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시대 - 20기 김혜영
막장의 새 지평을 연 화제의 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종영했다.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간 왔다 장보리가 누린 뜨거운 인기의 1등공신은 바로 악녀 연민정 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부모와 자식을 버리고 보리의 인생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살인미수까지 저지른 희대의 악녀. 52회의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가 저지른 악행을 나열하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나 시청자는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열광했고 연민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주인공 보리와 민정의 얽히고설킨 운명의 시작은 어른들의 비뚤어진 욕망 때문이었다. 비술채 침선장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시아주버니와 형님의 교통사고를 외면한 보리의 엄마 인화는 사고현장에서 보리를 잃어버린다. 엄마 잃은 보리를 연민정의 엄마 혜옥이 차로 치게 되고 기억을 잃어버린 보리를 보자 당황한 혜옥은 부모를 찾는 대신 자신이 거두기로 마음먹는다.
혜옥의 딸 민정은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고아라고 속이고 보리의 친부모에게 후원을 받다가 이후 양녀가 된다. 보리와 민정의 운명은 그렇게 뒤바뀐다. 비술채의 딸을 넘어서 이젠 재벌가의 며느리를 꿈꾸게 된 민정은 연인과 딸을 버리고 거짓과 모략으로 많은 이들의 삶에 고통을 주며 자신의 욕망을 향해 돌진한다. 그녀가 숨긴 수많은 진실은 폭탄이 되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나 정작 민정은 자신의 삶이 피나는 노력의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 믿는다.
출생의 비밀, 패륜을 저지르고 거짓을 일삼는 악녀, 우연의 남발, 재벌가의 등장, 등장인물들의 꼬일 대로 꼬인 관계 등 막장드라마가 갖춰야 할 미덕을 마땅히 갖췄음에도 왔다 장보리는 이전의 막장드라마와는 분명 다른 느낌을 준다. 주인공이 복수만을 위해 돌진한다거나 자극적인 소재가 도를 넘어서는 여느 막장드라마와는 달리 왔다 장보리는 마치 전래동화처럼 착한 주인공이 결국 행복을 찾고 악인은 벌을 받을 것이란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악행을 일삼는 연민정의 실체가 밝혀질 날만을 고대하며 드라마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후반부에 들어서자 이제 진실을 밝히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할 너무나 중요한 역할이 보리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한없이 선한 보리는 지킬 것이 많았기에 연민정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드라마는 선한 보리가 아닌 악녀 연민정의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보리는 자신의 친부모가 누군지 알고도 진실을 숨기고, 민정이 낳은 딸 비단을 자신이 키우게 한 혜옥을 용서한다. 자신을 길러준 혜옥을 온 마음으로 사랑했기에, 친딸인 민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거라 이해하며 국밥집 어매의 죄를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하지만 보리의 숭고한 사랑과 용서는 시청자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한다. 작가의 역량부족 탓도 있겠으나 보리가 표현한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용서와 사랑보다는 연민정이 표현한 솔직한 욕망이 더욱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연민정이 결국 자신의 죗값을 치르고 그 옛날 보리처럼 혜옥과 함께 국밥집을 지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악이 심판받길 바라는 시청자의 소망이 실현됐음에도 친딸이 아닌 비단을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고, 거짓을 일삼은 혜옥을 용서한 보리의 사랑은 마지막회에서조차 존재감이 없다. 드라마의 주제에 사람들은 공감했지만 그들이 열광한 것은 욕망에 솔직한 악녀 연민정이었다.
타인을 용서하고 끌어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욕망은 우리에게 짜릿한 쾌감을 안겨준다. 그 욕망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우리의 이기심은 그 고통 앞에 기꺼이 침묵한다. 권선징악을 바라면서도 욕망에 솔직한 연민정에게 시청자들이 빠져 든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악녀의 시대이자 욕망의 시대인 지금 사랑과 용서보다 욕망이, 드라마는 물론 우리의 삶 곳곳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욕망해도 괜찮아 - 20기 김혜영
청바지를 입고 커다란 백팩을 맨 한 중년남성이 ‘욕망해도 괜찮아’ 출판기념 강연장에 들어섰다. 그의 외모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모범생 같았다. 온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쓸 듯 한 얼굴. 온화한 미소로 무슨 부탁이든 들어 줄 것 같은 얼굴. 좁은 세계 안에서 바른생활만을 고수하며 자신을 가다듬어 왔을 것 같은 얼굴. 그런 그가 용기 내어 자신이 살던 세상 밖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나왔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결코 쉽게 타인 앞에서 꺼낼 수 없는 바로 그것, ‘욕망’에 관하여.
