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기 북간도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교회는 용정시교회인가? 용정중앙교회인가?
4.19혁명 기념일이다.
독재자가 된 독립투사에게 외친 독재타도 라는 구호가 일파만파가 되어 한국을 덮쳤다. 그리고 우리는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헤엄치게 되었다. 4.19혁명 앞자리에 서계신 김주열 열사와 그의 어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연길에 살면서 북간도의 독립운동이
캐나다장로회 산하 동만주(북간도)
교회들의 희생과 헌신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았다. 청산리전투 현장에 있는 카나다장로교 산하 교회 교우들이 총동원 되어 밥을 해나르고 무기 운반을 하고 적의 정보를 염탐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용정 3.13 만세 시위가 그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시위이고 간도국민회 회장인 구춘선이 용정교회 설립자요, 영수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빚진 자의 심정으로 북간도 내에 설립된 교회와 설립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용정교회와 용정중앙교회가 특별히 나의 관심사가 되었다.
캐나다장로교회의 북간도선교에 관한 글을 난생 처음으로《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에서 읽었다. 그 책 82쪽에 보면 1906년에 북간도 최초의 교회인 '룡정교회'가 홍순국과 박무림에 의해 세워졌다. 그 뒤 1907년에 '룡정중앙교회'가 정재면에 의해 세워진다. 이 문헌은 용정교회 와 용정중앙교회가 다른 교회로 서술되고 있다.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는데 예수교장로회사기를 찾아보니 용정교회도 아니고 용정중앙교회도 아닌 '용정시교회'가 나왔다. 두 책이 다 같은 역사를 기록한 것 인데 서로 달랐다. 두 개의 기록이 같던 다르던 무슨 문제이겠는가만은 나에게는 풀어야 하는 숙제 였다.
그러나 《조선 예수교장로회사기 상》227쪽에 보면 1906년에 용정시교회가 설립되었다. "북간도에 용정시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구례선이 북만주와 서백리아 등지에 산재한 조선인의게 전도할 목적으로 자기의 부친 업아력과 조사 홍순국으로 동행하며 복음을 전할 시에 신주한 자와 타지에서 당지에 래우한 신자들이 합하야 집회예배하난 중 영수 구춘선과 집사 이보연이 인도인이 되야 교회를 성립하니 차로부터 용정은 전도 근거지가 되야 선교사 구례선, 업아력, 부두일, 매길노, 박걸 등이 윤차순회하난 중 교인이 증가하야 교회가 점차전진하니라"
그러나 1907년 사기의 보고에는 와룡동교회만 나오고 용정중앙교회는 나오지 않는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에서도 용정시교회는 언급되지만 용정중앙교회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연변문사자료 자료 제 8집 123쪽에 "룡정중앙교회는 룡정교회가 꾸린 광동서당을 접수하여 영신학교로 고치였는데 학제는 초등과를 4년으로 하고 고등과를 2년으로 하여 룡정에서 처음으로 6년제 현대교육을 실시하였다. 제 1임 교장은 조희림이었고 후에 카나다 선교사 바클과 스코트가 교장직무를 역임하였다.
1913년, 룡정중앙교회에서는 김내범 목사를 청하여 제 1차《당회》를 열고 김계안을 제 1임장로로, 강두화를 조사로 박례헌을 목사로 정하였다. 후에 리호준이 정식으로 목사가 되였다."
이 문헌 역시 용정교회와 용정중앙교회가 다른 교회로 묘사되고 있다.
연변문사자료집의 '용정교회'를 세운 홍순국은 구례선 선교사의 조사로서 이미 북간도에 여러 차례 다녀갔으므로 설립자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박무림은 1906년 여름에 이상설, 이동녕, 여준, 정순만 등과 함께 들어와서 '서전서숙'을 세우고 교사로 일한 사람으로서 교회 지도자 일 수는 있지만 설립자가 되기에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용정중앙교회를 설립했다고 하는 정재면의 경우에는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44쪽에 보면 1909년 5월에 박무림 숙장의 추천으로 명동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는바 1907년에 용정중앙교회를 세울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로회사기에 나오는 용정시교회 설립자 구춘선은 1897년에 북간도 양수천자 일대로 이주하였으며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 용정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용정에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어 합류하였고 구례선 선교사와 홍순국 조사의 용정 방문 후에 1906년에 용정시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북간도 독립운동을 견인해온 용정을 비롯한 캐나다장로회 산하의 동만주(북간도)교회들과 간도국민회는 '용정 3.13만세 시위',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그리고 청산리전투에 혼신을 바쳤고 그 결과로 1920년 일제의 대학살의 지옥에 들어갔다. 용정의 교회는 동만주(북간도)교회의 모교로서 독립운동과 수난에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동북삼성이 공산화되면서 모든 것들이 지워지고 헐어지고 사라졌다.
한국교회는 거리적으로 너무 멀고 중국과 북한은 교회가 벌인 독립운동에 무관심하고 현지 조선족에게 기독교 연구는 너무 위험하였다. 그래서 70여 년 동안 동만의 교회들과 교회의 활동은 방치되었다.
용정에 용정교회와 용정중앙교회가 따로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것 자체가 그런 반증일 것이다.
