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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향 예술감독인 정명훈의 연봉이 과다하다는 논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네요.
정명훈 감독이 과대평가되어 있다는 몇몇 사람의 주장까지 나오면서 이에 대하여 서울 시향 상임 작곡가인 진은숙씨는 31일 장문의 자필로 "지휘자 정명훈에 대한 비난과 서울시향의 음악적 성과에 대한 폄하는 나를 향한 화살"이라며 "이것이 내가 이번 논란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이유"라고 반박의 글을 올렸습니다.
2011년 11월 18일 허환주 기자가 프레시안에 내놓은 기사를 기점으로 수 주 동안 계속된 지휘자 정명훈과 서울시향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나의 의견을 이 지면을 통해 표명하고자 한다. 사태가 많이 진정된 현재 이런 글은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동안 일단 사태를 관조하겠다는 서울시향의 경영진의 결정을 존중해 이제야 발표하게 되었다.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첫 부분은 서울시향의 활동과 지휘자 정명훈, 그리고 나의 역할에 대해서이고 두 번째 부분은 논란이 지속된 기간 중 인터넷에서 접했던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해서이다. 행정에 관한 것은 내 소관이 아니고, 문제를 제기한 글들에서의 잘못된 주장에 대한 반박은 벌써 좋은 글들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는 생략한다. 이 글은 나의 아주 주관적인 생각을 담고 있고 군데군데 한국말 표현이 부드럽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한다.
I.
서울시향과 정명훈의 만남
나는 내 인생 절반 이상을 독일에 체류해오고 있다. 말하자면 해외동포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한다. 나는 한국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사람을 이편 저편으로 가를 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이 글에서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모든 한국 사람(이번 논란을 제기한 사람들까지)들을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을 떠난지 20여년만에 지휘자 정명훈의 제의로 서울시향에 영입되어 2006년부터 아르스 노바 시리즈를 책임지고 있다. 그 제의를 받아들인 첫번째 이유는 지휘자 정명훈에 대한 나의 존경심 때문이었다. (그가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후 첫 내한 공연을 할 때 나는 리허설을 보기 위해 이리저리 쫓겨다니다 창문에 귀를 대고 잠깐 훔쳐들은 그의 피아노 소리를 마음에 담아가던 꼬마였다.)
두번째 이유는 서울시향이 법인화되어 여태껏 한국에는 없었던 시스템으로 새출발하는 단체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시향과 지휘자 정명훈의 결합은 더 바랄 것 없는 최상의 만남이라 생각한다. 정명훈이 아무리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이렇게 자기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투사할 만한 오케스트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울시향도 정명훈같은 지휘자가 한국에 없었다면 2005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음악적 성과와 발전을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지금 현재 정명훈과 서울시향과 같은 시대에 살며, 그들의 음악적 성과를 지켜보며 그것을 발전시키는 데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엄청난 나의 행운이라 생각한다. 내가 예브게니 키신과 같은 세대에 태어나 그의 실연을 들을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1971년 별세한 스트라빈스키와 약 10년간 이 지구상에서 같은 공기를 숨쉬고 같은 달과 별을 바라보며 존재했다는 사실을 경이스럽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2006년 서울시향에 영입된 후 지금까지 7년간 나는 서울시향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봐왔다. 사실 일반청중들은 연주회라는 표면적 결과물만 보게 된다. 그 뒤에 숨겨진 지휘자, 연주자들, 그리고 스태프들의 노고와, 어떤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하나하나의 연주회가 청중들에게 선사되는지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비단 연주회뿐만이 아니라 서울시향이라는 단체가 어떤 노고를 통해, 어떤 장애물을 헤치며 존재하며 발전해 나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서울시향 연주회만큼 공력과 애정이 응축되어 있는 연주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상임지휘자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은 차치하고라도 단원들과 경영진의 숨은 노고도 만만치 않다.
연주회 하나가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문제들과 위급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그런 것들에 경영진은 최고의 전문성으로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 단원들은 엄청난 양의 곡을 공부해야 하고 빡빡한 리허설과 연주회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나는 실제로 아르스 노바 연주회 리허설 기간 중 연주자들이 스스로 자정까지 남아서 연습하고, 심지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연습하기 위해 집에 안 가고 연습실에서 취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서울시향은 불과 7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국내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성장했고 국제적 무대에서도 괄목할 만한 상대로 부상하고 있다.
그들의 음악적 성과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지만, 단순히 내 자신의 작품을 2006년에 연주했을 때와 2010년에 했을 때만 비교해봐도 서울시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성장해오고 있는지 내 귀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재단법인화 초기에는 어느 누구도 이런 속도로의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서울시향의 이런 음악적 발전은 여기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최상의 산물이다. 앞으로 더 발전하고 견고해질 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서울시향은 과도기를 겪고 있고, 언젠가는 모든 것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긴 역사를 가진 서양의 오케스트라같이 운영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고 행정에 무지한 채 하는 제안은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온 모든 것은 무너질 수 있다. 그 제안이 소위 ‘민주주의’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고 ‘애정어린 조언’으로 가장되어 있을 때 그 위험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나는 서울시향과 지휘자 정명훈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한 식구이며, 내가 하는 일도 그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논란이 내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휘자 정명훈에 대한 비난과 서울시향의 음악적 성과에 대한 폄하는 나를 향한 화살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이번 논란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이유이다.
한국에 서양음악이 도입된 지 100여년, 오케스트라가 생긴 지 50여년 동안 많은 음악적 사건들이 벌어졌다. 서울시향의 재단법인화와 지휘자 정명훈의 영입,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성장은 한국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열린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한다. 서울시향의 발전은 대한민국 안의 다른 문화단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사실 나는 다른 오케스트라들이 서울시향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상임작곡가 제도와 현대음악 연주회를 시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런 총체적인 현상은 국가 차원에서 문화의 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기여해, 정부에게 한국의 문화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정책적으로 더 많은 노력과 지원을 하게 할 것이다.
