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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36. [역경의 열매] 이승율 <1-25> 방황 끝에 만난 하나님… 오직 선교의 길로
이승율 장로가 지난 2월 한국CBMC 중앙회장에 선출된 뒤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나는 올해 고희(古稀)다. 동년배들이 거의 다 사회적으로 은퇴한 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지상명령을 주셨다. 지난 2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에 선출된 것이다. 임기 2년이다.
한국CBMC는 국내에 273개, 해외에 130개 지회를 둔 글로벌 조직이다. 크리스천 기업인과 전문인 75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궁극의 진리를 탐구한답시고 방황했다. 어린 시절 너무 일찍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다. 청소년기 반항 기질이 내 안에서 자라났고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결국엔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맛봤고 세상 속을 부유하면서 살았다. 그 시절 나는 괴테의 파우스트 화신이라고 생각했었다.
결혼하고 뒤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불교철학으로 진리를 찾고자 했고, 사업의 길에 들어서도 술과 담배에 절어 살면서 하나님을 멀리했다.
고1 때 만난 아내는 25년간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고 아이들의 금식기도와 간구가 더해져 나를 주님 곁으로 인도했다. 마흔셋에 하나님을 만나는 지각생이 된 셈이다.
가족들 손에 이끌려 처음 간 기도원에서 나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불교철학과 파우스트를 통해 얻고자 했던 진리를 극적으로 체험했다. 그토록 갈구했던 것들을 ‘실로암의 눈먼 소경’ 이야기(요한복음 9장)를 통해 비로소 찾은 것이다.
거듭난 이후 나의 길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역의 길로 바뀌었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의 품꾼’ 비유처럼 하나님은 오후 늦게 나타난 나를 똑같이 귀하게 써주셨다.
나는 30년 가까이 서울을 홈베이스로, 평양과 옌볜 베이징 상하이 우루무치(중국),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알마티(카자흐스탄), 이스탄불(터키) 등 한반도와 동북아, 그리고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자비량 선교사역을 위해 달려왔다. 코스타(KOSTA·해외유학생수련회)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내 외국인 학생들을 섬기는 국제학생회(ISF) 설립에까지 발을 들여놓았다. 무엇보다 옌볜과학기술대와 평양과학기술대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눈을 떠 필생의 선교 비전으로 삼게 됐다.
나는 사역의 과정에서 먼저 무엇을 하겠다고 계획한 일이 없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그런 길로 인도하셨다. 돌이켜보면 암흑 속에서 방황하긴 했지만 남들이 가는 길을 갔다면 옌볜과기대와 평양과기대, 한반도와 동북아가 나의 사명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늦게 나타난 나를 품꾼으로 써주시고 먼저 온 자들과 동일한 품삯까지 챙겨주셨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나를 보고 사람들은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말씀이 실감 난다”고 할 정도로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나의 사명에 중단이란 없다. “하나님, 제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jaehojeong@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승율 <1> 방황 끝에 만난 하나님… 오직 선교의 길로
* [역경의 열매] 이승율 <2> 원하던 중학교 못 가 비뚤어진 생활
* [역경의 열매] 이승율 <3> 경북고 야구부 주장 맡아 삶의 원칙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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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이승율 <25·끝> 베드로를 닮은 나… 그물 던질 '깊은 곳'은 북한
약력=△1948년 경북 청도 출생 △동국대(학사), 동국대대학원(석사), 중국옌볜대학(석사), 중국중앙민족대학(박사) 졸업 △옌볜과기대·평양과기대 대외부총장 역임 △반도이앤씨 회장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이사장 △한국기독실업인회 중앙회장 △온누리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이승율 <2> 원하던 중학교 못 가 비뚤어진 생활
‘이중 응시 탈락’ 규정에 걸려 오랫동안 정신적 고뇌의 근원으로
1998년 4월 이승율 회장의 아버지 칠순 잔치 때 부모와 부부가 함께한 사진. 아버지는 1년 후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입원 중에 주님을 영접했다. 왼쪽부터 아버지 이종영, 어머니 박정리, 아내 박재숙, 이 회장.
나는 1948년 경북 청도에서 전통적 유교 집안의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종영과 어머니 박정리는 일제 강점기 소학교 동창이셨다. 두 분은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 어머니가 반장을 했다고 한다.
외동아들로 귀하게 태어난 아버지는 대구에 있는 경북중에 유학을 간 반면 자식 많은 집안의 다섯째 딸인 어머니는 진학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차출돼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살아 돌아와 경상북도 교육공무원이 되셨다. 유가의 가풍에서 자란 아버지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개인전을 열고 대구화단에서 평가받을 정도로 글씨와 그림에 능하셨다.
어머니는 소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똑똑하셨다. 결혼 이후 불교에 귀의해 대구불교여신도회 지부 회장을 지내셨다. 전국 주요 사찰마다 내 이름을 올리고 불공을 드릴 정도로 유명한 보살이었다.
그러니 나는 유교와 불교의 가풍을 이어받고 자란 셈이다. 부모의 훈계와 질책을 받으며 자랐고 맏이로서 의무감이 컸던 기억이 난다.
청도 고향에서 2학년 때 대구 중앙초로 전학했다. 아홉 식구가 셋방살이를 했다. 그러다 보니 4∼6학년 땐 친구 집에 가서 함께 공부도 하고 먹고 자는 일이 많았다. 공부 잘하는 반장이었기에 통했다. 운동도 잘해 5학년 때엔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 시절 유달리 탐구정신이 강하고 한번 일에 몰두하면 끝을 봐야 했던 성격이었다.
당시는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역 명문 경북중에 응시했고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기대했다. 중앙초에서 한 해 60∼70명씩 경북중에 합격했는데 나는 최상위권 성적에 체력장도 우수했다.
그러나 탈락했다. 선생님들의 권유로, 체력장 특차전형을 처음 도입한 경북사대부중에 응시한 게 화근이었다. 경북사대부중 면접일과 경북중 필기시험일이 겹치면서 ‘이중응시 탈락’ 규정에 걸린 것이다. 다시 도전하겠다고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을 찌르던 내 자존심은 무너졌다. 큰 좌절이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이 후기(2차)인 D중에 응시했다. 수석 합격했다. 입학식은 참석했지만 그 뒤로 등교하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한사코 막았다. 두 달 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교장을 만나러 갔다. 경북중에 보결(補缺)로 들어가겠다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학생이 2등만 했어도 허락하겠어요. 수석 학생을 어떻게 남의 학교에 보냅니까.”
이번엔 D중 교장이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D중에 주저앉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집안에 있으면 필요한 말 아니면 한마디도 안 하는 반면 밖에 나가면 내 세상처럼 돌아다니는 상반된 성격으로 커갔다. 중2 때부터 담배를 물고 다녔고 불량서클에 가입해 집단 패싸움을 벌였다. 이 일로 7∼8명이 퇴학과 정학 처분을 받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벌을 모면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수석 입학생인 데다 성적이 우수한 편이고 각종 과학경시대회에서 수상한 덕을 본 것 같다.
이처럼 너무 일찍 찾아온 좌절과 실패의 아픔은 너무 오랫동안 내 인생을 그늘지게 한 덫이 되고 정신적 고뇌의 진원지가 됐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3> 경북고 야구부 주장 맡아 삶의 원칙 배워
학업은 충실하지 못해 대입서 좌절… 친구 자살 죄책감에 도망치듯 군 입대
이승율 회장(뒷줄 왼쪽)이 1965년 경북고 야구팀 주장으로 활약했을 당시 김찬석 감독(뒷줄 가운데) 및 선수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중3이 되니 ‘그래도 경북고는 가야지’ 싶었다. 당시 경북고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고였다. 정신 바짝 차리고 1년 공부한 끝에 당당히 합격했다.
경북고 입학 후 새날동지회에 들어갔다. 새날동지회는 이승만정권의 독재정치가 배태한 시대적 산물이다. 1960년 4·19혁명 직전인 2월 28일 대구고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3학년 학생들은 정부와 여당의 부당한 선거 개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2·28 대구학생의거’ 사건이다. 이들은 대학 진학 후 새날동지회를 결성했다. 경북대 대구대 계명대 학생을 주축으로 대학팀,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대구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을 모아 고교팀을 각각 구성했다. 나는 2기 회원이 됐다.
중학교 입시 좌절로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새날동지회를 통해 분출됐다. 시대를 변화시키는 사회사상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괴테의 ‘파우스트’였고 가장 존경했던 위인은 원효대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영혼을 팔아서까지 진리를 얻고자 했던 파우스트, 현실 참여를 통해 대중을 구원코자 했던 원효대사, 개혁주의적 민족운동가 안창호 선생을 동경했다.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과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보들레르의 ‘악의 꽃’,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 심취했다. 대구의 유명한 ‘돌체’라는 막걸릿집이 아지트였다.
1학년 때엔 등산부장을 맡아 팔공산 가야산 주왕산 속리산 등 태백산맥을 따라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쏘다녔다. 이를 통해 신라 화랑의 후예로서 호연지기를 배웠고 경북지방 지도자들과도 안면을 익혔다.
2학년 때 야구부 창단 멤버로 들어가면서 나의 반항적 기질은 조금 다듬어졌다. 창단팀 주장을 맡으면서 팀워크의 중요성, 전략의 필요성, 권위에 대한 승복 등 귀중한 삶의 원칙을 배웠다.
