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교육대학원 교육심리전공의 신입생 환영회가 학교 근처의 음식점에서 있을 예정이다. 이 행사는 대학원 자치회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교수들도 초청받아 신입생들과 첫 인사를 나눈다. 학생회 측으롤부터 미리 연락을 받았고 다른 일도 없으니 참석할 생각이다.
작년 이맘때도 같은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사전에 아무런 말이 없다가 당일 불쑥 참석하러 오란다. 그날은 마침 우리 아이들 중 하나가 아파서 강의 마치고 곧바로 집으로 오라는 아내의 전화가 이미 여러 차례 와 강의 중에도 마음이 심란했던 차였다. 상황이 그러하니 강의 마친 후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해달라는 학생 대표의 말을 들을 때는 “사정이 있어 가지 못하겠다. 죄송하며, 다른 교수님들은 모두 가실 테니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란다.”고 정중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귀가를 서두르는데 마침 선배 교수님도 연구실을 나서고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발걸음을 급히 하는데 뒤에서 그분이 부른다.
“김 교수! 뭘 그리 급히 가나? 신입생 환영회에 가는 길 아닌가?”
“저는 사정이 있어서 참석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못 간다고? 누군 시간이 남아서 가나? 자네는 멸사봉공이란 말도 모르나? 아무리 개인적 사정이 있어도 공적인 일인데 빠지면 되나? 학교의 녹을 먹는 사람이 말이야. 요새 젊은 사람들은 너무 개인주의가 돼서 탈이야.”
순간 속에서 확 치밀어 올랐다. 안 그래도 지금 애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운데 뭐, 멸사봉공이 어떻고, 학교의 녹을 먹는 사람이 어째? 그래, 한번 따져보자. 오늘 행사가 과연 공적인 일로서 학교의 녹을 먹는 사람은 꼭 참석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신입생 환영회는 학생들의 자치 행사이며 교수들은 초청 손님일 뿐이다. 게다가 미리 초청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직전에야 구두로 들었을 뿐이지 않은가? 더구나 지금이 몇 시인가? 학교의 공식 휴무일인 토요일일 뿐 아니라 – 우리 학교는 토요일에 교육대학원 수업을 한다. – 오후 6시가 넘었다. 내가 학교에서 봉급 받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정해놓은 시간도 없이 밤낮으로 학교 일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은 얼마나 멸사봉공했지? 수업계획서 제출이나 성적 처리 같은 중요한 일도 제때 처리하지 않아 조교와 학생들 골치 썩이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당신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지금 부지런히 그 자리에 가는 것도 오로지 공짜 술 한잔 얻어먹기 위해서란 걸 뻔히 아는데 뭔 소리? 속이 빤한데 웬 ‘멸사봉공’이 나오고 ‘학교 녹을 먹는 사람’이란 말이 나오나? 다른 일도 아니고 애가 아파서 응급실 데려가려는 사람에게 그게 할 소린가?
그 뒤로 나는 ‘멸사봉공(滅私奉公)’, ‘선공후사(先公後私)’, ‘녹을 먹는 사람이....’ 같은 말만 들으면 두드러기가 돋는다. 우리가 일제 가미카제 특공대도 아니고 여기가 북한도 아닌데,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왜 툭하면 멸사봉공인가? 김일성이 1977년 9월 5일 발표한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의 내용이 바로 ‘모든 학생들이 개인주의․이기주의를 없애고, 집단주의 원칙에 따라 사회와 인민의 이익, 당과 혁명의 과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도록 교양한다.’이다. 딱 멸사봉공 아닌가?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
반면 우리 대한민국은 헌법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의미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헌법의 이념적 출발점이자 핵심적 가치이며, 인간의 존엄성 보장은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국가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가 있거나 목적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더욱 잘 실현할 수 있는 도구의 기능을 가질 뿐이다. 국민의 생명을 경시하는 국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가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덕발달이론’의 대표적 학자 콜버그에 따르면, 밑도 끝도 없는 ‘멸사봉공’의 강조는 ‘도덕발달의 인습적 단계’에 해당된다. 그 단계에 머문 사람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데, 법과 도덕의 외적 형식에만 집착할 뿐 그 바탕이 되는 ‘개인의 기본권 존중’, ‘사회적 합의와 계약으로서의 법’, ‘보편적 인류애와 공생공존의 추구’ 등과 같은 기본 원리는 전혀 모른다.
콜버그에 의하면 도덕성은 인지능력의 성장과 더불어 일정한 단계를 따라 발달하는데, 그렇다고 나이 먹을수록 저절로 향상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능과 도덕성과 인격이 초등학생 수준에 불과한 사람, 중학교 수준에 머문 사람, 고등학생 수준에 가까스로 도달한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다.
오늘 마침 교육대학원 신입생 환영회가 있다 하니 불현듯 작년 일이 생각나 잠시 흥분했다. 앞으로 내 앞에서 ‘멸사봉공’이란 말 함부로 꺼내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