이제 관심을 가지고자 하나 그 땅이 여전히 부자유한 이웃 나라요, 도움받을 연구서적이 별로 없다.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이라는 책 156쪽에 나오는 사진에서 용정시교회와 용정중앙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진은 용정중앙교회 약사. 1934년 머릿돌에 넣은 것으로 현재는 용정종교국에 보관되어 있다.
다음은 사진의 내용을 한국고전번역원의 조태영교수님께서 번역해주신 것이다.
《용정중앙교회사략》
"햇빛이 동으로부터 서으로 두루 빛의임같이(비침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동만(주)에까지 빛이샤(비쳐서) 주후 1906년에 카나다 장로회파 선교사 구례선씨와 동사하든(함께 일하던) 고 안수용 조사가 내룡하여(용정에 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엿고
조선으로부터 교인 박무림 류기연 한봉의 등 제씨가 이래한(옮겨온) 후로 용정에 교인이 점증하엿더라(점차 증가하였더라).
선교사 구례선씨가 입래하여(들어와서) 구춘선 이보영 이보연 등 제씨의게(여러 사람에게) 처음으로 시세한(세례를 베푼) 후 선교사 구례선 부두일 제씨가 순시하게(두루 다녀 살피게) 됨에 비로소 카나다 장로파와 연락되다.
후 일년간 감리교회에 도라갓다가 1908년에 다시 카나다 장로교회에 속함애 권서급 김순문씨가 시무하다. 익년에(다음 해에) 선교사 매길로씨 동산 미슌(미션)기지를 매입하니 교회 근거가 점고하여지다(점차 튼튼하여지다).
동년(1909년)에 김계안씨가 조사로 내룡하고 김영제 목사가 순회목사로 관리하다. 당시 용정에는 신자 이십여인이 현 야소교서원점 일 초가에 회집 예배하엿는데 당시 집사로는 이보연씨가 시무하엿다.
1910년에 현 영신학교 기지에 예배당으로 초가 일 동을 건립하고 차를(이를) 예배당 겸 학교로 사용케 되니 교회 창립 당시로부터 교육에 주력하엿더라.
1913년에 용정교회가 김내범 목사를 청빙한 후 니어(이어) 당회가 조직되니 김계안씨가 첫 장로로 피택되다.
주후 1916년에 우금(지금까지) 사용하든 예배당을 건축하엿는데 당시에는 김정흥씨의 공헌이 불소하엿다.
1917년에 김내범 목사가 사임한 후 강두화씨가 조사로 시무하다가 1918년에 박례헌 목사가 피직되어 십이년간 시무하엿다.
중앙교회는 동만(주)에 모교회이니 맟이(마치) 토성보, 동산, 북부, 성양교회는 다 그 지교회이로다.
1930년부터 2년 간은 이태준 목사가 시무하엿고 일구삼이년 6월부터 문재린 목사가 담임목사로 시무 중이다.
주후 1934년 3월 3일부터 십일간 길선주 목사를 청하여 대부흥회를 개최하엿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샤 신신자(새 신자) 수백인을 내고 건축연보 사천팔백여원을 수합케 됨에 이것으로 예배당 팔십 평을 건케(세우게) 됨을 하나님끠 영광 돌릴 수밧게 없다. 금번에도 김정흥씨 공헌이 막대하도다.
본 교회 현 직원은
목사 문재린
여전도사 김석복
장로 한덕일 서인한 이봉구 강군선 김택은 임득률
집사 남 박성구 김 렬 김성호 이영식 김봉길 최승재 박윤수 문기서
(집사)여 김병란 석수영 김준행 문매라 권경일 김치복 박영순 서기 김홍겸 정관빈 이숙경 김순이 이상 "
"편십인 85⅓"
'용정중앙교회사략'은
용정시교회가 용정중앙교회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연변에서 나온 책들에서는 영신소학교를 용정시교회의 산하 학교로 기술하는데 용정중앙교회가 영신학교가 자기들이 세운 학교라고 밝힌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거짓 주장을 할 일이 없고 용정시교회가 용정중앙교회 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한 개의 교회에 두 개의 이름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처음에 용정시교회로 불리다가 용정중앙교회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용정시교회는 장로회사기에 등록되었지만 용정중앙교회는 부재한 것이 그 근거이다.
용정중앙교회 위치에 대하여 가늠해볼 수 있다. 1910년 영신학교 기지에 교회를 세웠다고 했는데 후에 영신학교는 운영난으로 1922년에 일본인 히다까 헤이지로에게 팔렸고 일본인은 그곳에 광명학교를 세웠다. 윤동주와 문익환이 평양의 숭실학교가 문을 닫자 용정으로 돌아와서 공부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명학교 유지를 추적하면 용정중앙교회 위치를 알게 될 것이다.
결론 :
북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용정이었고 용정 독립운동의 중심지는 용정중앙교회였다.
그러나 밝혀진 바에 의하면 용정(시)교회가 용정중앙교회로 이름이 바뀌었으므로
두 교회가 다 용정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024년 4월 19일
4.19 혁명기념일 64주년에
우담초라하니
참고문헌
*호이전,문홍복 주필,《연변문사자료 8집, 종교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김택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6집, 교육사료전집》,내부발행, 1988
*차재명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윌리엄 스코토 저《한국에 온 캐나다인들》,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송우혜 저,《윤동주평전》,서정시학, 2015
*문영금 문영미 엮음《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삼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