이처럼 고교시절 가졌던 화려한 꿈과 실험정신은 충실하지 못했던 학업으로 인해 큰 좌절을 겪어야 했다. 연이어 서울대 입시에 실패하고 삼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절망의 와중에 지금도 잊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됐다. 경북고에 수석 입학한 중학교 동창이 자살한 것이다. 그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성적이 뛰어나고 온순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학업을 팽개친 나와는 대조적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친하게 지냈다. 나의 외향적 성격과 그 친구의 내성적 성격이 묘한 콤비를 이루었다고나 할까. 고3이 되자 그 친구 누나의 권유로 그와 함께 6개월간 하숙했다. 그 친구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나는 매일 밤늦게 술 마시고 들어와 개똥철학과 궤변을 늘어놓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서울대에 낙방하고 재수해 연세대 인문계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 길로 우리 사이는 멀어졌다. 소문으로는 사귀던 여학생과 헤어지면서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가에 들렀을 때 친구 누나는 나를 보자 멱살을 잡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내 동생 니 때문에 죽었다. 니가 죽였어.” 그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삼수할 생각도 싹 사라졌다. 나는 그의 자살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자책감으로 한동안 주체할 수 없는 혼돈에 빠졌다. 그래서 도망치듯 군에 자원입대했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4> 종교 문제 극복하고 ‘구원의 여인’과 결혼
제대했지만 돈벌이 없는 절박한 상황… 결혼 전 방황할 때 아내가 보듬어줘
이승율 회장은 1974년 1월 고1 때 만난 아내 박재숙과 사귄 지 10년 만에 결혼했다. 왼쪽부터 부친 이종영, 처조부 박수관, 이 회장 부부, 조부 이형기, 장인 박광.
도망치듯 군에 가 있던 3년이 나의 패배의식과 허무주의를 치유하진 못했다. 제대 후 현실은 여전히 암담했다. 고졸 학력에 돈벌이도 없었다. 친구는 끊어졌고 나에 대한 가족의 기대는 사라졌다. 인생을 새 출발할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때 찾은 길이 결혼이었다. 1974년 1월 27살에 아내 박재숙과 결혼했다. 아내는 당시 10년간 내 곁을 지켰다. 나의 지독한 방황과 패배와 좌절을 끌어안아 주고 용기를 북돋아줬던 구원의 여인이다.
아내와 첫 만남은 경북고에 합격한 후 입학식이 있기 전 정월 대보름이 가까웠을 때다. 친구가 먼 친척뻘되는 여학생을 소개시켜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자 꾀를 냈다. 당시 영남지역에는 정월 대보름 때 복조리 파는 관습이 있었는데 복조리 장사로 아내 집에 접근한 것이다.
“사실은 제가 복조리 장사가 아니고요, 따님 만나보고 싶어 왔심더.”
복조리 값을 건네려던 아내의 어머니는 내 본색을 알고 펄쩍 뛰면서 야단치셨다. 한참을 옥신각신했지만 나는 막무가내였다. 어머니는 나의 집안 내력을 들어보고 나서야 다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래, 그럼 니가 교회 나가면 우리 집안에 오는 것 허락하겠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 쉬운 조건이었다. 바로 약속했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마흔 셋에야 나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장인은 일본에 계셨다. 아내가 아주 어릴 때 일본에 밀항했다. 해방 전 만주 철도 건설현장에서 토목기술을 익힌 장인은 해방 후 전후복구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토목회사를 운영할 만큼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당시 한·일 간 국교 단절로 왕래가 어렵다보니 아내는 고3이 돼서야 아버지와 상봉했다.
그러니 남편 없이 어린 아내를 키운 장모의 고생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아내의 집안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자손 순천 박씨 대종갓집이었다. 아내의 조부는 안동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다. 대종갓집을 지킨 장모는 아내가 3살 때 병이 났다. “교회 가면 병 고친다”는 주변 말을 듣고 아내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는 중학교 때 대구로 나왔다. 장모는 난전에서 장사하며 아내를 교육시켰다.
아내의 순정은 강했다. 고교 시절 실존주의 계곡에서 허우적거리고 ‘재수한다’ ‘삼수한다’ 할 때도, 친구 자살 충격으로 모든 것을 접고 군대로 달려갔을 때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군에 있을 때 아내는 효성여자대학(현 대구가톨릭대)을 졸업했고 제대했을 땐 고려대 대학원까지 마친 상태였다. 빨리 시집가라는 장인의 재촉을 피해 서울로 올라와 대학원에 다녔다. 결국 아내의 순정은 부모를 이겼고 나는 제대 후 장인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았다.
이번엔 나의 부모가 아내를 불러 엄명을 내렸다. 어머니가 대구불교여신도회 간부를 하셨던 분 아닌가. “우리 집안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너는 교회 나가면 안 된다.”
이게 웬일인가. 아내도 결연했고 딱 부러졌다. “그러면 결혼 못하겠습니다.”
결국 부모님이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 너 혼자만 나가라. 남편이나 자식에게 교회 가자고 하면 안 된다.”
이런 다짐을 받고 아내는 일단 시집을 왔다. 결혼식 풍경은 매우 독특했다. 한쪽에는 교회 목사와 성도들이 앉아 있었고 다른 쪽에는 승려와 불교 신자들이 앉아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5> 전공 불교철학에 회의… 세속적 성공에 몰두
사업 번창 중 교통사고 ‘하나님 경고’… 거액 헌금 후 MB사저 공사 등 수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 논현동 사저. 이 전 대통령이 1982년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당시 이승율 회장이 운영하던 회사가 조경공사를 맡았다. 국민일보DB
결혼해서 첫아이를 낳고 난 이듬해인 1975년에서야 나는 비로소 대학생이 됐다. 동국대 불교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불교철학을 선택한 것은 탄허(1913∼1983) 선사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탄허를 만나 공부해서 철학교수를 하면 실존주의를 뛰어넘는 사상을 정립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탄허의 정규과정 강의시간에 배우고 개인적으로도 따라다니면서 수학했다.
이 시기 나는 세속의 모든 인연에서 벗어나 있었다. 생활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내와 둘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안에서 조금씩 보내주는 돈으로 겨우 살았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후 서울 갈현동 언덕 막다른 골목집에 전세 100만원을 주고 살았는데 어느 날 집달리(집행관)가 들이닥쳤다. 집주인이 사채를 써 우리 전세금마저 떼일 형편이었다. 채권자의 제안을 받고 이 집을 사서 한 달 수리해 내놓았더니 금세 팔렸다. 공사비는 물론이고 전세금을 되찾고도 100만원의 수입이 생겼다. 이 돈이 지금 운영하는 회사의 종잣돈이 됐다.
1978년 2월 아내의 전공(조경)을 살려 서울 강남구 영동시장 앞에 40㎡(약 12평)짜리 사무실을 냈다. 당시만 해도 조경 사업은 초창기였다. 설계와 공사를 나눠 각각 종합환경계획연구소와 반도조경회사를 설립했다. 개업한 뒤 2년간 영업실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다. 한국전력 토목부장을 만나 일본의 사례를 들어 평택화력발전소에 조경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설계를 공짜로 해주는 대신 시공은 반도에서 맡게 해달라는 턴키베이스(일괄수주계약) 조건이었다. 이 공사에서 제법 큰돈을 만졌다.
나는 드디어 세속적인 성공에 조금씩 자신감(?)을 갖게 됐다. 당시 나는 대학원에 다녔는데 불교철학에 회의가 들던 때였다. 불교는 화두(질문)는 많았지만 답을 주지 못했다.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니 세속적인 성공이 마약 같은 유혹으로 다가왔다.
이런 나의 오만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이었던 것일까. 갑자기 사고가 났다.
1980년 빗길에 아내와 택시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무려 80바늘이나 꿰맸다. 석 달 이상 부부가 입원했다. 그사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거둬 가셨다. 집 짓다 부채까지 떠안고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는 나에게 눈물로 신앙생활을 권면했고 때만 되면 기도원에 가서 사나흘씩 묵고 왔다. 그러나 나는 외면했다.
1년 넘게 생활하던 비닐하우스에서 탈출하게 된 1981년 가을, 아내가 추수감사절 헌금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무심코 그러라고 했는데, 아내는 500만원을 감사헌금으로 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려운 그 시절에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끝난 일이니.
이듬해 우연히 현대건설로부터 조경 요청이 들어왔다. 이명박 당시 사장 집(서울 논현동 사저)이었다. 그 뒤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서울 성북동 영빈관, 계동 현대사옥, 경기도 양평 별장의 조경과 충남 서산간척지 산림복구 등을 줄줄이 맡았다. 이때 회사가 많이 성장했다.
나는 믿음을 가진 1990년에서야 아내의 기도와 헌금이,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눅 21:1∼4)’임을 알았다. 하나님은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채워주셨던 것이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이승율 <6> ‘아내의 기도’ 25년 만에 새 피조물로 거듭나
아이들 “아빠 기도원 가요”에 동행… ‘실로암 기적’ 듣고 43세에 교회 나가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전경. 이승율 회장은 1990년 1월 1일 가족 손에 이끌려 이 기도원에 갔다가 ‘실로암의 눈먼 소경’ 이야기를 듣고 회심했다.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제공
나는 마흔셋이 돼서야 교회에 나갔다. 고1 때 만난 아내가 25년 기도한 가운데 아이들의 금식기도가 나를 인도했다.
1989년 12월 중순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갔더니 세 아이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큰아들 동엽이 중3, 둘째 동헌이 중1, 막내딸 현주가 초등 3학년이던 때다. 큰아이가 말했다. “아빠, 스키장도 좋지만 올해는 기도원에 가요.”
기도원이란 단어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런데 왠지 싫지는 않았다. 당시엔 휴거(携擧·공중들림)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아이들이 아빠를 걱정해서 기도원에 가자고 한 것이었다. “그래 가보지 뭘. 사람 잡아먹는 데도 아닌데.”
아내와 약속했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댔겠지만 아이들과 한 약속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연말이면 아이들과 스키장에 가서 며칠씩 놀다오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다녀왔다. 이곳에선 매년 초 2박3일간 여의도순복음교회 실업인선교연합회가 주관하는 신년축복성회가 열렸다.