서울시향을 비롯해 국제적인 수준의 오케스트라가 여러 개 생기고, 전통음악에도 더 많은 지원이 가고, 수준 있는 오페라 프로덕션이 쏟아져나오고, 다양한 음악이 연주되는 영향력 있는 페스티벌이 열리고, 능력있는 한국 음악가들이 외국에서 표류하지 않고 국내에 정착해 활동하는 나라. 이것이 대한민국 미래에 대한 나의 꿈이다. 그리고 서울시향이 게속 발전해 나간다면 이런 미래는 꼭 오리라 확신한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 / 서울시향 투어와 DG계약
오래전 독일의 유력 주간지에서 반기문 UN 사무총장에 대해 ‘이 개성없는 nobody가 취임하자마자 나는 벌써 코피 아난을 그리워하고 있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 당시 반 총장은 취임한지 얼마 안되었고 뭘 잘하지도 잘못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몇년전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탔을 때 독일 신문들은 상을 탄 다른 영화배우들의 화보로 장식되었지만 전도연의 사진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보는 신문에는 누가 주연상을 받았다는 얘기도 언급되지 않았다. 베를린의 한 유명한 지휘자는 몇년전까지만 해도 아시아 투어 때 왜 중국과 일본에 가면서 한국은 안 들르느냐는 질문에 항상 “꼭 그래야 돼? (Muss es
sein?)”하고 물었다 한다.
내가 2007년 바이에른 주립 오페라에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초연했을 때 많은 신문들이 그 기사를 다뤘다. 뮌헨의 한 지방신문에 나온 기사의 제목은 ‘한국산 들토끼’.
나는 절대로 위의 에피소드를 통해 서양사람들이 우리를 인종적으로 차별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도 내가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겪는다라는 피해의식에 절어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지난 20-30년간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많이 높아졌다. 하지만 나는 유럽에 살면서 아직도 이들에겐 우리의 존재가 너무 멀고 먼 곳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는 경우가 간혹 있다. 특히 음악계에서는 더하다. 바흐와 베토벤의 후손으로서 이방인의 실력을 서슴지않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음악계에도 세상이 돌아가는 메커니즘이 있다.
성공도가 꼭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실제로 나는 우리 출판사와 계약한 후 내가 미국인, 유럽인이나 유태인이 아니기 때문에 (게다가 중국인, 일본인도 아니다) 나를 홍보하는 것이 많이 힘들다는 얘기를 여러번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출신 음악가들은 국제 무대에서 활동할 때 자국에서 많은 지원을 받는 소위 선진국 출신 음악가들과 맨몸으로 맞서 경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올라가고 비슷하게 인정받으려면 5배, 10배로 더 노력하고 잘해야 한다. 한국사람이라는 것에는 보너스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활동하는 한국의 음악가들은 다 순수하게 그들의 실력만을 통해 그 위치를 확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계 음악계의 메커니즘을 지배하는 것은 각 나라의 문화의 힘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찬란한 문화예술의 전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가 차원에서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더 깊이 인식하고 예술가들과 예술단체들을 지원해 그들이 국제무대에 진출해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게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향이 국제적 무대에서
올리고 있는 음악적 성과는 국가 차원에서 꼭 주시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 생각한다. 한 개인이 잘하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느껴지지만, 한 오케스트라가 잘하는 것은 국가의 힘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2010년에 있었던 서울시향의 첫 유럽 투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베를린을 거치느냐 아니냐는 이슈를 놓고 내부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모든 음악하는 사람들에게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너무 중요하고 또 동시에 두려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베를린을 꼭 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 도시에서 살면서 얼마나 많은 명성있는 음악가들이 어떤 식으로 청중과 언론으로부터 매를 맞고 갔는지 봐왔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거침없이 얘기하고 무엇을 평가할 때 철저하게 비판적이다. 듣기 좋은 수식어를 남발하지 않고, 쉽게 감동하지 않으며, 아무리 좋은 것을 봐도 항상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아무리 유명한 대가일지라도 연주가 마음에 안 들면 야유가 쏟아진다. 피아니스트 랑랑에는 ‘당장 피아노 선생을 찾아 레슨 좀 받고와라’라는 선고가 내려지고, 다니엘 바렌보임에 대해서는 ‘그가 연주하는 포르티시모는 고통스럽다’라고 외친다. 작곡가 슈니트케의 오페라 초연 후에는 ‘당신은 이제 작곡가로서의 생명이 끝났으니 왕좌에서 내려오라’라는 평이 실렸다.
2010년 6월 2일 서울시향의 베를린 연주날 콘체르트하우스의 매표소 앞은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쉽게 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편안하게 생각하고 온 많은 사람들이 ‘이게 웬 난리냐. 이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유명해?’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다. 그날 연주회장은 베를린 음악계에서 일하는 중요인사들을 대거 포함한 청중들로 꽉 채워졌고, 그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낀 단원들은 어느 연주때보다도 더 숨막히는 긴장감을 느꼈다 한다. 베를린 청중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수준높은 연주를 듣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다. 그래서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날 서울시향과 지휘자 정명훈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열정적인 연주는 단순히 수준높은 연주의 차원을 넘어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고 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을 선사했다.
내가 잘 아는 한 음악계 관계자는 “서울시향은 까만 머리의 젊은 동양인들로 채워져 있어 마치 동양인 학생 비율이 많은 독일의 한 음대 학생 오케스트라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정말 대단한 연주였다’ ‘믿을 수 없다’ ‘거의 마법과 같이 홀리는 힘이 있었다’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경탄할 때, 악평을 쓰기로 유명한 한 평론가가 기립박수를 하는 것을 봤을 때, 내 동료 작곡가들이 ‘이런 오케스트라와 같이 일을 하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운 시선을 보낼 때 나는 유럽 생활 25년만에 처음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서울시향의 이런 음악적 성과는 2011년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독일 연주에서도 이어진다. 불과 2년동안만의 투어를 통해 서울시향은 유럽에서 국제적 오케스트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는 오케스트라로 부각되었고, 유럽음악계에 무시할 수 없는 경쟁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 투어뿐만 아니라 서울시향의 도이치그라모폰과의 계약도 유럽 음악계에서는 큰 이슈거리가 되고 있다. 음반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정상급 오케스트라들과 유명한 거장들조차도 주요 레이블에서 쫓겨나는 판국에 생긴 지 얼마 안되는 서울시향이 최초의 동양 오케스트라로서 5년이라는 장기간 계약을 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나는 실제로 독일에서 음악인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서울시향의 DG계약건을 언급하자마자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같이 싸늘해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유럽 내에서 어디를 가나 DG계약건은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서울시향은 그들의 경탄과 부러움과 시기심의 대상이 됐다.
