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이은주씨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녀의 까칠한 목소리였습니다.
비좁은 트렁크, 영혼까지 잠식해오는 그 숨막히는 어둠 속에서
죽음을 상대로 장난을 하듯 킬킬거리던 그녀의 목소리.
개인적으로 이은주가 열연한 영화 ‘주홍글씨’를 보면서
재즈바에서 노래를 부르며 2중적 생활을 하는 자유주의자이자
유부남 기훈(한석규)의 농염한 연인인 가희 역을 맡기에
이은주는 체구도 가녀리고 목소리도 너무 하이톤의
코맹맹이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희라는 캐릭터가 품고 있는 미스테리의 심연에 비해
이은주는 뭐랄까, 끈적함이 좀 부족하달까요.
그보다는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처럼 남학생들의 첫사랑으로
추억되는 가녀리고 청순한 역할이 그녀 본연의 이미지에
더 잘 어울리지 않나 싶었죠.
그러나 그 트렁크신에서 땀에 젖어 킬킬거리던 까칠한 목소리만은
땀과 피 속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비릿한 불쾌감, 또는 쾌감과 얽혀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군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허무한 시선, 그 어딘지 텅빈 이미지를
이은주는 갖고 있었습니다.
고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왠지 죽음의 아우라가 있는 배우라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그녀는
영화 속에서 죽는 경우가 이상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본인이 꼭 죽지 않더라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영화가 많았지요.
"나 좀 사랑해 줄래요? 죽을 때까지만.."
관객을 울리는 데 실패한 최루성 멜로 영화 '하늘정원'에서
말기암 환자 역을 맡은 그녀는 의사 오성(안재욱)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오성이 당황하자, 그녀는 재밌다는 듯 장난꾸러기처럼 웃지요.
그때도 그녀는 언제나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서 관객을 불안하게 하면서
정작 본인은 두려움 없이 다가가 문을 여는 것 같았습니다.
이 '하늘정원'을 비롯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 '번지 점프를 하다'
처음부터 죽음이 예견됐던 '태극기 휘날리며'
죽음으로써 사랑을 쟁취하려 한 '주홍글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러 차례 그녀가 죽음의 문을 여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데뷔작인 '송어'에서는 그녀가 옷 갈아입는 것을 훔쳐보던
소년이 죽음을 맞게 되고 공포영화 '하얀방'에는
이상한 산부인과를 추적하던 PD로 나와
그 산부인과 사이트에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지요.
명랑한 왈가닥 이미지로 사랑받았던 '연애소설'에서조차
종국에는 죽을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 모습을 보였죠.
'안녕! 유에프오'에서는 어둠 속에 사는 시각장애인 역이었고
정말 이상하게도 밝은 듯 어두운 역할을 많이 맡은 셈입니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농염한 정사장면에서 공포영화, 왈가닥 소녀에 재즈 가수 역까지
짧은 시간 내에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 온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불행한 영화들이 주로 제안됐다는 사실은,
그리고 실제로 그녀가 영화처럼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는 사실이
모종의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유족은 이은주가 '주홍글씨'의 노출신 촬영 이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이들을 등지고 떠나고 싶어진 어떤 말 못할
사정이야 따로 있었겠지만, 일련의 영화 속에서
수차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한 것이,
또 최근 '주홍글씨'에서 가희라는 음습한 캐릭터에 몰입해
연기한 것이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무의식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요.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상상일 뿐입니다만.....
장국영(!) 역시 '이도공간' 촬영 이후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에 이르지 않았나요.
'오! 수정'에서 스무살 나이로 남녀간의 치졸하고 이기적인
연애의 모습을 보여준 뒤 이은주는 한 인터뷰에서
"어른들은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하는구나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어린 그녀에겐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했을 수도 있겠지요.
'영화가 끝난 뒤에는 영화를 떠나 사는 법'이
쉽사리 몸에 배지 않았을 겁니다.
하기사 이미 경계를 넘어선 사람의 등에 대고 왜냐고 물어 무엇하겠습니까.
그저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을 기억해 주는 것이 보내는 사람의 도리겠지요.
제가 그녀를 실제로 만난 것은 딱 한번 뿐이었지만
가녀린 몸에 하얀 얼굴이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씩씩하게 느껴졌는데
몇년 새 충무로의 대표적인 20대 여배우로 성장한 그녀에게
왜 이런 끔찍한 불행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던 그녀가 한창 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싶었던 그 심정이 그저 안타깝습니다.
혹여 너무 완벽한, 깨끗한 세상을 꿈꿨던 것은 아닌지,
그랬다면 부디 천국에서 그녀가 꿈꿨던 세상을 만나기를..
숟가락은 왜 디귿 받침이냐고 진지하게 묻던,
컵을 잡을 땐 자기도 모르게 새끼 손가락이 올라가던,
세 박자의 느린 왈츠에 맞춰 손 잡고 춤 추길 좋아하던,
행복하던 시절의 태희가 그립습니다.
"...몇번을 다시 태어난대도 결국 진정한 사랑은
단 한번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지녔기 때문이라죠.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해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번지 점프를 하다' 중에서 인우(이병헌)가 죽은
태희(이은주)를 향해 하는 대사
[옮 김]
첫댓글 아래를 보고 살면 불만 불평을 할수 없으련만 힘들게 낳아서 길러준 부모님 생각을 좀 했으면 아까운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지는 못했을 텐데 그 미모에 안타깝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들기님 고마워요 이은주가 나오는 연속극 잘 보지 않아서 누군가 했는데 이제 알것 같아요 자세한 설명도 잘 읽고 궁금증이 풀렸답니다 역시 비둘기 안녕
넘 예쁘고, 넘 젊고......넘 안타까움속에 얼마나 몸부림 치다가 가셨을까? 몇분만 더 생각 해보지....명복을 빕니다.
인생의 전성기를 누릴25세의 꽃다운나이에 우째이런일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비둘기님 역시 젊은언니시라 뉴스도 빠르셔요.감사합니다.
몇번을 다시 태어난대도 결국 진정한 목숨은 단 한번뿐이라고 합니다. 젊고 고운 나이에...??? 좀 더 생각을 돌려볼걸 ?? 하고 너무나 아까워서...그러나 그 나름대로 알지못할 사연이 있겠죠.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