1990년 1월 1일 새벽 온 가족이 짐을 챙겨 기도원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 담배를 피우는 건 아니다 싶었다. 당시 하루에 한 갑 반 내지 두 갑씩 담배를 피웠다. 논두렁길에 담배와 라이터를 던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첫 변화였다. 남들은 금연하려고 사투를 벌이는데 난 중3 때부터 달고 살던 담배를 한순간에 끊었다. 금단현상을 겪지 않았다. 체중도 늘지 않았다. 아멘!
금식 첫째 날은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둘째 날이 됐다. 예배 중간 쉬는 시간에 나는 어느 장로에게 물었다.
“실로암이 무슨 뜻입니까? 암자 이름도 아니고.”
우리 가족이 예배드린 곳은 실로암 성전이었다. 기도원 초입 오른쪽 낮은 지대에 허름하게 자리한 제2성전이었다. 대성전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장로는 웃으면서 성경의 요한복음 9장을 펼쳐 들고 설명해줬다.
“성경에 나오는 연못 이름이에요.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발라준 다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대로 가서 씻었더니 눈을 뜨게 된 기적의 장소가 바로 실로암입니다.”
이 장면이 나는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그시 감고 있던 내 눈앞에 파노라마 같은 환상이 펼쳐졌다.
실로암 연못은 기드론 계곡 낮은 밑바닥에 있었다. 예수님은 시온산 언덕 위에서 소경에게 연못에 내려가서 눈을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험한 비탈길을 기어서 내려갔을 소경의 고통이 느껴졌다. 이어 눈이 떠지자 언덕 위 푸른 창공 속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 소경이 맛봤을 감격과 환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젊은 날 방황과 절망, 고뇌에 빠졌던 회한이 그대로 전해졌다.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내가 아닌가.
나는 그때의 내 마음을 표현한 글에 ‘저 밑바닥에서 벽공(碧空·푸른창공)으로’란 제목을 달았다. 파우스트가 목숨 걸고 진리를 탐구하려다 좌절하는 마지막 순간, 구원의 여인 그레첸(Gretchen)에게 이끌려 하늘로 올라가며 외친 구호가 바로 이 제목이다. 구원받은 파우스트가 바로 나의 모습으로 오버랩됐다.
불교적 해탈과 기독교적 부활을 동시에 깨닫는 신비한 환상적 체험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 후 나의 진로는 180도 바뀌었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7> “집안 전도 금지” 약속한 아내, 꾸준히 집안 구원 기도
대구에서 혼자 살고 계시던 어머니 “예수 믿어야겠다”… 제사도 없애
이승율 회장이 지난 2월 16일 설 명절 때 형제자매들과 함께 명절 제사 대신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다. 작은 사진은 이 회장 모친 박정리 여사. 이승율 회장 제공
아내는 나와 결혼할 때 시부모에게 ‘집안 전도 금지’라는 약속을 해야 했다. 하지만 결혼 후 하루도 빠짐없이 하던 기도 제목은 집안 구원이었다.
나는 경기도 파주 오산리기도원에 다녀온 뒤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했다. 그제야 안 사실이지만 아내는 오래전부터 내 이름으로 교회에 헌금을 하고 있었다. 그 기록이 남아있어 나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집사 직분을 받았다. 3년 후 안수집사를 받고 1999년 장로로 세워졌다.
교회에 나가면서 나의 가정은 국민일보에 매일 연재되는 ‘가정예배 365’의 안내에 따라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주일성수를 빠짐없이 하고 오산리기도원 신년축복성회엔 온 가족이 10년 내리 참석했다.
세 자녀는 아내의 인도로 태어날 때부터 신앙을 가진 모태신앙인이다. 아내는 세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줄 때 성경 구절을 적은 쪽지를 같이 넣어줬다. 잠을 잘 때도 성경을 읽어주고 손잡고 기도했다. 아이들은 아내의 신심을 보고 자라다 보니 신앙의 기초가 올곧게 잡혀 있다. 나도 아이들의 권유에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니 ‘아버지를 인도했다’는 자부심이 엄청나다. 나는 지금도 세 자녀, 특히 초등학교 3학년이던 막내딸이 아버지를 위해 울면서 기도하던 모습을 가슴에 늘 담고 있다.
이런 믿음 가운데 성장한 세 자녀가 각자 가정을 이뤄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됐고 손주 8명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고 있으니 나는 ‘8복을 받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7남매 가운데는 첫 번째로 막내 여동생이 미국 유학을 가서 신앙을 가졌다. 이어 99년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 주님을 영접하고 별세하신 것이 집안의 두 번째 큰 변화였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대구에 혼자 살고 계시던 어머니가 2012년 배가 아파 집 근처 병원에 입원했다. 주말에 우리 부부와 형제들이 병문안 갔을 때였다.
“예수를 믿어야겠다. 너희도 다 교회 나가고 예수 믿어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완고하게 기독교를 반대하시던 분이어서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봤다. 어머니는 손아래 친구가 중병에 걸렸는데 교회에서 기도 받고 나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새겨두고 계셨다. 그러다 자신이 아프니까 결심을 굳히신 것이었다.
너무나 감격한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밤늦게 서울로 올라왔다. 그사이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 어머니 곁을 지켰던 약사 출신 제수씨가 병원에서 처방한 주사액에 의문이 들어 의사인 언니에게 물었다.
“혈액 곰팡이 제거하는 약이다. 그냥 놔두면 큰일 나겠다.”
그날 밤 의사(포도나무병원 원장)인 큰아들 동엽이가 대구에 내려가 어머니를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모셨다. 급성 패혈증이었다. 6개월을 입원했다. 입원 중에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심방을 왔고 설교를 들으면서 저절로 성경을 알게 됐다.
퇴원 후 어머니는 바로 새벽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그야말로 극적인 변화가 또 찾아왔다. 내가 “이제 제사 지내지 말고 추도예배로 바꾸자”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가 흔쾌히 승낙하신 것이다. 수시로 열리던 기제사를 9월 백중에 묶어서 단 한 번의 추도예배로 드리기로 했다. 형제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걸로 설날과 추석 명절제사를 대체했다.
절에 다니셨던 어머니를 변화시키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사 문화를 바꿔놓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8> 조용기 목사 해외성회 수행… 글로벌 선교 눈떠
굿피플 설립 제안 초대 총무 맡아, 곡절 끝에 ‘첫사랑 교회’ 떠나게 돼
이승율 회장(오른쪽)이 1993년 3월 케냐 나이로비 성회를 마치고 귀국길에 경유한 프랑스 파리에서 조용기 목사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입교하면서 아내가 봉사하고 있던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에 가입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 이 단체는 조용기 목사의 해외선교를 지원하고 현지에서 봉사하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연합회에서 나의 멘토 역할을 하신 분이 이병훈 장로다. 서울시버스조합 이사장을 지낸 이 장로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다. 나는 이 장로를 도와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전국대회는 1993년이 처음이었다. 그 전해 8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전국대회에 참석한 후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1995년 8월 경북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개최한 전국대회에선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던 기억이 새롭다. 1000여명의 순복음실업인이 그해 3월 개교한 한동대를 찾아가는 일종의 ‘성지 방문’ 기획이었다. 갓 태어난 하나님의 대학이니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격려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일행은 점심값 1000만원을 아껴 헌금 명목으로 학교에 기부했다.
조용기 목사를 본격 수행한 것은 내가 해외선교지원팀에 발탁되면서다. 남미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와 인도 러시아 호주 일본 등 웬만한 곳은 다 조 목사를 수행해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조 목사의 영적 능력,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 수많은 기적과 이사를 보면서 나의 굳었던 심령은 하나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이 내면의 공백 상태에 채워지니까 스프링처럼 내 마음도 하늘로 튀어 올라갔다. 나는 이것을 영적 비상(飛翔)이라 생각한다. 내 영안이 세계화된 것이다.
하지만 항상 아쉽게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 중국과 이슬람 국가에서는 성회를 열지 못했다. 궁리 끝에 나온 방안이 비영리기구(NGO) 굿피플(Good People) 설립이었다.
이 길을 이용하면 조 목사도 총재 자격으로 선교제한 지역을 방문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 목사는 내가 제출한 굿피플 설립기획서 표지에 ‘good plan’이라고 적었다.
굿피플 초대 총무는 내가, 초대 회장은 이 장로가 맡았다. 지금 굿피플은 연간 예산 100억원을 소화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중국 인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교육 의료 환경개선 등을 위해 해외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북한 접경지역인 중국 훈춘에 병원을 세워 조선족과 북한 주민에게 의료 지원을 하는 발판을 만들기도 했다.
나와 이 장로가 임기 3년을 마치고 났을 때였다. 조 목사는 2002년 목회 생애의 마지막 개혁을 실시할 기회라면서 당시 장로회장이던 이 장로를 개혁위원장으로 세우고 나를 포함해 5명의 개혁위원을 추대했다.
6개월 후인 11월 개혁백서가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거센 저항을 받았다. 비난과 모함이 들어왔다. 결국 이 장로가 장로회장과 개혁위원장을 그만두고 나서야 봉합됐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촛대가 옮겨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지난 12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12월이 되자 그동안 내가 했던 교회 활동을 모두 다 정리했다. 다양하고 압축된 영적 자양분을 받은 첫사랑의 교회인데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이 장로는 나를 이해해 주었기에 막지 않았지만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내비쳤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9> 하나님 우선하니 청와대 공사 수주 등 사업 훨훨
여의도공원 조경 공사 낙찰도 성공,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
이승율 회장(오른쪽)과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김경래 장로가 200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무궁화동산 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장소(표지석)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청와대 옆 궁정동 안전가옥(안가) 5채를 철거하고 그곳에 공원을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그곳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곳이기도 했다.
새 대통령의 첫 지시이다 보니 공무원들이 서둘렀다. 발주 조건을 충족한 3개 회사를 대상으로 입찰 절차가 진행됐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의 케냐 나이로비 성회와 겹쳤다.