서울시향이 국제적 무대에 서면 누구를 대변하는 것인가 생각해보자. 어느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정당을 대변하는가? 아니면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가?
7년이라는 짧은 역사 안에서 서울시향과 정명훈은 그들의 예술적 성과를 통해 이렇게 국제적인 무대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벌써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꼭 우리가 열심히 해서 서양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상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동안 작곡가로서 많은 작품을 써왔다. 나는 내가 쓴 작품 중 어느 곡에 대해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시향과 정명훈의 예술적 성과에 나는 최고의 존경심을 보내고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나는 내 작품에 대해 악평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억지주장과 거짓논리로 이번 논란의 불씨를 던진 사람들의 이름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서울시향과 정명훈의 음악을 통해 경험한 그 잊을 수 없는 순간들 때문이다.
내가 보는 지휘자 정명훈
지휘자 정명훈이 세계적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이 일어났다. 유감스럽게도 ‘아니다’라며 이 논쟁의 불씨를 던진 쪽에서는 그것에 대해 전혀 구체적인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그저 ‘세계적’이라는 수식어의 단어 분석을 하는 것에 그쳤다. 나도 ‘세계적’ ‘한국 최초’ ‘유일한~’ 등등의 수식어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담겨져 있지 않은 피상적인 단어로 쓰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대체로 ‘국제적 명성이 있는’이라고 표현한다.)
누가 노래를 잘하냐 못하냐는 굳이 음악을 몰라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기악을 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가늠하는 데에는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지만 들어보면 대충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한 현대 작곡가가 좋은 작곡가인지 아닌지는 거의 아무도 모르고, 지휘자에 대한 평가도 이와 비슷하게 어려운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휘라는 것은 그저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드는 행위이다. 지휘를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전공자들이 너도 나도 지휘를 한다. 그래서 지휘계만큼 수준의 폭이 넓은 데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부터 거장까지 다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도 아마추어가 꽤 있다.) 진정한 의미의 지휘자, 즉 한 작품에 대한 총체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미세한 손짓 하나에도 음악적 메시지를 담아 연주자들에게 전달해 그들로부터 음악을 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극도로 드물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한 지휘자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서 항상 외적인 잣대가 필요하다. 어느 오케스트라의 상임이냐, 음반을 어느 레이블과 얼마만큼 냈느냐, 대중들에게 얼마나 알려져 있느냐, 연봉이 얼마냐 등이 잣대로 사용된다. 누가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상임이면 그에게는 자동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지휘자로서의 능력이 부여된다.
내가 정명훈의 지휘를 처음 것은 1983년 대학생 때였다. 그는 당시 서울시향(?)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피아노 서혜경)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를 연주했다. 나는 물론 너무 좋은 음악회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었기 그의 지휘자로서의 능력에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와 같이 동행했던, 당시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였던 발터 길레센 씨는 연주회 후에 흥분을 하며 너무나 대단한 지휘자라며 감탄사를 연발했고, 나는 그저 막연하게 감동했다.
그의 실연을 다시 보게 된 것은 1998년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그가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베토벤 3중협주곡, 그리고 멘델스존 교향곡 3번을 연주했을 때였다. 유럽에 살면서 많은 연주를 봤지만 처음으로 음악이 연주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지휘자로부터 나오는 경이로운 현상을 경험했고, 그날 들었던 멘델스존 교향곡의 완성도 높은 해석과 아름다움은 그 이후 여태껏 단
한번도 다시 경험한 적이 없다.
그후 2006년 서울시향에서 일하게 된 후에 여러 연주회를 통해 나는 지휘자 정명훈의 세계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특히 유럽 투어를 위해 내 작품을 놓고 같이 작업을 했던 것이 그가 지휘자로서 어떤 차원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 음악가의 능력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 자신이 얼마만큼 음악적 역량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면 일반 청중들은 그저 잘친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피아노를 치는 사람들은 더 자세하게 평가할 수 있고, 그 곡을 직접 쳐본 사람들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분야든지 같이 자기 영역을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세계가 따로 있다.
나는 이번 논란이 진행되는 동안 정명훈의 영상과 음반을 집중적으로 듣고 공부했다. 물론 그가 어떤 역량을 가진 지휘자라는 것을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좀 더 그의 세계에 다가가 여태껏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더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평생 음악을 해온 나도 그의 진가를 알기 위해 이렇게 먼 길을 오는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같이 일하니까 아주 친할 것이라 상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서울에 같은 기간 동안 체류하는 것도 드물고, 그렇다 하더라도 자주 얼굴을 보는 적이 없다.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는 사이라 할 수 있다. 만나서 대화를 해본 것도 손꼽을 정도이고 전화통화를 한 적도 딱 한번밖에 없다. 이 글에 들어있는 정명훈에 대한 나의 생각들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 인지한 것들이다.
나는 음악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판적이며 까칠하다. 외적인 잣대가 아니라 내 귀로 판단하며, 아무거나 보고 감동하지 않는다. 나에게 지휘자 정명훈은, 그가 베를린 필과 뉴욕 필의 상임이 아니라도, 굳이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수석객원지휘자가 아니고 콘세르트헤바우와 내한 공연을 안한다 하더라도 세계 최정상급의 지휘자이다. (그런 사람이 게다가 한국사람이기까지 한다.) 물론 그는 예전부터 국제적 명성이 있었고 근래 몇년동안 더욱 부상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가 국내에서, 국외에서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친분이 있는 많은 젊은 세대 지휘자들(이들도 엄청나게 커리어를 쌓는 사람들이다)이 정명훈에 대해 경탄하며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지휘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왜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그런 평가를 내릴까?
한국에 서양음악이 도입된 지 100여년 동안 국제적 무대에서 활동하는 굵직한 음악인들이 여럿 배출되었다. 그들이 몇 명인지 열 손가락으로 꼽아보자. 그리고 그 중에 지휘자가 몇 명인지, 그런 지휘자가 몇 년에 한 명씩 배출되었는지 생각해보자.
