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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그라운드
제9화 - " 아스날 Vs 뉴캐슬 "
파브리가스, 23세의 동안의 미드필더는 저 격렬한 그라운드를 잠자코 지켜볼
수 밖에 없다. 그가 뛰었던 자리에 플라미니가 더욱 적당하다는 웽거의 판단이
내리꽂힌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이질적 존재가 그의 앞에 나타났었다. 더욱 이
질감에 빠뜨리더니 어느새 자신은 밀려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행복했다.
통증이 심하지 않고 어지간하면 먼저 그라운드에 나섰었다. 다른 존재들이 그의
자리에서 번갈아 출몰하기도 했었지만 부상과 부적응으로 이내 사라졌었다. 플
라미니는 적응기에서 일찍 벗어나 어느덧 그와 균형을 이뤄 중앙을 오랜 호흡을
맞춰왔다.
플라미니가 자신과 어울리는 타입의 선수라고 초기부터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부터 플라미니로부터 빛이 세어나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균열에서 세어나온 빛은 아주 느리게 확장되었지만 어느 틈엔가
매번 의식할 정도로 뚜렷해졌다. 그러다 멀지 않았던 시점에서 파브리가스 자신
은 낼 수 없는 색이라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되었다.
'무슨 차이일까. 대체.'
열여덟살 때의 자신은 지금 스물셋의 자신과 닮아있었다. 아니 닮았다라고 하
는 것은 나의 위안일 뿐이다. 하나의 선수가 지고 태어난다는 그 세월동안 그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게 지금 그가 벤치에 앉아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시선을 고정하게 만드는 저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루시아. 그녀는 이 뉴캐슬의 본거지에서 햇볕을 지배하고 있었다. 탁하고 차가
움이 깔린 목소리가 파브리가스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파브리가스... 이제부터 보아두어라. 그녀의 움직임, 동작, 하나하나 모
든 것을. 아마도 우리가 속한 세계에선 가질 수 없는 것을, 너에게 없는
것을 그녀가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시간은 길지 않겠지..."
웽거의 속삭임은 다분히 감상적인 어조라 내용이 흘러들어오는데 지체가 있었
지만 머리와 가슴 모두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
엇일까. 뉴캐슬과 아스날의 후반은 격렬했다. 뉴캐슬팬의 광기와 애런 헤일즈의
분노가 혼합주입된 선수들은 심판의 척도를 시험하는 듯한 거칠음으로 아스날을
전면으로 누르려 했다. 그라운드 곳곳에서 파열음과 신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손
상된 자존심을 세우려는 뉴캐슬의 군사들이 아스날 선수들을 위협했지만 정작
가장 치열해야 할 중앙에선 묶여버린 마냥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아스날에서
전반과 달라진 것은 루시아의 뒤로 묶은 머리와 포지션 뿐이었다. 플라미니와
루시아의 조합은 오히려 루시아가 뒤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플라미니는 전방 쪽
중원을 압박하면서 격렬함에 저항했고 루시아는 그 뒤에서 격렬을 중화시켰다.
그녀의 수비는 부드러웠고 정교했다.
루시아는 객기처럼 중앙으로 밀어들어오는 선수들에게서 공을 가로채냈다. 한
뉴캐슬 선수가 플라미니를 뚫고나온 패스를 받아 루시아 앞까지 드리블하다가
패스하자 그녀는 이미 몸을 움직여 사뿐하다고 표현될 정도로 가볍게 공을 건드
려 아군에게 흘려줬다. 길게 공중으로 급유되는 공도 상대 수비진에서 받으러
나온 공격수의 눈 앞에서 가볍게 몸을 띄워 헤딩으로 여유롭게 끊어내 플라미니
에게 이어준다. 중앙에서 루시아를 의식해 움직이던 뉴캐슬 선수들은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중앙진입 드리블링의 역할을 맡은 미드필더가 루시아와 경합해 돌
파구를 찾으러 어깨를 붙이려 했지만 역동작을 허용하지 않는 깔끔한 태클로 공
은 루시아의 다리에 끼어있었고 바로 몸을 낚아채려 손을 내밀어도 공은 짧은
순간 즉시 다른 아스날 선수의 발에 전달되어 역습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후
반초반에도 플라미니가 전방에서 양사이드와 주최하는 빠른 역습에 시달려댔다.
뉴캐슬의 양쪽 윙백은 벌써 호흡이 흐트러진 기색이 보일 정도였다.
어느덧 뉴캐슬 선수들은 중앙으로의 볼투입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전반의 참
패는 자신들이 루시아에 방심한 탓이라 당연히 생각했었다. 그들의 근본적인 바
탕 안에서 생각했던 당연함이 연거푸 몇번씩 무너질 때의 감정은 너무나 낯설어
두려울 정도였다.