아내 혼자 다녀오라고 했더니 아내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먼저라고 우겼다. “하나님과 한 약속이 더 중요하죠. 그냥 하나님께 맡기고 갑시다.” 하는 수 없이 나이로비 성회에 참석해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르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회사로 전화했더니 담당 직원이 울먹였다.
“낙찰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마음을 비웠더니 우리 일을 챙겨주신다는 감동이 밀려왔다.
김 대통령은 ‘무궁화공원’이라고 이름 지어 역사의 흔적을 지웠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경호실장에게 박 대통령이 피격당한 지점에 표지석을 세우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절대불가’였다. 그래서 조경적인 기법을 동원하기로 했다. 피격당한 곳에 사람이 들어가 누울 만한 직사각형의 작은 공간을 냈고 그 앞에 ‘새’ 모양의 자연석을 골라 안치했다. 그리고 묘실 같은 공간 뒤 성벽에 기대어 낙락장송 한 그루를 심었다.
7월 1일 준공식을 앞두고 또 큰 시험을 치러야 했다. 공기를 맞추느라 밤늦게까지 작업하던 6월 중순 조용기 목사의 러시아 모스크바 집회가 잡혔다. 청와대 담당자에게 타진했다.
“나가는 것은 자유지만 들어오는 것은 마음대로 못 옵니다.”
한마디로 나가지 말라는 대답이었다. 아내를 설득했지만 역시 요지부동.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갑시다.”
결국 우리는 몰래 도망치다시피 모스크바 집회에 다녀왔다. 한데 결과는 더 좋았다. 회사 대표가 없다 보니 청와대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못하고 설계한 원안대로 공사가 마무리됐다.
서울 여의도공원 조경을 우리 회사가 맡게 된 과정도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김영삼정부 시절 조순 서울시장은 여의도공원 조경을 1공구, 2공구로 나누어 진행했는데 그중 1공구를 우리 회사가 낙찰받았다.
입찰서류를 넣고 기다릴 때였다. 조달청에서 혹시 무슨 표창이나 공로상 받은 것 있으면 가산점이 붙으니 추가로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옛 한국주택공사에서 받은 표창을 찾아내 추가로 제출했다. 바로 그 표창이 가산점(1점)으로 들어가면서 불과 0.5점 차이로 우리 회사가 낙찰을 받았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2000년 경기도 안산 경기테크노파크 공사 발주 때도 기적이 일어났다. 350억원 규모의 제법 큰 공사였다. 우리 회사는 2군이었는데 1군 회사들도 입찰에 참여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나온 큰 공사라 경쟁이 심했다.
“회장님, 2등 했습니다.” 직원이 입찰 결과를 알려왔다.
1등은 S건설이었다. 속상해서 바로 집으로 돌아와 7시 저녁뉴스를 보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S건설이 부실기업 퇴출 명단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당장 관계기관에 전화로 물어보았다. 낙찰 기업이 퇴출되면 자동으로 2등이 승계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3등 한 기업은 S종합건설이었다. 우리 회사가 그 큰 공사를 수주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0> 질병 치유 기적에 이어 큰 교통사고에도 멀쩡
교회 출석 2년째… 부부가 병 고치고 고속도로 중앙분리대 받고도 살아나
이승율 회장 부부가 1994년 8월 강원도 평창군 용평에서 열린 제2회 순복음실업인연합회 전국대회에 참가해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부부는 귀경길에 고속도로에서 큰 사고를 냈으나 무사했다.
교회에 출석한 지 2년째 되던 해 나와 아내는 몸 안에 자란 치명적인 질병을 발견해 치유했는가 하면 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는데도 멀쩡한, 기이한 사건을 체험했다.
1991년 7월 교회 성도 6가족이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열사(熱沙)의 땅을 3주간 강행군해야 하는 상황이라 각자 건강을 체크하기로 했다.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갔다. 혈액검사를 했더니 GOT, GPT 수치가 650 IU/L(40 IU/L 이하면 정상)가 넘었다. 나는 청년시절부터 간이 좋지 않았고 B형 간염 바이러스 보균자였다. 아버지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CBMC에 처음 나갔을 때 ‘걸어 다니는 송장’이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술독에 빠져 살아왔다.
의사가 놀랐다. 일주일 후 재검사하니 900 IU/L가 넘게 나왔고 세 번째 진단을 받으러 갔을 땐 1200 IU/L까지 치솟았다.
“당신, 죽으려면 성지순례 가고 살려면 여기 올라가요.”
의사가 가리킨 ‘여기’는 병원 침대였다. 곧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의료진에 따르면 당시 나는 간이 급속도로 나빠지던 시점이었다. 간이 괴사하면서 나오는 피가 혈관을 통해 나가다 보니 GOT 수치가 급등했던 것이다.
이 시점이 지나면 간은 굳어지는 과정을 밟는다. 일단 굳기 시작하면 치솟던 수치는 뚝 떨어져 60, 70 IU/L 정도로 낮아진 상태에서 안정된다. 이때 측정하면 사람들은 “간이 약간 나쁜 정도네” 하고 소화제나 먹고 넘어간다. 그러다 3∼6개월 지나면 간은 회복 불능인 경변 상태로 변하고 만다.
내가 검사받던 그 시점이 바로 간경화 초기에 나타나는 활동성 중증 간염 상태였다. 1개월간 입원해 급한 증상을 치료한 다음 집에 돌아와 6개월을 투병했다.
그전에 아내는 나보다 먼저 척추수술을 했었다. 정형외과에선 1980년 80바늘을 꿰맸던 후유증이라 해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러다 소개받은 기독인 의사가 큰 병원에 가서 CT 촬영을 해 보라고 권유했다. “이대로 놔두면 불구가 되기 십상입니다. 즉시 수술해야 합니다.”
척추 바깥으로 디스크가 튀어나와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곧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수술 날짜를 잡았다. 수술은 12시간 넘게 걸렸지만 신기하게도 딱 한 가닥의 신경에만 혹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가장 경미한 신경이었다. 결과적으로 완벽한 수술로 완치됐다.
절체절명의 교통사고는 1994년 8월 중순 발생했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에서 제2회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전국대회를 마친 뒤 아내와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곤지암IC를 지나면서 앞차를 추월하려다 뒤에서 오는 차량을 보지 못했다. 뒤늦게 충돌을 피하려고 차를 지그재그로 달렸지만 방법이 없었다. 사력을 다해 핸들을 움켜쥔 채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살리고 죽어도 내가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있는 쪽으로 핸들을 틀었던 것이다. 에어백이 터지고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웠다. 차량이 중앙분리대와 완전히 직각을 이루면서 충돌하는 바람에 차체가 전혀 찌그러지지 않은 채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만약 각도가 90도에서 조금만 어긋났어도 전복되고 차체는 엉망이 됐을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이승율 <11> “땅을 정복하라”… ‘CBMC 선교 실크로드’ 완성
칭다오 등 6곳 한인CBMC 결성 주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확산
이승율 회장이 개척한 CBMC 선교 사역 벨트. 그의 선교 사역지는 아시아 대륙 10/40창(북위 10도와 40도 사이) 안에 집중돼 있다.
1992년 6월 대전 유성에서 우연히 만나 골프를 친 멤버들의 초대를 받아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행사에 갔다. 그 자리에서 서울 압구정동 골프연습장에서 평소 마주치던 양익환 CBMC 서울영동지회 부회장을 만났다. 양 부회장은 그 후 나를 CBMC 전도초청 모임에 초대했다.
서울영동지회 지도목사인 김동호(높은뜻연합선교회 대표) 목사가 ‘땅을 정복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의 설교가 이어지는데 ‘공부해서 남 주자, 돈 벌어서 남 주자, 출세해서 남 주자’는 메시지가 가슴에 꽂혔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눠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라는 김 목사의 메시지는 지금의 나를 이끈 좌우명이 됐다.
그 후 서울영동지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더니 2년 후 총무 역할이 주어졌다. 당시 나는 중국 옌볜과학기술대 건설 감독을 맡고 있어 한국과 중국을 수시로 오가는 상황이었다. 막 수교한 초창기라 중국에 온 사업가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고충을 함께 나누고 기도해줬다.
이런 정성이 결실을 보아 94년 8월 1일 중국 최초로 한인CBMC가 결성됐다. 옌지CBMC를 신호탄으로, 칭다오 베이징 톈진 선양 상하이 6개 지역은 내가 직접 뛰어다니면서 창립을 주도했다. 나머지는 새끼 치듯 우후죽순 생겨났다. 창립이 결정되면 한국CBMC중앙회에 연락해 국내 지회와 자매결연을 했다.
2010년엔 중국에 설립된 한인CBMC가 60여 개나 됐다. 조선족 기업인으로 구성된 조선족 지회가 10여개 설립됐고 중국인 사업가로 구성된 한족 기독단체도 10여개 태어났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모두 합치면 중국 전역에 90개 가까운 기독실업인 단체가 창립됐다.
이러한 열기는 중앙아시아로 뻗어 나갔다. 2000년 카자흐스탄 중심 도시 알마티와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도 CBMC를 설립하는 성과를 거뒀다. 소문을 듣고 터키 이스탄불에서도 연락이 왔다.
2001년 서울영동지회 회원 30명과 함께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뜻밖의 하나님 선물을 만났다. 비행기 좌석에 앉으면 눈에 띄는 것이 항공사에서 만든 잡지이다. 잡지 뒷부분에 세계지도가 붙어있다. 그 지도를 펼쳤다. 세계 선교를 말할 때 자주 이야기하는 10/40창이 눈에 들어왔다. 10/40창은 미전도 종족의 95%, 세계 빈민의 84%가 살고 있는 북위 10도와 40도 사이 지역을 일컫는다. ‘∼스탄’이란 이름이 붙은 많은 국가가 10/40창에 속해 있다.