나는 작곡가로서 시간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내 사후에 내 작품이 좋은 것이면 살아남을 것이고 아니면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지휘자는 살아있을 때 지휘를 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작곡가 진은숙보다 지휘자 정명훈이 지금 대한민국에 더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그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아르스 노바
나는 서울시향에서 상임작곡가로 있으며 아르스 노바 연주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연주회 자체는 나의 활동 중 표면에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고 더 본질적인 것은 젊은 작곡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마스터클래스이다.
마스터클래스에서는 매번 약 20명 정도의 선발된 학생들이 개인레슨을 받을 수 있고, 그 중에 선발된 학생들은 자신의 작품을 서울시향의 리허설을 통해 들어볼 수 있다. 그렇게 몇년간 공부한 학생들 중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은 작품위촉을 받아 신작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더 나아가서 나는 이 학생들이 다른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기회가 되는 한 이들을 국내, 국외의 유수
앙상블과 페스티벌에 소개하고 있다. 작년 통영 국제음악제에서 4명의 학생이 신작을 발표했고, 올해 9월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글랑슈푸렌 음악제에서도 3명의 학생이 위촉작품을 초연하게 됐다. 약 2주전 파리에서 있었던 앙상블 앵태르콩탕포랭의 연주회에서 작품 초연의 기회를 가졌던 김택수도 서울시향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배출된 작곡가이다. 이런 기회들은 이 학생들이 그
해당국가에서 아무리 오래 유학을 한다하더라도 얻기 힘든 기회들이다.
나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동안 항상 가졌던 의문이 있었다.
소위 선진국 출신들은 자국에서 공부하고 정착해 활동하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젊은 작곡가들은 대학 졸업 후 의무적으로 유학을 나가고, 그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갈망하며 고달픈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이들 대다수에게 아직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들어오기 두려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직접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 창작계의 외국유학 의존도를 낮추고 한국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국내에서 그들이 외국에서 얻지 못하는 기회를 제공해 유능한 인재를 키우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을 발판으로 해 국제적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연주계에서는 벌써 소위 ‘국내파’ 연주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창작계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젊은 작곡가가 독일이나 프랑스로 유학을 가 10년, 15년 공부한 후 어렵게 하늘의 별을 따는 것같이 앙상블 모데른이나 앵테르콩탕포랭에서 연주되는 것과, 국내에서만 공부한 사람이 유학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 앙상블에서 연주되는 것으로 자기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은 완전히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울시향에서 해주는 작품 리허설도 마찬가지이다. 베를린이나 파리에서 아무리 오래 유학을 해도 젊은 한국 작곡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나 불란서 국립 오케스트라를 통해 들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서울시향이 그들의 작품을 연주해 들려준다. (단원들이 쉬는 날에도 이 리허설을 위해 일부러 나오기도 한다.) 이것이 젊은 작곡가들에게 얼마나 큰 자부심을 선사하느냐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생각한다.
나는 이제 더이상 이런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지금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내가 부러워하던 것들과 동경했던 것들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프로젝트는 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남의 작품을 연주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내 음악이 설 땅도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활동이 내 개인의 활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서울시향과 서울시의 활동이다.
외국에 있는 학생들이 마스터클래스에 신청하면 외국에서 레슨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 내가 인천공항에 가는 차 안에서, LA의 한 호텔 로비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한 카페에서, 파리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레슨을 해도, 내 개인 돈으로 작품 위촉을 해도, 이 모든 것이 내 개인의 활동이 아니고 서울시향과 서울시의 사업이라 생각한다.
정명훈과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나와 친분이 있는 지휘자 켄트 나가노 씨는 항상 나를 만나면 정명훈에게 자기 오케스트라인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와서 좀 지휘해달라 말하라고 부탁한다. 여러번 초청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한다. 영국의 한 일간지에선 얼마전 지휘자 정명훈은 왜 영국에 더 자주 안 오는가 하는 기사가 났었다. 그는 국제적으로 끊임없이 부상하고 있고 많은 곳에서 초청이 쇄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부른다고 해서 다 가지 않는다.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꺼려하지만 나도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여러가지 제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의 활동은 철저하게 서울시향으로만 국한시키고 있다. 서울시향에서 하는 활동은 나에게 많은 시간을 빼앗아 갔다. 2006년 활동을 시작한 이후 시간이 없어서 들어오는 작품 위촉을 거절하고, 첼로 협주곡의 초연도 2년이나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난번 투어 때 잠시 지휘자 정명훈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베를린 필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하면 물론 좋지만 서울시향을 지휘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잘하는 오케스트라보다는 자신이 키우면서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오케스트라에서 훨씬 더 큰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서울시향 일 외에 런던에 있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현대음악 시리즈의 음악감독직을 맡고 있다. 모든 시스템이 너무 잘 갖추어져 있어 지루할 정도로 일하는 것이 쉽다.
정명훈 지휘자와 나는 외국에 있는 다른 오케스트라들을 위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서울시향보다 더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더 명성을 얻을 수도 있고 더 높은 연봉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가 이렇게 서울시향에 매달리는 것일까?
나는 ‘사명감’이라는 상투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이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사이언스 픽션에 나오는 무의미한 단어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일한다 할지라도 지금 우리가 서울시햐엥서 느끼는 성취감과 애정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지난 7년간의 서울시향이 이루어온 발전과 음악적 성과는 세계 어디에서도 반복되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II.
다음의 글들은 이번 논란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넷에서 거론되었던 여러가지 이슈에 대한 나의 의견들이다. 난생 처음 들어가본 한국 인터넷은 나에게 마치 열어봐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억지주장과 인신공격, 오만가지 비방과 욕설에, 심지어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나간 사건의 망령까지 다시 살아나 그 안에서 춤추고 있었다. 나는 이 세계를 모르고 살았던 나의 이전 삶이 그립다.