린다는 뉴캐슬이 유린당하는 것이 가엽게 느껴졌다. 기자석데스크에 얼굴을
괴고 비스듬히 앉아 여전한 아스날에 비해 아직까지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뉴
캐슬 선수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면서 모니터에 확대된 진이 빠진 얼굴들까지
둘러 보고는 앨런의 캠에 레코딩을 남기듯 속삭였다.
"루시아를 덫의 먹이감으로 위장시켜 던져 놓고는 중앙으로 끌어들여서
그녀 자체가 덫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해주고 있어. 윙백들이 중앙수
비진들과 협력하지 않고 각자 완전 양사이드에서 수비에 전념하고 있어. 얼
마든지 가운데로 공략해 보라 이거지. 그 결과는 황급히 뛰어 돌아가면서
숨을 몰아쉬며 짓는, 말도 안된다는 저 표정들이야."
아스날은 양사이드 뒷공간을 윙백들이 채우고 중앙 루시아 뒤에서 뚜레와 멕
시스가 과감한 돌진수비로 슈팅 찬스 자체를 봉쇄하고 있었다. 더욱이 플라미니
는 윙들과 나란할 정도로 전진해 있어 중앙 공간이 크게 빈 것처럼 보였다. 뉴
캐슬 선수들이 그 공간에 본능적으로 이끌려 들어갔지만 그 순간마다 접근해오
는 상대가 그녀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공을 뒤로 돌려 달아나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주위가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또 다시 간단한 드리블링으로라도 시야를
트려하면 태클과 차단이 깔끔하게 들어와 뉴캐슬의 미드필더들은 미칠 노릇이었
다. 아스날의 수비성공을 플라미니가 더욱 빠른 역습으로 토해내는 것을 지켜본
파브리가스는 그가 저 곳에 정말로 잘어울린다 생각했다. 플라미니가 자신과 뛰
었을 때도 공격성향이 약간 높았었지만 번갈아 나누어 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플라미니는 자신의 영역에서 펄펄 날며 만족감에 젖어 있는 짐승처럼 질주
하고 공격패스를 퍼붓고 있었다. 파브리가스는 그 물음을 되새기는 대신 다시
루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지켜보는 이들조차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저
수비 움직임을 계속 따라나갔다.
아스날의 끝점에 있는 사하와 레이예스도 잠시 지칠만큼 격렬한 역습을 전개
하며 슈팅을 날려댔고 뉴캐슬도 근 몇년간 당한 적도 없었던 네골 이상의 실점
을 막기 위해 강렬히 매달렸다. 심판도 그에 동의하는 듯 연달아 침묵하거나 뉴
캐슬의 손을 들어줬다. 뉴캐슬의 관중들은 점점 침묵이 잦아지고 있었다. 루시
아 근처로 공격이 진행될 때는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가 안타까움의 탄성이 나
오는 것이 반복되었다. 시선을 그녀에 고정한 채로 경기를 보는 이들이 점점 늘
어나고 있었다. 뉴캐슬의 관중들이나 선수들이나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고 거
기서 벗어난 것은 필드 위의 아스날 선수들 뿐이었다.
중앙에서의 타계책을 찾기 위해 뉴캐슬의 윙이 중앙으로 지원해 들어왔다. 아
스날 윙백이 따라붙었지만 틈이 벌어진 채였다. 뉴캐슬의 중앙미들이 윙에게 공
을 연결하고 포워드진 가까이로 달려들어갔다. 루시아가 마크를 넘기고 윙이 들
이닥치는 공간을 비스듬히 막아섰다. 윙이 공격패스를 포기하고 뒤에서 들어오
는 미드필더에 가뿐히 공을 넘기려 패스동작을 하는 순간 루시아는 앞서 움직여
공을 건드려 잡아냈다.
"젠장!"
애런 헤일즈는 쥐었던 주먹을 풀면서 고개를 돌렸다. 더이상 역전은 없다는
확신을 짓지 않으려 저항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시 그라운드로 시선을 옮
겼을 때 그 하얀 공은 한줄기의 낮은 곡선을 그리며 공중을 날아 뉴캐슬의 수비
뒤편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관중들의 비명소리가 킥의 시작이 그녀라는 것을 알
려줬다. 레이예스가 수비수와 전력질주 상태로 두 걸음이나 벌어져 공을 자신의
영역으로 컨트롤했다. 롱킥에 반응해 내달려왔던 골키퍼가 레이예스의 컨트롤을
보고는 절망적인 몸짓으로 슬라이딩했다. 레이예스가 골키퍼의 손을 피해 공을
비껴놓고 빈 골대로 슈팅하려는 순간, 골키퍼의 손이 빠져나가던 오른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에 놀라 터져나온 뉴캐슬 관중들의 비명은 짧은 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심판이 달려들어와 골대 쪽으로 팔을 향하며 강한 휘슬을 불었기 때문
에, 비명과 야유의 처절한 굉음이 뉴캐슬의 스타디움을 통째로 흔들고 있었다.