아시아 대륙 10/40창 맨 오른쪽 끝에 옌볜자치주 중심도시 옌지가 있고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선양, 베이징이 보이고 더 돌리면 우루무치가 나타난다. 이어 톈산산맥을 넘으면 알마티와 타슈켄트가 보였다. 그다음 눈에 들어온 아시아 대륙 맨 서쪽 끝 도시가 터키 이스탄불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CBMC 실크로드 사역의 길을 인도해 주셨구나’ 하는 감동이 절로 터져 나왔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2> 인생 의미 깨닫게 해 준 김진경 총장과의 만남
옌볜과기대 설립 순수한 뜻에 감동… 월례 후원기도회 맡아 모금 활동
이승율 회장(오른쪽)이 2001년 12월 김진경 옌볜과기대 설립자와 평양과기대 설립 협의차 평양을 방문,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은 당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조영화 원장.
이런 것을 신의 섭리라고 하는 걸까. 나는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이상한(?) 크리스천 지도자를 한 분 만났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첫해인 1990년 10월 초 베이징아시안게임 기간이었다.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 골프장 사업을 하기 위해 오가던 때였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라고 해봐야 베이징과 상하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던 두 곳뿐이었다.
칭다오시와의 협상이 농민들 토지보상 문제로 난관에 부닥쳤다. 수소문 끝에 국가주석 양상쿤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에 갔다. 그런데 그 이상한 한국인과 약속이 중복돼 있었다.
김진경 옌볜과학기술대 설립자 겸 총장과는 그렇게 처음 마주했다. 먼저 면담하시라고 양보하고 옆자리에서 경청했다.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나를 세차게 흔들었다.
“제가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 옌지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우려 합니다. 과학기술 분야 교육을 통해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동냥으로 들으니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20년 넘게 생활한 시민권자였다. 대학교수를 지내고 사업도 해서 비교적 크게 성공했다. 그는 1986년 중국사회과학원 초빙교수로 베이징에 와 있는 동안 조선족들이 사는 옌지·지린·창춘·하얼빈 지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농업학교를 설립·운영했던 선친의 유업을 좇아 이 지역에 고등교육기관 설립 계획을 갖게 됐다.
그는 1989년 5월 지린성과 옌지시 정부의 협력하에 중외 합작 형태로 ‘옌볜조선족기술전문대학’(1년 후 옌볜과학기술대로 승격) 설립을 허가받고 학교 부지까지 정해 놓은 상태였다. 내게 비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돈벌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지만 내겐 그와 같은 멋진 꿈이 없었다. 그 점이 나를 부끄럽게 했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서울에 돌아온 뒤 나는 잠시 내 삶의 달음박질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살고 있는가.’
그러다 2주 후 서울에 출장 온 김 총장을 찾아가 상의한 끝에 대학 설립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생애 처음 내 모든 것을 던져도 좋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김 총장은 서울에서 옌볜과기대 건립후원회를 결성하고 모금 활동에 들어갔다. 나는 그의 요청으로 남서울교회 당회장실에서 열린 후원기도회에 참석했다. 홍정길 목사를 그때 처음 만났다. 이어 고 옥한흠 목사, 곽선희 목사가 이 일에 깊이 관여했다.
김 총장은 월례 후원기도회를 맡아달라고 내게 요청했다. 매월 마지막 주 열리는 기도회는 무려 10년간 이어졌다. 이 기도회를 통해 심도 있는 영성훈련을 받게 된 셈이다.
1990년대 후반 조용기 옥한흠 곽선희 목사와 김진경 총장 네 분이 만나는 조찬 모임을 주선했다. 원로목회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 모임은 그 후 대형교회 간 순회설교의 계기가 됐다. 신앙생활 초기에 이런 분들과 만난 것은 참으로 귀하고 영광된 인연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3> ‘기적의 동산’ 옌볜과기대, 명문대로 우뚝
원래 공동묘지 자리서 생명의 땅으로… 중국 100대 중점 대학으로 급성장
이승율 회장(두 번째 줄 오른쪽 여섯 번째)이 2000년 6월 중국 옌볜과학기술대 교정에서 자신이 후원한 고려인 유학생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92년 9월 16일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옌지시에 2년제 옌볜조선족기술전문대학이 문을 열었다. 이듬해 4년제로 승격하면서 교명은 옌볜과학기술대학(YUST)으로 바뀌었다.
옌볜자치주는 일제강점기 조국을 떠난 우국지사들이 룽징(龍井)을 중심으로 만주 서간도, 연해주 지역까지 벌이던 독립투쟁의 결과로 생긴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장소에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다음 달 개교 행사가 열렸으니 상징성이 남달랐다. 해외에서 중국에 대학교를 설립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옌볜과기대는 흔히 ‘기적의 동산’으로 불린다. 옌지시 북산가의 20만평(66만1157㎡)에 이르는 캠퍼스 부지는 원래 공동묘지 자리였다. 마오쩌둥 정부가 화장제로 바꾸면서 폐허가 된 공동묘지를 김진경 총장이 구입한 것이다. 화장터 건물은 개조해 캠퍼스 내 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캠퍼스 언덕을 올라갈 때마다 엘리사 선지자를 생각한다. ‘물 근원’으로 올라가 소금을 뿌려 쓴물을 단물로 바꾼 엘리사의 기적(왕하 2:19∼22)처럼 옌볜과기대는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변화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옌볜과기대는 국내외 기독교계의 후원으로 운영하다 보니 재정 문제로 대학원을 설립하지 못했다. 대신 학부를 졸업하면 해외 유학을 보내는 전략을 세웠다. 학생들은 조선족 80%, 한족 17%, 고려인과 소수민족 3%로 구성돼 있다.
옌볜과기대가 고려인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한 것은 내 처가의 슬픈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아내의 백부는 1937년 중일전쟁 때 독립을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갔다. 그곳에서 소련군에 붙잡혀 일본 첩자로 오인받는 바람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소개(疏開)됐다.
처가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61년 만에 타지키스탄에서 온 편지를 통해 생존한 줄 알았다. 8개월 후 고려인 부인을 데리고 귀국한 처 백부가 한국 부인 곁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면서 석 달 후 고려인 부인만 타지키스탄으로 돌아갔다. 공항 출국장에서 처 백부와 생이별하는 고려인 부인의 안타까운 눈물은 내 심장에 깊이 박혔다.
2000년 중앙아시아를 방문할 기회가 왔을 때 고려인 부인의 그 눈물이 생각났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는 고려인 집성촌에 의뢰해 10명의 장학생 명단을 받아 입학시켰다. 이후에도 나는 매년 7∼8명씩 고려인 장학생을 후원하고 있다.
옌볜과기대는 그동안 학부와 부속 과정을 포함한 졸업생 2만2000여명을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3개 국어에 능통하다. 컴퓨터를 잘 다루고 13개국에서 온 교수들에게 배우다 보니 국제 감각도 뛰어났다.
지금은 베이징대 칭화대 인민대처럼 중국 100대 중점 대학 중 하나여서 신입생 1차 선발대학에 지정돼 있을 정도로 속칭 일류대학이 됐다.
이렇게까지 급성장한 데는 무보수 자원봉사로 기꺼이 참여한 교수들의 공로가 크다. 교수진은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뉴질랜드 호주 영국 캐나다 독일 등에서 온 외국인 교수까지 250명에 달한다. 가족을 포함하면 500명 이상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화장터 교회가 있긴 하지만 교정과 강의실에서 공식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찬송가를 부르지 못한다. 그래도 학생들은 졸업할 때쯤 대부분 거듭난다. 어느 학생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간증을 했는데 그 후 동네 전체가 변화된 일도 벌어졌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4> 북한에도 과기대 설립… 카이스트 모델로 추진
김일성 요청으로 처음엔 나진에 계획… 이후 김정일 평양으로 위치 변경 승인
이승율 회장(뒷줄 가운데) 등 남북한 관계자들이 2001년 7월 평양과학기술대 건립을 위한 기본 설계를 협의하고 있다. 전극만 북한 교육부상(이 회장 앞)과 김진경 총장(뒷줄 오른쪽)도 보인다.
옌볜과기대는 북한에 가기 위한 중간 거점이었다. 다음 단계는 당연히 북한에 과학기술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김진경 총장의 뜻을 따라 나 역시 같은 목표를 가졌다.
옌볜과기대를 개교한 그다음 해인 1993년 기회가 왔다. 김일성 주석이 김 총장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김 주석은 북한에 옌볜과기대 같은 대학을 설립해 달라고 요청했고 김 총장은 나진·선봉 지역이면 가능하다고 답했다. 두만강 하류에 있는 나진항 북쪽 산지에 ‘나진과학기술대학’을 세우는 것으로 계획했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던 김영삼정부도 북한과 합의했다. 소망교회 집사였던 정몽준 의원은 곽선희(소망교회 원로) 목사의 지원 요청에 따라 불도저 포크레인 등 20억원 넘는 건설장비를 울산에서 나진으로 실어 보냈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94년 7월 김 주석이 사망하며 수포로 돌아갔다. 북한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느라 대외 관계를 중단했다. 큰 흉년이 들면서 북한 주민들이 기아로 대거 사망한 것도 바로 이 기간이었다. 95년부터 탈북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북한에 풀뿌리 시장경제가 자라서 장마당을 선보였다.
김 총장은 삼년상이 끝난 97년 여름 나진과기대 설립을 다시 시작하려고 드나들다가 북한 정부에 억류됐다. 42일간 고초를 겪은 후 중국에 추방하는 형식으로 석방됐다. 그 뒤로 2년8개월간 북한에 들어가지 못했다.
2001년 1월 중순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상하이 푸둥 지구를 보고 경천동지로 변모한 중국 모습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중국 공산당 장더장 당시 상무위원은 김 위원장 일행에게 김 총장이 옌볜과기대를 세워 중국 정부에 협조했던 것을 들면서 “김 총장을 활용하라”고 건의했다. 장더장은 옌볜과기대 개교식 때 지린성 당서기로 참석한 인물로, 시진핑 집권 1기 때 시진핑과 리커창에 이어 서열 3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김일성종합대를 나와 한국말도 잘한다.