서울시향의 정체성
서울시향 내에 외국인 연주자가 15%를 차지한다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 지구상에 있는 준 선진국 이상의 국가에 있는 오케스트라에는 정규단원이든 아니든 외국인 연주자들이 들어가 있다. 오케스트라를 발전시키는 데에 비음악적인 각도에서 나온 ‘순혈주의’ 정책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외국의 유수 오케스트라에 한국 연주자들이 많이 들어가있지만 그 오케스트라가 그것 때문에 한국 오케스트라가 되지 않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한 오케스트라의 정체성은 그 오케스트라가 있는 나라와 도시에 의해 정의된다.
지난 2010년 서울시향의 유럽 투어 중 유럽 청중들은 당연히 한국 단원들 사이사이에 끼어앉은 외국인 단원들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한국 오케스트라’에 대해 열광했고 찬사를 보냈다. 그들에게는 서양 연주자들이 같이 연주를 해도 서울시향은 한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한국의 오케스트라’이다. 외국에서도 인정한 이런 명백한 서울시향의 정체성을 왜 우리
스스로가 부정해야만 하는가?
논란은 계속된다.
이 연주자들이 다 정명훈 밑에서 일하러 왔기 때문에 그가 여기를 떠나면 서울시향은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이다. 그런 현상을 설명하려면 서울시향보다는 대한민국 음악계의 판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는 음악인구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지만 주로 주요 악기에 편중되어있다.
누구든지 멋있는 솔로악기인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하고 싶어한다. 근래 들어 다른 현악기나 관악기, 타악기 쪽으로 많이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 층이 두텁다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악기들이 골고루 들어가 있는 오케스트라라는 단체를 한국 사람들로만 채우는 것이 힘들다. 물론 현재 주요 악기 외의 다른 악기의 좋은 연주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더욱 더 많은 트롬본의 명인, 호른의 명인, 타악기의 명인들이 나와야 한다.
또 한가지는 많은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솔로 커리어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한 오케스트라가 국제적 경쟁력이 있으려면 웬만한 솔로이스트 뺨치는 실력이 있는 연주자들이 다수 들어와 있어야 한다. (현재 서울시향에 이런 연주자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려면 음악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실내악이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의 가치를 높게
인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량 있는 한국 음악가들이 국내에 정착해 활동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한가지 이유는 서울시향이 법인화되어 새출발한 지 7년밖에 안된, 아직 과도기에 있는 단체라는 것이다. 조직의 시스템이 개선되고 실력이 향상되어 견고하고 튼튼한 단체가 되려면 아직 많은 노력과 지원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만일 지휘자 정명훈이 떠나면 서울시향이 흔들릴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서 ‘큰일이다’라는 결론보다는 ‘그래서 이 사람이 지금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려보자.
고매한 인격을 담은 C장조의 화음과 정치적 올바름으로 연주되는 파사칼리아의 주제는 어떻게 들릴까?
이번 논란 중 인터넷 상으로 많이 논의된 것이 예술가의 인간성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사실 이런 식의 논쟁이 지휘자 정명훈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이런 논쟁은 그의 인간성과 정치적 행보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논란을 제기한 사람들이 그것의 증거로 내놓은 팩트들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나는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국내외의 ‘공인’들을 상대할 기회가 많았다. 내 눈에 그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자기 생각을 꾸미지 않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사람과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다. (지휘자 정명훈은 아마 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전자는 남들이 자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아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후자는 항상 고도의 ‘전문성’으로 사람들을 대해 좋은 인상을 주고, 상대방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어떤 상황에서도 ‘옳은 말’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을 위해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는 경우도 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을 대하는 것은 일종의 ‘테크닉’이다. 이 두 부류 중 누가
더 인간성이 좋고 인격이 고매한지 판단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역사적으로 훌륭하다고 여기는 인물들이 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을까?
바그너가 착한 사람?
쇤베르크의 인간성이 따뜻해?
카라얀은?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내가 틸레만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를 들을 때 그의 인간성은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그 사람을 친구로 삼을 생각도, 데리고 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훌륭한 연주를 한 음악가가 연주 후 악기를 놓는 순간 개로 변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런 현상은 현기증 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인간에 대한 평가와 음악에 대한 평가는 철저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추상적인 것이고 선악과는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음악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러시아의 한 유명한 지휘자와 미국의 한 유명한 지휘자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질렀다. 전자는 법의 처벌을 받고 있고, 후자는 막강한 변호사팀을 고용해 자신의 범죄가 바깥 세상에 회자되는 것을 막고 있다. 범죄자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처벌은 법으로 할 수 없다. 이것은 각 개인이 그 두 가지를 저울로 재서 판단할 문제이다. 나는 위 두 지휘자의 음악을 안 듣는다. 그들의 음악이 그들이 저지런 범죄를 용서하면서까지 들어야 될만큼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술가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한 예술가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총과 칼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를 등에 업고 자기 커리어를 쌓으며 인명 살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정도가 아니라면, 최소한 그 사람이 특정 정당의 홍보대사로 나서서 그 당의 이데올로기를 전도하며 자신과 정치적 이념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증거 정도는 있어야 한다.
단지 특정 정치인에 의해 영입되었고 그의 취임식에서 지휘봉을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라는 것은, 그 사람을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으로 도장찍기에는 많이 빈약하다. (정명훈은 그 특정 정치인이 다른 당 소속이었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쟁이 시작되면 항상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푸르트벵글러이다. 그가 나치와 히틀러에 ‘부역’했다는 것이다.
사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집권 시기에 망명하지 않고 독일에 남아 계속 활동을 했고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부서의 산하단체였던 제국음악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베를린 필이 그의 지휘하에 두어번 나치전당대회에서, 또 히틀러의 생일 전날 연주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히틀러와 같이 찍힌 그의 사진이 어떤 자료보다도 더 폭탄같은 힘을 가지고 그가 ‘부역’했다는 증거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부역자’로 단순하게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라는 자신의 지휘를 이용해 당시 수석이었던 시몬 골드베르크 등 많은 유대인 연주자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았고, 그 중 몇 명을 심지어는 자기 집에 숨겨주기도 했다 한다. 그래서 그 당시 문화국장이었던 게오르그 게룰리스가 문화국 고위간부였던 한스 힝켈에게 “푸르트벵글러의 도움을 받지 않는 유태인이 하나라도 있다면 이름을 대봐라”라며 극도의 불만을 토로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비단 유태인뿐만이 아니라 나치의 이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인 음악가들도 그의 보호를 받았다 한다.