‘욕망해도 괜찮아’는 내가 읽었던 수많은 텍스트 중 가장 깊이 ‘나’를 만나게 해준 글이다. 오랫동안 ‘계’의 세계에서 살다가 밖으로 빠져나온 김두식 교수님의 고백이 담긴 책의 내용이 내 삶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교수님처럼 어릴 적부터 보수적인 기독교환경에서 자랐으며 근본주의 교리를 학습 받은 골수 크리스찬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믿지 않는 인간을 지옥으로 던져버리는 무자비한 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의 신임을 알게 된 순간, ‘계’의 세계에 갇혀 타인을 공격하고 단죄하는 근본주의는 신의 뜻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나를 둘러싼 ‘계’를 의심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존경했던 노무현대통령님의 자결은 내 신앙관을 바꿔 놓았고 진리라고 믿었던 ‘계’의 상당부분이 현실과 맞지 않는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부당한 규범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난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교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교수님은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롯한 우리사회의 수많은 ‘계’가 우리들이 품은 지극히 당연한 욕망까지 억압하고 있음을 이야기 하며, 욕망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보듬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욕망은 신이 되고자 하는 종교인에겐 걸림돌일 뿐이다. 그래서 근본주의 기독교는 신도들에게 매일매일 욕망과 싸우고 회개하라 촉구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에 가기위해 학생은 모든 것을 참고 공부만 해야 하고, 좋은 직장에 가기위해 청년은 사랑과 추억을 포기해야 하며, 편안한 노후를 위해 중년은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교수님의 지적대로 보듬지 못한 욕망은 일그러진 형태로 갑자기 튀어나와 삶을 잠식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이 주된 에너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시대에 “욕망해도 괜찮다고?” 라며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돈과 섹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지나치게 넘쳐나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진짜 욕망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게 아닐까. 교수님이 욕망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규범에 갇혀 오늘의 삶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들이다. 자신의 욕망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규범을 벗어났다고 생각되면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 높은 이상과 숭고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삶만이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현재를 사는 게 아니라 미래만을 바라보기에 결국 행복할 기회를 영영 놓쳐버리는 사람들 말이다.
강연을 통해 처음 만난 김두식 교수님은 수더분한 인상 때문에 재미없을 것 같다는 예상을 무너뜨렸다. 강연은 정말 솔직했기 때문에 미소 지을 수밖에 없는 유쾌함이 가득 배어있었다. 오랫동안 ‘계’의 세계에 살다가 용기 내어 바깥세상으로 걸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여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보듬으면서 타인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기에 많은 사람 앞에서 하기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고백이 그토록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으리라. 자신의 내면 앞에 솔직하지 못한 채 타인이 정해 준 규범 속에 자신을 가두며 행복을 저당 잡힌 사람들에게 “욕망해도 괜찮아” 라고 말해준 그. 이 책은 하루에도 수십 번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이들이 건강하게 욕망을 다스리고 부당한 ‘계’들과 지혜롭게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따뜻한 위로이자 응원이다.
첫댓글 두 글이 묘하게 연결되서 재미있네요~^^ 야곱의 욕망에 대한 생각과 고민에도 도움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하도 장보리 장보리해서 궁금했는데,, 이 글을 보니 불타는 욕망의 연민정이 보고 싶네요ㅋㅋ
네 두 글은... 비유하자면 하나는 비만인 아이에게 살빼라는거고 나머지 하나는 저체중인 아이에게 살좀 찌라고...ㅎㅎㅎ 장보리는...보시면 빨려들어가실겁니다. 막장은 막장인데 곱씹어볼 이야기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