김 위원장은 바로 다음 달 사절단을 보내 김 총장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사절단으로 온 사람은 김 총장을 42일간 조사하고 고문한 바로 그 당사자였으니 북한이 김 총장에게 사과한 셈이다.
그해 3월 김 총장이 곽 목사와 함께 평양에 들어갔더니 교육상이 영접을 나왔다. 교육상의 안내로 김 위원장을 만났다. 북한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제관계가 좋아야 하니 이를 위해 국제화 인력을 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 주석 시절 추진했던 대학 설립 계획을 다시 살려 줄 것과 함께 나진에서 평양으로 위치를 변경토록 승인하고 양해각서를 체결해줬다.
우리는 발 빠르게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김 총장은 통일부에 가서 남북교류협력사업 승인을 신청했고 나는 이민화 당시 메디슨 회장 소개로 최덕인 카이스트 원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평양과학기술대(PUST)는 카이스트의 커리큘럼을 바탕으로 학사 및 석·박사 과정을 만들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지식산업복합체로 육성할 방침이었다.
교학 부문(순수학문 분야)과 실용산학협력 부문(지식산업복합체)이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민족 동질성이라는 서까래와 한민족 문화 융성이라는 지붕을 올리면 이보다 더 훌륭한 대학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학정신의 기초에 대해서는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물론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5> “장군께서 허락”… 평양과기대 부지로 군부대 내줘
학교 공사하다가 오래된 집터 발견, 토머스 선교사 기념교회 터로 밝혀져
이승율 회장(오른쪽 여섯 번째)과 김진경 총장(이 회장 왼쪽) 등 관계자들이 2002년 6월 평양과학기술대 부지 현장을 둘러본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1년 5월 북한 교육성과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사장 곽선희)은 평양과기대 설립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6월에는 우리 통일부에서도 사업 승인과 사업자 승인이 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진경 총장을 평양에 초청한 지 4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양측이 계약한 ‘평양과기대 기본계약서’에 따르면 북한 교육성에서는 땅을 제공하고 남측은 학교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설비와 교직원 구성 등을 맡기로 했다. 특히 인사권과 운영권, 대학 건설을 위한 계약도 재단과 설립총장에게 위임했다.
대학 운영은 개교일로부터 50년간 남북이 공동으로 하되 합의에 따라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규모는 부지 100만㎡(33만평)에 건평은 8만9000㎡(2만7000평)이며 박사원(대학원)과 학부를 두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학교 부지를 정하기 위해 여름에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이 마련해준 학교 부지는 평양 북쪽 농경지였다. 국제적인 대학을 세우기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당시 건설위원장이던 내가 악역을 맡았다. “학교 부지로 이런 데를 주려고 하십니까.”
고속도로 옆, 그리고 산중턱이나 언덕 위 부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두 조건을 충족할 만한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북한 교육성에서는 고등교육국장이 실무자로 나섰다. “가 봐야 소용없어요. 거기는 군부대입니다.”
대동강을 건너 개성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5∼6분 정도 달려가니 통일헌장탑을 지나 원산으로 가는 인터체인지가 있는 언덕 부근에 군부대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일단 강하게 밀어붙여야 했다. “부대에 들어가 봅시다. 장군님이 초청했는데 왜 안 되겠소.”
군부대에 페치카도 보이고 곡사포도 보였다. 우리로 치면 수도경비사령부 예하부대 같은 부대였다. “여기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평양과기대를 세웁시다.”
나는 큰소리쳤지만 속으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틀 뒤 고등교육국장이 호텔로 찾아왔다. “축하합네다. 장군님께서 허락하셨수다.”
군부대가 평양과기대 부지로 정해지다니, 우리는 믿기지 않았다. 1년여의 설계 끝에 건설 업체가 정해진 뒤 현장작업반이 장비를 끌고 언덕을 올라갔다가 평평한 지역에서 오래된 집터를 발견했다고 연락이 왔다. 수소문해 보니 “일제 강점기 때 교회가 있었다”고 했다.
고증에 들어갔다. 영국 웨일스에 유학 가서 로버트 토머스(1840∼1866) 선교사를 전공한 고무송 목사와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이를 맡았다. 상하이 파송 선교사 토머스가 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수심이 얕은 양각도란 섬에서 모래톱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조선 군사들은 한밤중에 제너럴셔먼호에 불붙인 짚단을 던져 불태웠고 토머스 선교사와 선원들은 끌려나와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때 배에서 성경책을 주워 읽은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믿게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평양과기대 위치에서 보면 5∼6㎞ 떨어진 대동강에 쑥도와 양각도 중간 사이로 고속도로 교량이 보인다. 선원들은 이곳을 지나다 참변을 당했고 토머스 선교사의 시신은 쑥도에 묻혔다. 고증 결과 일제 강점기 평양 기독교인들이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를 기념하는 교회를 쑥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평양과기대 일로 인해 토머스 선교사의 옛 자취가 드러났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이 평양과기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예표라고 나는 믿는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6> 한국팀-북한팀-조선족팀 하나 돼 평양과기대 건설
北 청년돌격대에 기술 가르치며 공사 ‘자기 민족 버릴 수 없다’ 사도 바울 이해
이승율 회장이 2006년 7월 평양과학기술대 건축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건설 현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평양과기대 캠퍼스 설계는 영종도 인천공항을 설계했던 정림건축이 맡았다. 이 회사 김정철(작고) 회장은 14억원의 설계비를 전액 무상 지원했다.
건설은 조선족 기업 천우건설이 맡기로 했는데 북측이 공사 2주 전에 입국을 막았다. 군부에도 공병대가 있고 평양에도 건축팀이 있는데 왜 조선족 업체냐는 이유였다. 북한이 내세운 회사는 평양건축공사였다. 그 후 공사가 시작됐으나 진척 없이 1년을 허비하고 말았다. 상부에 보고한 다음 재협상을 거쳐 조선족 업체로는 2위권인 항달유한회사가 공사에 참여했다.
건축공사엔 북한의 청년돌격대가 참여했다. 19∼25세 남녀 800명 정도가 공사장 막사에 들어와 인부로 일했다. 조선족 기술자들이 벽돌 쌓고 거푸집 대는 기술을 하나씩 가르치면서 일을 시켰다. 나는 평양에 갈 때마다 청년돌격대가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의무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희들도 기술을 배우면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고 돈을 벌고 출세할 수 있다.”
내 말에 자극됐는지 대원들은 밤잠을 자지 않고 기술을 배웠다. 조선족 기술자들이 그들을 지도했다. 이들의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북한 관리자들과 건축회사를 만들자는 의논까지 했다.
대원들은 황토에 시멘트를 섞어 만든 친환경 벽돌도 생산했다. 후원자로 참여했던 사업가 한 분은 목재 가공하는 솜씨가 좋은 대원들을 모아 가구공장을 세우고 학교에 필요한 책걸상과 교탁 탁자를 공급했다. 나중에 북한 아파트에 인테리어를 공급하는 가구공장을 세우자면서 가구 기술자를 양성했다.
현장에서는 한국팀, 북한팀, 조선족팀이 모여 회의하고 일하고 식사하면서 하나 되는 경험을 나눴다. 정치, 이념, 법제도, 핵문제 등 체제에 관련된 사항을 언급할 수 없었지만 일상생활과 건축 작업에 관계된 일에 대해 편하게 대화했다.
평양에 갈 때마다 평양 시내 백화점이나 김책공대, 김일성종합대, ‘정주영 농구장’ 같은 대형 시설을 견학했다. 일요일엔 평양 봉수교회나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의 고향에 세운 칠골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자기 민족을 버릴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민들과 자유롭게 어울리진 못했지만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깊은 친밀감을 느꼈다.
재단 측에서는 평양과기대를 지을 때 모든 건물을 연결동으로 이어서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배려했다. 옌볜과기대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다.
겨울에 기온이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가니 동간(棟間) 이동이 힘들어 옌볜과기대 건물들은 연결동으로 이어졌다. 연결동 공사가 전체 공사비의 15%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지만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과감히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연결동 통로를 활용해 조선족 문화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을 체감했다. 연결동이 교수나 학생 또는 방문객들 간의 만남의 통로로 사용됐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 추위를 막는 것보다 더 큰 정신적 소통의 가치를 배운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 교훈을 그대로 살려 평양과기대에도 적용했다. 일부러 건물을 띄엄띄엄 지었다. 북한 당국에서 제공해준 학교 부지를 최대한 넓게 사용하려고 의도한 것이었는데 연결동 구간 거리가 길어지면서 예산 규모도 자못 커졌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7> 평양과기대 마침내 개교했지만 ‘천안함 난관’에
‘미션 임파서블’ 같았지만 8년 만에 결실, 하지만 한국교수는 한 명도 못 들어가
전극만 북한 교육성 부상(왼쪽)이 2009년 9월 평양과학기술대 개교식에서 김진경 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이승율 회장은 이 대학 건축위원장(2001∼2010년)과 대외부총장(2011∼2017년)을 역임했다.
2009년 9월 16일 평양과기대의 역사적인 개교 행사가 열렸다. 남북이 사업을 승인한 지 만 8년 만이었다.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불릴 만한 평양과기대 건립 프로젝트는 수많은 난관과 진통을 겪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승인했다고 해도 일각에서 끝까지 반대한 데다 공사비도 부족해 공사를 진척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한국이나 해외에서 후원해 오던 지원금이 남북관계 악화 및 경제난 등의 이유로 많이 줄어 재정난이 심해졌다.