1933년 만하임에서 열릴 베를린 필의 연주회 전, 단원중에 유태인이 너무 많다고 항의가 들어오자 (말하자면 베를린 필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그 연주회를 즉시 취소했으며, 이런 반유태인 사상이 팽배해있는 한 이 도시에서 다시는 연주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편지를 괴벨스에게 보내 (이 편지의 전문은 1933년 4월 11일, 12일자 베를리너 타게스블라트 1면에 게재되었다), 나치당으로 하여금 유태인 음악가들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금한다는 소위 ‘아리아법’을 철폐하도록 했다. 같은 해 그가 나치가 금지한 작곡가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를 초연하자 나치정권의 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고, 푸르트벵글러는 그것에 대해 항의하고 힌데미트를 변호하는 공개서한을 또 신문에 발표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39년 다시 복직되어 베를린 필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의도적으로 유태인 솔로이스트를 초청했고(물론 그들은 오지 않았지만), 아리아인이지만 유태인 배우자를 둔 단원들이 그의 도움으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운명을 면할 수 있었다 한다.
종전후 미 군정에 의해 활동을 금지당한 그는, 아무리 끔찍한 정권이 날뛴다 해도 망명하지 않고 남아있음으로써 독일 음악의 전통을 이어가고 자신의 위치와 영향력을 통해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라고 했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들을 담은 저서가 많이 나와있다. 그 중에는 에버하르트 슈트라우프가 쓴 책같이 그가 나치에 부역한 기회주의자로 해석되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글 중에 많은 것들이 부정적인 팩트를 과장해서 표현해 푸르트벵글러라는 신화를 뒤흔들어 글쓴이 자신이 부상하려고 하는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 자신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한다.
그리고 그는 이미 1930년대에 국제적 명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자로 일하기 위해,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굳이 독일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토스카니니의 후임자로 뉴욕 필에 가게 되었을 때 나치당의 권력자였던 괴링이 그가 베를린 오페라 상임이 될 것이라는 헛소문을 의도적으로 흘려 그것이 성사되지 못하게 했다 한다.)
물론 나치 정권은 그와 베를린 필을 아리아족 최고의 예술단체로 선전에 어느 정도 이용했다. 하지만 그 당시 베를린 필은 주식회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해 오다가 거의 파산 직전에 있었고, 나치 정부의 도움을 받아 희생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독일 음악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만일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려 전자는 망명하고 후자는 자진해산 했다면, 나치 정권 당시 살았던 독일의 일반 국민들은 그들의 음악을 향유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늘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독일 음악의 전통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정권에 이념적으로 동조하지 않았고 나치 정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괴벨스가 그 당시 어떠한 권력을 휘둘렀는지 생각해 보면 그에게 공개적으로 항의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사형선고에 스스로 서명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하지만 그는 나치 정권이 만든 중요한 인물 명단 중 가장 중요했던 ‘신의 은총을 받은 3인의 독일 예술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나치 정권조차도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니 리펜슈탈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아주 적극적으로 나치당과 히틀러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념을 선전하는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추상적인 음악과는 달리 영화라는 것은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그 선전효과는 훨씬 더 폭발적이다. 6백만명의 유태인들과 수천만명의 유럽인들이 전쟁을 통해 목숨을 잃었지만, 자신은 101세까지 장수를 누렸고, 평생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합리화하는 위선을 보였다. 독일 사회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행보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는 그것과 상관없이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물론 그녀의 예술적 감각은 우리 시대와 맞지 않지만.)
나치 정권하에서 활동하며 권력을 휘둘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음악이 나치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음악 중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음악 때문이지 그의 정치적 행보 때문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정치적 행보가 그들의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고, 이것은 또 거꾸로 보면 그들의 예술적 업적이 정치적 행보를 합리화해줄 수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던 두 지휘자의 음악이 너무 훌륭해서 누군가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듣는다 해도 그것이 그들의 범죄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6세기 작곡가 제수알도는 심지어 살인자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예를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별로 마땅치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난 범죄에 대한 비판의 잣대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게 글이 장황하게 되어버렸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의 요지는 우리나라가 엉뚱한 등식을 통해 사람을 비난해, 예술가로 하여금 이념과 도덕의 눈치를 보게 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혈세와 상위 1%
인터넷 공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왜 시민의 혈세를 상위 1%를 위해 쓰냐고 비난하는 것을 읽었다. 서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억, 억, 소리가 나는 서울시향 예산과 상임지휘자 연봉에 대한 논란은 괴리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서울시향의 활동이 상위 1%들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시향 음악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그 중에는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마스터클래스에서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형편이 넉넉치 않은 학생이 여럿 있다. 또 서울시향은 ‘찾아가는 음악회’를 통해 부유층이 아닌 보통사람들에게 무료로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서울시향의 음악을 (말하자면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의 수를 굳이 전체 인구에 비교해 1%라 하자. 서울시는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1%를 위한 사업을 50개를 하면 50%를 위한 것이고 100개를 하면 100%를 위한 것이 된다. 100%를 위한 사업만 해야 된다면 매일 도로공사만 해야 된다는 말이다.
시민의 세금(혈세라는 말은 너무 과격해서 세금이라 하겠다)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써야 된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하다. 하지만 개중에는 ‘내 돈을 왜 나하고 상관없는 데 쓰느냐’는 식으로 과격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독일에서 독일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공부했고, 지금은 일을 하며 세금을 내고 있다. 내가 낸 세금은 어디론가 흘러들어가 누군가를 위해 쓰여질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낸 세금이 쓰일 수도 있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일종의 약속이다.
그리고 내가 잘 몰라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도 그것의 존재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돈, 돈, 돈
위의 제목은 연봉에 대한 인터넷 공방 중 한 네티즌이 올린 댓글이다. 인터넷을 포함한 한국 언론에서 항상 느껴왔던 것은 돈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존경심과 부러움과 시기심의 대상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멸시와 무시의 대상이 된다. 언론에서는 매일 누가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투자했고, 얼마를 사기쳤고, 얼마를 횡령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어떤 사고로 유족이 얼마의 보상금을 받았다는 기사의 댓글에는 나에게도 저런 행운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부러움이 담겨져 있다.