* * *
린다는 런던변두리의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루시아가 교체되었기 때문에 기사를 쓰기 위해 미리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파브
리가스가 들어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다른 선수가 들어갔지만 4-0이라는 스코
어가 뒤집어 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앨런이 운전하는 보도차량 안에서 린다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역시 그래? 고마워. 이 은혜는 꼭 갚을께."
린다가 가득 웃음이 담긴 얼굴로 통화를 끊고는 앨런을 향해 재잘대기 시작했
다.
"BBC가 오늘 경기를 보고 아스날과의 계약에 서명했데. SKYSPORTS와 분배
형식으로 한 모양이야."
"뭐라구요? BBC가요? 국가대표 경기만 했었잖아요?"
"SKYSPORTS의 아스날 경기를 BBC로 옮기는 대신 영국 내 커미셜 광고 수
익를 분배하기로 했다나봐. 아직 공개일정은 안잡고 있다던데, 우리가 보도
하면 재빨리 공개하겠지. 적어도 특종거리는 된다구. 흐흐흐."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어내는 거에요? 방금 누구에요?"
"각처의 내 사람들이지. 너도 이 세계에서 인정받으려면 인맥을 넓히라구!"
앨런은 '내 남자들이겠지'라며 궁시렁거렸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린다
에겐 들리지 않았다. 아스날과 BBC의 대형계약은 루시아를 전담으로 취재하는
린다에게 있어 특종여부를 떠나 커다란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감을 따
라 투자한 댓가를 후하게 쳐서 받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 정보원은 루시아의 경
기를 공중파로 방영하는 나라들이 점점 많아질 거라는 예측도 들려줬었다.
'그럴거야. 루시아는 사로잡히게 되면 빠져나갈 수 없게 되는 존재일테니
까. 나는 니가 어떤 여자인지 반드시 알아낼거야.'
린다는 자신의 직업적 본능을 되새겼다. 스타들의 더러움을 파해치는 것은 오
래전부터 신물이 났었다. 대신 이 눈 앞에 강림한 베일에 쌓인 '여신'에 도달하
고 싶었다.
"린다씨. 찰튼 전에는 3대0에서 교체했는데, 이번 뉴캐슬전에선 왜 4대0
에서 교체했을까요? 별로 상관없을까요?"
"아냐. 앨런, 은근히 예리하네. 뉴캐슬은 세골로 안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우리 여왕님은 네골 이상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신거지. 실제로 웽거
의 교체사인을 한번 거절했었어."
"생각보다 고집있네요. 왠지 평탄치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가능한 일이야. 아마도 승리수당이 어마어마한 액수인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승리에 집착할 리가 없어."
린다가 보도차량의 모니터를 켜고 터치스크린을 눌러가자 경기동영상과 함께
경기 결과가 나왔다. - Newcastle 2 : 4 Arsenal -
"후.. BBC가 계약한 것처럼 이제 거물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여태까지는 짧은 인간승리인 줄 알았겠지.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야
깨달았을거야. 루시아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이제 사상 초유의 스폰서 전
쟁이 발발할 거야. 그리고 그 속을 내가 파고들어갈 거구. 후후후."
"......"
또 하나의 천재의 출현에 할 말을 잃은 앨런이었다.
린다는 보도차량에서 내려 앨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서 보도의 초안을 짜고 자료나 영상은 방송국에 가서 편집할 생각이었다. 이내
린다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두시간 정도 앨런이 찍은
영상을 가지고 분석하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가
눈을 떠 자신의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선이 멈춘 벽에는 액자에 담
긴 여러 개의 사진이 장식돼 있었다. 어린 소녀가 축구복을 입고 뛰고 있었고,
약간 커진 소녀가 자신의 축구팀의 도열에 서서 찍은 사진과, 다른 사진에선 그
소녀가 잔디 위에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축구복을 입은 소녀들이 둘
러모여 경기에서 이긴 듯 기쁨에 젖어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 그 사
진들은 모두 작은 린다의 모습이었다. 린다는 자신의 사진들을 둘러보다가 눈을
감고 잠시 그 때의 회상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떠 작업 테이블의 컴퓨터
모니터에 멈춰있는 루시아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축구는.. 누구에게나 행복한 기억을 남겨주는 법이야... 너는 그렇지 않
니? 루시아?"
ⓒ축구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