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국내 문제였다.
아직 진(晉)나라 내부는 안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제 막 극예와 여이생의 반란을 진압했을 뿐이었다.
또 다른 모반이 언제 발생할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를 모아 출전하는 것이 과연 옳은일 일까.
진문공(晉文公)은 고민하다가 태복 곽언(郭偃)을 불러 부탁했다.
"주왕실을 돕고자 하오.
길한지 흉한지 점을 쳐주시오.“
곽언은 복(卜)으로 점을 쳤다. 거북점이다.
"점괘가 크게 길합니다."
그래도 진문공(晉文公)은 마음이 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초점을 쳐보오.“
곽언(郭偃)은 산가지로도 점을 쳐 보았다.
점괘는 역시 대길(大吉)이었다.
"해가 하늘에 솟아 일체 만물을 비춥니다.
그리고 그 은택은 우리 진(晉)나라에 조림(照臨)합니다.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썹이 하얗게 센 곽언(郭偃)은 깊은 눈길로 진문공을 바라보았다.
신뢰와 희망이 담긴 눈동자였다.
비로소 진문공(晉文公)은 마음을 정했다.
"좋소.
근왕군을 일으켜 주양왕을 왕성으로 모시도록 하겠소."
강성은 다시 바빴다.
전운이 감돌았다.
진문공(晉文公)도, 신하들도, 병사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진문공이 패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