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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가책속 외국곡♬ 스크랩 가톨릭 성가 158 구세주 예수그리스도 Cast thy burden upon the Lord
이종혁요셉 추천 0 조회 47 16.02.29 17: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톨릭 성가 158 구세주 예수그리스도 Cast thy burden upon the Lord






작곡 : Jokob Ludwig Felix Mendelssohn  독일/1809-1847

하이든(오스트리아)이 죽은 해인 1809년 2월 3일 함부르크(Hamburg)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유태인 은행가, 조부 모제스(Moses)는 이색적인 철학자였다. 펠릭스는 네 남매의 둘째로서 장남이었는데 누나 파니(Fanny)도 풍부한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였다.

1812년(3세)에 함부르크가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일가는 베를린으로 이주했는데, 여기서 첼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를 비롯하여 좋은 스승을 사사, 본격적인 음악 교육이 시작되었다. 1818년(9세), 공개석상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신동임을 인정받았다. 1822년 이래 자택에서 관현악을 연주하게 된 뒤로는 그것을 위해 관현악을 쓰기 시작했으며, 1824년(15세)에 「교향곡 제1번」을 완성했다.

더없이 혜택받은 환경에서 주도한 교육을 받은 멘델스존(독일)은 음악뿐만 아니라 회화와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25년 파리 음악원장인 케루비니(Luigi Cherubini, 1760~1842)의 권유로 음악가로서 세상에 나갈 결심을 굳히고 로시니(이탈리아), 알레비(Fromental Hal?vy, 1799~1862), 마이어베어 등의 음악가와도 사귀는 한편 1826년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문학과 고전 언어학 공부도 하였다. 이 해에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위해 서곡을 썼는데, 이것은 17세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높은 완성도를 나타내고 있다.

멘델스존(독일)은 이전부터 J. S. 바흐(독일) 음악에 매료되어 있었다. 당시 바흐(독일)의 작품은 거의 잊혀지고 있었는데, 1829년(20세) 「마태 수난곡(성악곡)」의 초연 100주년 기념으로 자신의 지휘로 상연하였다. 파묻혀 있었던 이 명작을 재인식시키려고 힘썼는데, 바흐(독일) 부흥은 그의 커다란 공적의 하나이다.

이 해에 그는 영국에 건너가 런던에서 여러 명사를 방문, 자작의 지휘나 연주로 호평을 받고 런던 필하모니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베를린 악단()에서 실력자 스폰티니(Gaspare Spontini, 1774~1851)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여 쌀쌀한 대접을 받고 있었던 멘델스존(독일)에게는 이 호평은 기쁨이 되어 그 후도 종종 영국을 방문한 바 있다.

런던 방문 뒤, 그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홀리드에서 「교향곡 제3번」의 착상을 얻었으며, 또한 헤브리디즈(Hebrides) 군도의 인상은 후에 서곡 「핑갈의 동굴」(관현악곡)로서 결실된다. 이듬해 1830년(21세) 멘델스존(독일)은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사육제의 소동과 그레고리우스 16세의 장엄한 취임식의 인상은 1833년에 교향곡 제4번(교향곡) 「이탈리아」(교향곡)로 결정되었다. 4년에 걸친 이 대여행은 창작면에서 커다란 수확을 가져왔으며, 로마에서 만난 베를리오즈(프랑스)나 파리에서의 리스트(헝가리), 런던에서 만난 필드(John Field, 1782~1837) 등 제일선의 음악가들과 교제를 맺는 계기도 되었다.

1834년(25세) 뒤셀도르프 시의 악장으로 임명되고 다시 1835년에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는데, 이후 이 도시는 그의 음악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관현악단의 개혁은 노력한 보람이 있어 몇 년 동안에 유럽 제1급의 연주 단체로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당시 16세이던 클라라 비크(Clara Wieck)를 쇼팽(폴란드)에게 소개한 것은 이 라이프치히에서였으며, R. 슈만(독일)과 만난 것도 여기서였다.

이듬해 1837년(28세) 총명하고 정숙한 아내를 얻어 행복한 생활을 했으며 다섯 자녀를 두었다. 1838년에는 슈만(독일)이 빈에서 발견한 슈베르트(오스트리아)의 「교향곡 제9번」을 초연했다. 1841년(32세) 프로이센 왕의 초빙으로 베를린 예술원의 음악부장으로 취임했는데, 역시 주위의 태도가 차가워 사임하려 했으나 왕의 특별한 요청으로 유임하게 된다. 이 동안에도 창작 활동은 계속되어 1841년에는 피아노를 위한 「엄격한 변주곡」을 썼으며, 이듬해에는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교향곡)도 완성,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다

겨우 베를린 예술원직을 사임한 멘델스존(독일)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설립을 기획하여 노력하던 중 작센 왕으로부터 자금을 얻어 실현시켰다. 그 자신이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치는 것 외에 슈만(독일)(피아노 · 작곡), 하우프트만(Moritz Hauptmann, 1792~1868 : 음악 이론), 다비트(Ferdinand David, 1810~1873 : 바이올린) 등의 쟁쟁한 교수진을 갖추고 1843년에 개교했다. 이 음악원은 독일 음악의 새로운 중심지의 하나로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창작 활동도 순조로워 이전부터 프로이센 왕에게 의뢰받은 「한여름 밤의 꿈」(관현악곡)을 위한 음악도 15년 전의 서곡을 포함하여 이 해에 상연되었으며,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협주곡)」는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1844년(35세) 라이프치히에 귀임한 그는 또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오라토리오 「엘리아」의 완성에 힘을 쏟았다. 1846년(37세) 「엘리아」를 가지고 아홉번째의 영국 여행을 출발. 8월 버밍엄 음악제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대작의 완성과 그 초연을 위한 여행에 몹시 지쳐 귀국한 그는 지휘자와 음악 학교에서의 지위를 떠났다. 1847년 마지막 영국 여행중, 사랑하는 누나 파니의 급서 소식에 몹시 낙담하고 이것이 원인으로 신경 장애에 빠져 병상은 일진 일퇴했으나, 끝내 1847년 11월 4일 라이프치히에서 행복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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