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가 유행처럼 번진다. 누구라도 올레길을 걸었다면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한 풍경 앞에 서면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을 게다. 주어진 현실이 답답하고 감옥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한 번씩 서둘러 떠난다. 푸른 바다와 대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 한적함에 마음은 평화롭고 안전감을 얻게 된다.
해마다 팔월의 삼복더위를 마다하고 길을 걸었다. 더위 탓인지 올레길을 걷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폭염 경보에도 올레길을 걷는 이유는, 먼 길을 걷는 고통은 있지만 완주했다는 뿌듯함에 올여름도 주저함은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만 보는 것은 아니다. 또는 편안하고 안전한 길만 걷는 것은 아니다. 몸으로 부딪치며 스스로 선택한 낯선 길에서 남은 삶을 살아내는 소중한 지혜를 얻는다.
한가롭고 고즈넉한 마을에 들어섰다. 정갈하게 보이는 카페에서 더위를 식히기로 했다. 인기척 없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덩치 큰 개가 주인보다 먼저 손님맞이를 한다. 뒤따라 나온 카페 사장님이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개를 부르며 경계하는 나를 안심시켜준다. 잘 꾸며 놓은 시설에 비하여 그다지 손님이 없는 듯 한가롭다. 체격이 좋고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는 카페 사장님은 직접 차를 내리고 서빙을 하고 있다. 뭘 마실까를 망설이고 있는데 사장님은 직접 개발했다는 ‘청귤 에이드’를 권했다. 청귤청에 탄산수를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에이드가 속 깊은 곳까지 청량감을 준다. 시원한 음료수가 특별한 향과 맛을 준다는 내 표현에 사장님은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띤다.
손님 없는 한가한 카페다.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기에는 그리 부담이 없을 듯하다. 여행을 좋아해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제주만큼 마음에 가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제주도가 좋아 자주 와서 휴식을 취하며 풍경을 즐겼단다. 특히 ‘신천리’ 마을이 더 마음을 잡았고 또 마을 사람들이 좋아서 서울의 모든 생활을 정리했단다. 지금은 욕심 없는 마음으로 날마다 휴식 같은 편안함을 누리며 산다고 했다. 알고 보면 카페 사장님처럼 제주에 반해서 아예 이곳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제법 만났다. 나 역시도 내 능력만큼 찾아오는 유일한 여행지이지만 제주도는 눈과 마음, 입맛까지도 만족을 시켜주는 곳이다. 카페 사장님의 제주도에 사는 이유에 내가 제주도에 빠지게 된 여러 가지 이유를 더 하니 한참 대화가 이어진다.
기회가 되면 들르겠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더위도 가셔지고 다리와 발가락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잠깐의 휴식이 몸과 걷는 발길을 가볍게 한다. 사람이 생을 살아내는 동안 힘들고 버거울 때는 휴식이 필요한 것이었다. ‘부와 명예를 잃으면 조금 잃어버린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어버린다.’ 했다. 그런 것이었다. 힘든 현실을 최선으로 살아낼 때는 그 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해하려고도 하지 못했다. 이제야 백번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세게 친다.
대자연의 풍경 앞에 내 마음의 번잡함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올레길을 걷다가 한 번씩 내가 걸어온 길을 힐끔힐끔 되돌아보게 된다. 근근이 살아냈던 시기가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고 열심히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끝 모를 수렁에 허우적거렸다.
오름과 끝없이 펼쳐진 옥색빛 바다와, 화산이 만들어 놓은 벼랑과 조형물들, 원시림을 간직하고 있는 곶자왈에는 영원히 이별하지 않고 천년만년을 살아낼 연리지도 있다. 억겁의 무늬를 따라 걷다 보니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고운 빛으로 활짝 피워내는 야생화와 멋진 풍경들이 달고 온 상념들을 녹여 내린다.
언제라도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여행자의 꿈을 꾸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여행을 하면서 여행자를 보게 되면 부러운 마음에 먼저 눈이 끌리게 된다. 젊은 날의 먼 나라의 여행은 아니지만, 이제라도 이쯤이라도 떠나올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느지막 여행이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한 것인 줄을 여행을 해보니 알겠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다리 근육에 통증이 전해진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팔월의 한낮에 길을 걷는 것은,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하지만, 폭염에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올레길 걷기는 나에게 허락되는 만큼 주어진 특별한 여행지라 여긴다.
하늘이 물들기 시작한다. 붉고 노란 노을, 감히 사람 따위는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이 그린 명작이다. 여행을 하면서도 나는 또 여행을 꿈꾼다.
첫댓글 최작가님의 여행기록을 읽으면 꼭 내가 그 곳에 서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세밀하고 상세히 적어주셔서 아니보아도 본 듯한 풍경이 그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는 최작가님 덕분에 올레길을 걸었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