평양과기대 건설은 서울 소망교회에서 40억원의 시드머니를 낸 게 바탕이 됐다. 전체적으로 320억원가량을 모금해 17개 건물을 지었지만 아직도 미지급금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미국 교단 등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았고 국내 크리스천 기업인들과 미국·캐나다·호주·일본의 교포, 조선족 기업인 등이 다양하게 참여했다. 이들의 헌신적인 지원과 협력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었다.
2008년이 되니까 캠퍼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단계 공사로 학사동 건물과 종합생활관·연구소·식당·기숙사·게스트하우스·R&D센터·파워플랜트 등 17개 건물을 완성했다. 2단계 공사로 본관 건물과 연구시설, 부대시설을 확충할 계획을 세웠다.
1단계 건물 준공식 및 개교 행사를 마친 다음 해인 2010년 4월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한다고 알리고 교수 요원 신청을 받았다. 주요 전공은 국제금융경영학부(MBA)·농생명과학부(BT)·컴퓨터전자공학부(IT) 등이며 지식산업복합단지(R&D센터)가 추가됐다. 1차적으로 해외 동포와 한국인 교수 30여명이 신청했다.
그중 한 명이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테뉴어(종신재직권)를 받은 촉망받는 교수다. 전공은 이행경제였다. 그는 안식년을 신청한 후 평양과기대 교수로 지원했지만 1년간 평양은커녕 서울대에서도 강의를 못하고 일본 교토대학에서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폭침 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개학에 관련된 모든 일정이 늦어졌다. 연이어 취해진 5·24조치로 한국 국적을 가진 교수는 방북 허가가 안 나왔다. 4월 개학은 무기 연기됐고 이후에도 좀처럼 수업할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늦출 수 없어 그해 10월 25일 개학을 감행한 후 한 달 정도 수업하는 것으로 형식적인 개학을 했고 2011년 정식으로 정상 수업을 했다.
2010년 가을학기에 급히 개학한 것은 북한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2009년 9월 개교 행사를 했는데 그해 겨울은 학생이 없어서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겨울 동안 속절없이 난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배관이 얼지 않도록 난방시설을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2010년에도 수업을 시작하지 못하면 겨울에 또 학교 건물들이 텅 빈 상태로 난방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김책공대에서 갑자기 겨울방학 동안 건물 두 개를 빌려 달라고 했다. 김책공대 건물은 난방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김책공대의 요청에 응했다면 건물을 도로 찾기 어려울 것이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학부·대학원생 145명을 받아 부랴부랴 개학했다. 외국인 교수 20여명이 들어갔지만 한국 국적 교수는 한 명도 들어가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8> 평양과기대 출신 유학생 실력에 유럽 명문대 ‘깜짝’
장학금 제공하며 문호도 ‘활짝’… 의학부 청사·美교포 투자 멈춰
평양과학기술대는 2014년 5월 북한 정부의 승인을 받아 의학부 청사 착공식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 통일부는 아직 승인을 하지 않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 국제화 인력을 양성하는 곳은 평양과기대가 유일하다. 벌써 졸업생들의 우수한 실력이 해외에 있는 명문대학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2018년 3월 현재 재학생은 학부생 500명, 대학원생 100명 등 600명이다. 2015년도부터 학부 신입생 중 여학생 10명이 입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한국 국적을 제외한 14개 국가에서 126명이 자비량으로 참여하고 있다.
석사과정은 2014년부터 2017년 11월까지 5회에 걸쳐 총 118명이, 학부과정은 2014년부터 2018년 3월까지 399명이 각각 졸업했다. 또한 2012∼2017년 총 40여명이 중국은 물론이고 영국 스웨덴 스위스 등 유럽과 브라질에 유학했거나 유학 중이다. 이와 별도로 해외연수도 100명 이상이 다녀왔다.
2014년 첫 대학원 졸업생 44명 중 7명이 김일성종합대학에, 3명이 김책공대에 교수 요원으로 갔다. 다른 졸업생들도 교육성과 대외무역부, 중앙은행, 정부관계 부서의 중요한 자리에 배치됐다. 이때 학사 졸업장은 평양과기대 이름으로 나갔지만 학위증은 노동당 교육위원회 이름으로 수여했다.
그러나 2015년 3월 2기 석사과정 30명이 졸업할 때는 평양과기대에서 졸업장과 학위증을 자체적으로 수여하도록 위임을 받았다. 그만큼 북한 정부로부터 신뢰를 확보한 것이다.
2015년도 평양과기대 석사과정 1학년을 마친 학생 3명은 영국 웨스트민스터대에 유학을 갔다. 2년 과정으로 간 학생들은 모두 1년 만에 영어논문을 통과하고 귀국했다. 깜짝 놀란 웨스트민스터대에선 다음엔 5명으로 문호를 확대했다. 1명이 결핵에 걸려 못가고 4명의 졸업생이 웨스트민스터대에서 석사코스를 밟았다.
이를 본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2명을 장학생으로 뽑았고 스웨덴 웁살라대도 3명을 데려갔다. 웁살라대엔 2017년 가을학기에도 5명이 유학 갔다.
유럽의 대학통합교육제도인 에라스무스재단에서도 10명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평양과기대생 12명이 응시해 전원 합격하는 바람에 추가로 합격한 학생들에게 줄 장학금을 준비하느라 박찬모 명예총장과 교수들이 힘을 보태기도 했다.
졸업생들이 해외에 유학 가서 두각을 나타내자 북한 교육성 관리들은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교육성 산하 대학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더 격이 높은 노동당 교육위원회 산하 대학으로 승격했다.
평양과기대는 2014년 북한 정부의 승인을 받아 의학부 청사 착공식을 가졌다. 우선 북측 의료진을 대상으로 의료실무교육을 단기 과정으로 추진하고 장차 의과 치과 약학 보건 전공은 3년제 대학원을, 간호 전공은 4년제 학부를 운영할 계획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아직 사업 승인을 보류하고 있다.
천안함 사건으로 취해진 5·24조치 이후 평양과기대를 통해 펼치려던 지식산업복합단지도 전혀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제조업과 IT, 무역 분야 기업이 함께 들어가야 하는데 꽁꽁 묶여 있다. 한국 후원자나 미국 교포들이 투자하고 싶어도 핵문제로 막혀 있다. 심지어 평양과기대가 중국 업체와 협력하는 것도 막혀 있다.
올 들어 남북 정상과 북·미 정상이 잇달아 만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남북 모두 평양과기대를 남북 교류협력의 전략적 창구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조언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19> 옌볜·평양과기대 사역 통해 ‘동북아공동체’ 밑그림
다양한 민족 출신과 학문적 교류… 조선족 관련 박사 논문 주목 받아
이승율 회장이 2006년 6월 중국 중앙민족대 박사학위 수료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선족 전신자 옌볜대 교수, 이 회장, 몽골족 어이타이 중앙민족대 총장, 몽골족 워렌 네이멍구사범대학 교수.
옌볜과기대와 평양과기대 사역을 오래 하다 보니 공부가 더 필요했다. 2000∼2002년 옌볜대 김강일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당시 나의 주요 사역 무대인 동북아 지역(국제정치)에 관해 수학했다. 이어 2003∼2006년 박사 과정을 밟았다.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부설 한국문화연구소장 황유복 교수가 나를 도와줬다. 황 교수는 창춘 출신으로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평생을 한국문화 연구에 바친 석학이다. 김준봉 베이징공업대 교수가 황 교수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박사 과정을 권유했다.
전신자 옌볜대 교수도 많은 도움을 줬다. 옌지 출신인 그는 런민대에서 인류학을 전공했고 옌볜대에서 석사를 마친 뒤 옌볜대 박물관 주임으로 활동했다. 전 교수는 중국 학제가 정비되면서 박사 학위가 필요해짐에 따라 황 교수 제자로 들어왔다. 마찬가지 이유로 중앙민족대학에는 한족 외에 몽골족, 묘족, 만주족, 조선족,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 학자들이 교수 요원이 되기 위해 공부에 힘을 쏟았다. 그때 동고동락한 사람들과는 민박회(민족대학 박사 동학회)를 구성해 1년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학위 과정에서 다양한 민족 출신을 만나다 보니 다채로운 학문적 교류가 가능해졌다. 중국 내 소수민족을 비교하면서 조선족 사회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기회가 됐다. 이런 행운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년의 과정을 마치고 ‘동북아 시대와 조선족 사회의 상호 발전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을 기초로 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동북아 시대와 조선족’이 마침 개교 15주년이 된 옌볜과기대 기념도서로 선정됐다. 대학 전문서적 출판사인 박영사에서 출판했는데 2008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도서로 뽑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이었다.
내 논문과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조선족 이주민들이 조선 말기부터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이주한 과정,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활약상, 옌볜자치주 결성 과정,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가 개방사회로 변하는 과정, 다른 소수민족과의 비교 등을 다뤘다. 말하자면 중국 조선족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의 대안까지 제시한 책이 됐다.
그러다 보니 조선족 연구 석·박사 과정에서는 필수도서가 됐다. 1년 후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감수하고 중국 외교부 소속 출판사인 세계지식출판사에서 중국어로 번역·출판했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연구하면서 중국과는 달리 소련연방이 급속히 해체된 것은 소수민족에 대한 강압과 통제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나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이 성공적인 모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진시황 때부터 시행됐다고 봐야 한다. 진시황도 한족이 아닌 변방 출신이다. 그 후 중국의 패권은 한족사회와 변방 소수민족들이 나눠 갖거나 권력투쟁을 벌이는 현상이 되풀이됐다. 말하자면 중국은 2000년 이상 한족사회가 중심이 되면서 변방 소수민족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중국과 동북아에 대한 나의 학문적 연구는 ‘동북아공동체’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20> 아시아의 융합 비전 ‘동북아공동체연구회’ 햇빛
전문 분야 지식인들 싱크탱크로 ‘아시아 재발견’에 대한 로드맵 실현
이승율 회장이 2007년 9월 동북아공동체연구회 창립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나의 ‘동북아공동체’ 구상은 2007년 9월 동북아공동체연구회(2013년 9월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으로 개칭)란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 몽골대사를 역임한 권영순 옌볜과기대 교수의 연구실(동북아경제공동체연구소)을 서울로 이전하는 일에 조금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일이 나의 사명으로 바뀌었다.