한 개인의 명예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누군가가 돈에 관련해 구설수에 오르면 사람들은 촉각을 세운다. “누가 얼마”하는 순간 벌써 사냥은 시작되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범죄였는지 아니었는지, 행정착오였는지 오해였는지 상관없이 당사자들은 도덕적 치명상을 입는다. 중죄에도, 불법주차에도 똑같이 종신형이 선고되는 일과 같은 것이 서슴지 않고 벌어진다.
이번 논란이 음악을 모르는 일반사람들에게까지 강력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논란의 원인이 돈이라는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번 논란 중 언론에 김상수씨가, 내가 서울시향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마치 내가 부당이득을 취한 것같은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내가 당한 부당함은 정명훈이 당한 부당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는 그런 발언에 불쾌함을 보이는 것조차도 그가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썼다는 행위 자체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문제를 제기할 아무런 의무도, 자격도, 권리도 없다.
(만일 일반 사람들이 내 수입이 그가 주장하는 것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내 스스로에게 질문해봤다. 솔직히 나는 내 몸값을 5억원까지 올려준 한 이름모를 네티즌에게 감사한다.)
단지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많다, 적다’라는 것은 비교의 대상이 필요한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 비교의 대상이란 그 당사자가 하는 일과 의무와 책임이다.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숫자만 가지고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 (김상수 씨에게 정명훈의 지휘는 그저 손을 흔드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은 그저 현대음악을 큐레이트 하는 일이다.) 수입에 부당하고 타당한 절대적 숫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다, 적다’라는 판단은 일단 그 사람의 일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그의 정신적 혹은 육체적 노동으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그 사람이 그 일을 통해 한 단체와 사회에 어떠한 책임을 지고,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가 고려된 상태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 즉 회사원, 공무원, 노동자 등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숫자에 차이가 있다고 원칙이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상천외한 세 가지 주장
지휘자 정명훈의 체류기간에 대해 논란이 일어났다.
그가 112일밖에 한국에 체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임지휘자 자격이 없다 한다.
(나는 그가 112일씩이나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심지어는 비행기를 타고와서 지휘를 하는 게 말이 되냐 한다. (그러면 배를 타고 와야 한단 말인가?) 물론 아무도 그를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는 365일 한국에서 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논란을 제기한 사람은 얼마 후 여론을 의식했는지 그의 체류기간을 ‘최소한 5개월’로 관대히 내려줬다. 지휘자들은 원래 신출귀몰하는 존재들이다. 오늘 베를린에서 리허설, 내일 아침 파리에서 드레스 리허설과 저녁 공연, 모레 아침 런던에 갔다 오후 늦게 다시 베를린으로 와 리허설을 하는 식이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112일 있는 것에 불만이 있다면 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지 못하도록 계약서에 다음 조항을 넣자.
“서울시향 상임지휘자는 계약시 여권을 압수하고 출국 정지 시킨다.”
정명훈은 너무 비싸니 작곡가 진은숙이 저렴한 가격에 지휘를 하면 안되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한다. 나도 몸값이 꽤 비싼 사람이다. 서울시향 스태프들 중 음대 출신이 꽤 된다. 그들 중 누군가가 상임지휘자를 하면 훨씬 더 저렴하게 할 수 있다.
지방 어디에서는 왜 지휘자가 대통령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느냐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지휘자의 몸값은 국제적 무대(혹은 시장)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정치가에게 국제적 시장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민주화를 이룬 훌륭한 정치인을 중동이나 아프리카로 수출해 민주화를 이루게 하고, 얼마만큼 공적이 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몸값이 정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런 정치가들을 위한 국제적 매니지먼트가 생겨 더 능력있는 정치가와 계약하기 위해 서로 경쟁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정치가는 임기에 따라 교체가 가능하고 그들의 권력은 그 나라의 국경을 넘는 순간 소멸된다. 국빈 대접을 받고 협상을 할 수는 있어도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직책을 맡았느냐를 떠나서 한 예술가의 절대적 가치와 위치는 그 스스로가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평생을 거친 스스로의 연마를 통해 도달한 것이고 아무도 그를 거기서 끌어내리거나 해고할 수 없다.
이것이 예술가와 정치가의 차이이다.
프란츠 리스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음악가들이 하인 취급을 받아 뒷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스트는 당당하게 정문으로 출입했고, 자신의 연주중 잡담하거나 낄낄거리며 웃거나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대는 왕족과 귀족들을 서슴지 않고 나무랐다 한다. 왕족과 귀족은 얼마든지 있지만 리스트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 식의 지휘자 선발
서울시향도 베를린 필같이 여러 지휘자를 초청해 경합을 시키고 단원들의 투표로 상임을 뽑아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그렇게 한다고 상상을 해보자. 누구를 데려올까?
정마에가 홍마에, 문마에, 이마에(이들은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등과 경합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정마에와 서울시향이 자존심 상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도 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다니엘 바렌보임을 데려오고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무덤에서 꺼내오자.
연봉을 차치하더라도 과연 이들이 오려고 할까?
만약 온다면 현재 정마에의 조건으로 계약하려 할까?
그들은 엄청난 보수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그 엄청난 보수를 최소한도 50억이라 가정해보자. 이들 중 누군가가 50억을 받고 상임지휘자로 일을 해도 그에게 서울시향이 발전하는 것이 중요할까? 이들이 진정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까?
그리고 만일 그 경합에서 정마에가 뽑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연봉도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 정마에에게도 50억을 지불할 것인가? 외국 지휘자가 뽑히면 50억, 정마에가 뽑히면 13억? 이것은 명백한 사대주의이다.
진중권
내 동생이 이 논란 중에 지휘자 정명훈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얘기를 시향을 통해 들었을 때 나는 매우 놀랐다. 어떤 사람들은 내 수입원이 끊길 수도 있다는 데에 화들짝 놀란 진중권이 황급히 달려들었다는 자유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애’라 판단한다.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 부모님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믿을 수 없는 얘기겠지만 난 그 당시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논란이 계속되는 수 주동안 단 한번도 통화하거나 만나지 못했다. 우리집 삼남매가 (원래는 4남매지만) 집단행동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은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셋이 같이 인터뷰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요청이
여러 번 들어왔지만 단 한번도 응한 적이 없고 우리 셋을 같이 보여주는 단체 사진도 없다. 내가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했던 초기에는 몇 년 동안 심지어는 우리가 남매라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다 개인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이다. 반경 10킬로미터 이내로의 접근은 서로 견디지 못한다. ‘궁지에 몰렸으니 글 좀 써줄래?’라는 말은 우리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생이 얼마 전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공개석상에서 동생을 옹호한 적이 없다. 몇년 전 동생이 지방 어디에서 강연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다급하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인사동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내 반응은 단 한 마디 ‘알아서 잘해봐’였다. 그렇기 때문에 진중권은 내가 시향에 몸을 담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김상수 씨의 생각에 공감한다.
나는 독일에서 27년, 베를린에서만 24년이라는 시간을 살았다. 한국에서 산 24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독일에서 산 셈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김상수 씨 칼럼을 통해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히틀러 같은 정치가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이다. (독일 정부가 발칵 들고 일어날 일이다.) 는 독일에 체류하는 나보다도 더 독일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지휘자들의 연봉에 관한 것이다.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상수 작가가 베를린에 체류한 적이 있었고, 어느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사이먼 래틀을 봤다고 한다. 설마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5만9천유로를 연봉으로 받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택시를 타겠는가? 나는 몇년전 유아용품 파는 가게에서 세일을 할 때 어린 아들 요나쉬를 데리고 나온 래틀 부부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나는 왜 이렇게 세계적인 지휘자가 이런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가 의아해 했다. 하지만 지금 그 답을 얻었다. 바로 연봉 때문이었다.
김상수 씨가 서울시향이 베를린 필 같이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나는 ‘한국이 독일인가?’하며 잠시 갸우뚱했다. 나는 이 두 나라와 두 오케스트라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한번도 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머리 속에서 연결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의 주장은 나에게 마치 남북통일을 독일 통일의 방법을 본따서 하자라는 주장같이 들렸다. (국경이
자연스럽게 열리고 쓰나미같이 넘어오는 북한 주민 하나하나에게 환영비조로 10만원씩 지불하는 것으로 통일의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글의 정연한 논리에 금방 설득당했다. 베를린 필은 너무나 훌륭한 악단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향을 베를린 필 운영방식으로 이끌어나가야
된다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국가에서 서울시향의 예산을 10배쯤 늘려주고, 외국 유수오케스트라들도 다투어와서 연주하고 싶어하는 음향좋은 번듯한 전용홀을 지어준다. 많은 전문인력이 투입되어 행정이 원활해지고, 튼튼한 예산으로 매해 편안하게 해외투어를 나간다고 상상해보자. 얼마나 환상적인가?
베를린 필을 포함한 모든 다른 독일 단체들의 시스템은 이 나라의 역사와 사회구조, 그리고 국민들의 멘탈리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내 생각에는 서울시향이 베를린 필 같이 되려면 한국이 독일같이 바뀌어야 한다.
독일은 물론 좋은 나라이다.
신문사 편집장들이 신문이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기사의 팩트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발행된 후 숫자 하나라도 실수가 발견되면 즉시 정정기사를 내보낸다. 타인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은 그것이 단 한 문장이라도, 단어 한 개일지라도 글쓴이가 법의 처벌을 받던가, 최소한 공개사과하며 책임져야 한다.
좌파 정치인들도 다니엘 바렌보임과 사이먼 래틀의 연봉이면 영세민 아파트를 몇 채 지을 수 있다는 엉뚱한 계산을 내놓지 않는다. 우파 정치인들도 왜 우리의 세금으로 수많은 외국인 학생들을 공짜로 공부시키냐며 불평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통일 후 발생된 빈부격차와 사회빈곤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베를린 필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시도는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선가게에서 수상인 앙겔라 메르켈이 내 앞에 줄을 서도, 국회의장을 슈퍼에서 만나도,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거나,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다가가 여기에 싸인해라 저기에 서명해라 하지 않는다. 한국이 이렇게 된다고 상상해보자.
얼마나 환상적인가.
독일은 좋은 나라다. 어떻게 하면 한국이 독일처럼 될 수 있을까?
이런 변화를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렇게 되려면 한 개인 개인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남들에게 오만하게 당신들을 바꿔라 라고 요구하기 전에, 나와 김상수씨,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바꿔보자 감히 제언한다.
에필로그
나는 김상수 작가의 이름을 이번 논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내가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고로 한국 주요 매스컴을 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난 몇 주 동안 그의 서울시향과 정명훈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난감해했다. 단순히 ‘팬의 애정’이라고 보기에는 좀 지나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애인이 있으면 좋지만 지나치게 집착을 하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한번 상상을 해봤다. 작곡가 진은숙이 어느날 갑자기 쓰던 작품을 미루어놓고 임의의 공공기관, 예를 들자면 한국은행의 경영구조를 비판하고 나선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급여를 내 자신만의 산수법으로 확대, 축소시키며 부당함을 호소하고, 그것의 해결책을 여러가지 변주곡으로 제시한다. 더 나아가서는 화폐통용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이제 물물교환의 시대가 와야 한다며, 그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총재는 걸림돌이 되니 갈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김상수 씨는 자신이 작가이기 때문에 이런 비교가 타당하지 않다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예술가나 작가, 즉 창작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김상수 씨는 그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고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해 서울시향과 정명훈에 대한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사실 그 글들은 서울시향과 정명훈에 대한 정보보다는 글쓴이 자신의 사고 구조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담고 있기는 하다.) 그는 그 글을 발표하기 위해 여기저기 매체를 찾아다니고 수많은 댓글에 성실하게 답변해왔다. 거기에 쏟은 그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 열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서울시향을 구하기 위해 잠시 창작에 손을 놓으신 걸까?
아니면 서울시향과 정명훈이 등장하는 거대한 작품을 구상중이신가?
나는 김상수 작가가 본업에 충실해 훌륭한 작품을 남기기를 바란다.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음악을 뒷전으로 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듯이 그에게도 작품을 쓰지 않는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어야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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