나는 10㎡가 채 안 되는 권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할 때마다 놀라곤 했다. 그는 작은 연구실 사방 벽면과 천장에 지도를 벽지처럼 잔뜩 붙여놓은 다음 그 지도 위에 꿈과 비전을 그려 나갔다.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3성과 러시아 연해주, 한반도를 하나로 묶는 교통 인프라를 구상하고 각 지역 중요 도시들 간의 연합을 통한 광역경제권 개발계획까지 세워 지도 위에 선을 긋고 울긋불긋 색칠해 나갔다.
‘아! 여기에 무엇인가 있구나.’ 나의 첫 소감이었다. 그 후 그의 연구실에 갈 때마다 내 마음의 갈피 속에 차곡차곡 쌓인 것은 ‘아시아의 재발견’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 비전은 결국 내 발걸음을 미래로 향한 ‘퓨전 로드맵(Fusion Road Map)’의 길로 인도했다. 그것이 바로 전문 분야 지식인들의 싱크탱크로 자리 잡은 동북아공동체연구회다.
특별히 이 단체는 ‘우리의 미래 비전은 아시아 융합 사회(Asian Fusion Society is Our Future Vision)에 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여기서 표현한 퓨전(Fusion)과 퓨처 비전(Future Vision)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2001년 3월 터키의 이스탄불 기독실업인회(CBMC) 창립대회 때 나는 5분간 대표 스피치를 했다.
“이스탄불이야말로 중세 이후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연결해온 퓨전시티(Fusion City)입니다. Fusion이란 단어를 길게 늘여 쓰면 ‘Future Vision’이 됩니다. 한국과 터키가 이러한 Fusion의 정신과 문화를 통해 동서양의 갈등을 극복하는 21세기 새로운 ‘Future Vision’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창립대회 직전 보스포루스 해협 관광 중에 가이드가 유럽과 아시아의 길목에 있는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를 설명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퓨전’(융합)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 비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 내가 스피치했던 시간보다 더 길게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 후로 ‘Fusion is Future Vision’이라는 관점은 나를 발전시키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지금 같은 글로벌 시대에 퓨전이야말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갈등을 통합하는 리더십(Syncretics Leadership)의 핵심가치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봐도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 3:1)
이 세상 만물이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선언은 다양한 철학을 관통하는 깊이 있는 성찰이다. 그리스도가 전부이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 안에 계시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 성경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갈등을 융합하는 완전한 복음공동체에 이르는 헌장(憲章)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21> 동북아 시대는 하나님 섭리… 민족의 미래 걸려
북·중·러 접경지대 역사 탐방 통해 다음세대에 도전과 비전 제시
이승율 회장(점선 원 내)이 2016년 12월 북·중·러 3국의 접경지역인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시의 용호각전망대에서 ‘차세대 글로벌 리더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고양시 학생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학생들 뒤편 두만강 건너 지역이 북한 땅이다.
2016년 12월 한반도 접경지역인 동북아와 연해주 지역을 둘러보는 ‘차세대 글로벌 리더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경기도 고양시가 선발한 중·고생과 대학생 55명이 한반도와 접경한 중국의 옌지∼룽징∼투먼∼훈춘과 러시아의 크라스키노∼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등을 5박6일간 탐방하는 코스에 내가 인솔자로 함께했다.
지린성 조선족자치주의 수도 옌지에서 한국인이 세운 옌볜과기대와 옌볜박물관을 방문한 다음 룽징으로 이동해 윤동주 생가와 모교,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일송정, 해란강 등 한민족 역사의 현장을 둘러봤다. 이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전적지가 있는 투먼을 거쳐 북·중·러 3국의 국경이 맞닿는 훈춘의 용호각전망대에 올라 두만강 삼각주를 한눈에 조망하는 특별체험을 했다. 훈춘에선 포스코현대국제물류단지와 GTI(광역두만강개발계획) 사무소를 견학하는 기회도 가졌다.
국경 건너 연해주 일대에선 이순신 장군 유적지인 녹둔도,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최재형 선생 생가와 이상설 열사 유허비 등과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 현장을 살펴봤다.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창립 10주년을 맞은 지난해 7월에도 중국 다롄을 출발,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백두산 옌지 훈춘에 이르는 탐방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번엔 연령대가 10∼80대로, 직종이 다양한 33인이 다녀왔다. 기미독립운동의 재현을 시도한 것이다.
동북아와 연해주 일대는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가 된 이래 한국사의 북방요충지역으로 선구자들의 꿈이 서려 있는 땅이다. 동시에 고려인 강제이주, 일제의 강제노역 동원, 항일투쟁 등 고난의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날엔 남북한과 중국·러시아·몽골 등이 참여하는 GTI(광역두만개발계획),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내륙과 해상의 실크로드 경제벨트),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에 힘입어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올 들어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 문재인정부의 신북방정책이 이어지면서 세계적인 각축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나는 ‘옌볜(연변)과기대/평양과기대’와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명함 두 개를 갖고 다닌다. 사람들은 내 명함을 받으면 대개 고개를 갸웃거린다. ‘연변’은 뭐고 ‘동북아’는 뭐냐는 반응이다. 정작 나 자신도 세 단어와 처음 조우했을 땐 내 것이 아니라고, 나와 상관없다고 밀어내기를 계속했었다. 그럴수록 되레 그것이 내 운명이자 시대의 화두요, 민족의 미래와 희망이 걸린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반성조로 말해 이제껏 나도 미국과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역사의 중심은 늘 그쪽이라고 생각했다. 근세 200년이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관점을 바꿔야 할 때다. 인류 역사의 중심은 지중해→유럽대륙→대서양→미주대륙을 거쳐 환태평양으로 이동해 왔다. 이른바 서진화 현상이다.
그 힘의 중심이 이제 아시아대륙, 그것도 동북아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무척 놀란다.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그러기에 나는 자라나는 다음세대 리더들에게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공동체로 쏠리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됐다. 그 체험적 훈련프로그램이 바로 북·중·러 접경지역 역사 탐방 프로젝트다. 이는 한반도의 역사를 새롭게 열어가는 도전과 혁신의 길이 되리라 믿는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22> ‘나그네 사랑하라’ 말씀대로 코스타·ISF 섬겨
코스타 강사로 해외 한인 유학생 도와… ISF 설립 참여 국내 외국인 유학생 지원
이승율 회장(왼쪽)이 2010년 8월 명지대 용인캠퍼스에서 열린 ‘코스타코리아 2010’ 행사에서 홍정길 김동호 목사(왼쪽 세 번째와 네 번째)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코앞에 닥친 사안을 외면하지 않고 도전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면 그 사안들의 결과치가 모여 큰 줄기를 이룬다. 나는 이것을 내게 임하신 하나님의 섭리라 믿는다.
코스타(KOSTA·해외유학생수련회, 현 국제복음주의학생연합회)와 국제학생회(ISF)도 그런 경우다. 두 기관은 각각 해외에 나간 한인 유학생들과 국내에 유학 온 외국인 유학생들을 지원하는 기독교 단체다.
코스타는 내가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서울영동지회 회원이 되면서 만난 김동호(높은뜻연합선교회) 목사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됐다. 나는 옌볜과기대 교수 자격으로 코스타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해외 한인 유학생들에게 옌볜과기대를 알리고 교수·교직원 인재 발굴, 커리큘럼 개발, 학과 신설 등에 대한 계획을 홍보하고 준비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10년 이상 미국, 유럽, 러시아, 중국, 일본, 브라질 등지를 다니며 코스타 강사로 활동하다 보니 홍정길(남서울은혜교회) 이동원(지구촌교회) 오정현(사랑의교회) 목사 등 코스타 리더들은 물론이고 후원자들인 고 옥한흠, 고 하영조 목사와도 교류했다.
코스타 총무를 하던 곽수광(찬양사역자 송정미씨의 남편) 목사도 1995년 캐나다 토론토 대회장에서 만났다. 그 후 그와 가깝게 지냈는데 막내딸 현주에게 자신이 담임하는 푸른나무교회 청년 김정원 박사를 소개해 부부가 되게 해줬다.
내가 ISF 설립에 참여한 것도 옌볜과기대 유학생들과 관련이 있다. 1992년 개교하고 5년이 지난 1997년부터 옌볜과기대 졸업생들이 한국에 오기 시작했다. 나는 대외부총장이어서 그들과 만나 식사도 하고 상담도 하면서 도와주게 됐다.
당시 사랑의교회 교육목사로 사역하던 이상일 목사는 서울대 석사과정에 다니면서 외국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서울대 불문과 강사로 활동하던 장정애 교수가 이 목사를 소개해 서울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10여개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을 초청해 축제를 열고는 그들 나라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행사였다. 그때 “한국에 온 유학생들이 모국으로 돌아갈 때 반한(反韓) 인사가 돼 돌아간다”고 했던 이 목사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 목사와 나는 뜻을 모아 미국의 국제유학생친선프로그램을 참조해 ISF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유학생을 돌보기로 했다. 이 모임에 학원복음화협회 대표인 이승장 목사가 합류했다. 이 목사는 홍정길 목사와 친구이면서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했다. 나와는 브라질 등 여러 집회에 동행한 적이 있다.
그 후 이상일 목사가 영국으로 박사학위 받으러 나가자 나는 설립자의 한 사람으로서 더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만난 분이 데이콤 임원 출신 이민우 목사다.
2000년 초엔 사단법인 설립 준비를 마치고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이사장으로 초빙했다. 손 교수는 김진경 옌볜과기대 총장과도 절친한 관계였다.
외교부에 사단법인으로 정식 등록되기까지는 8년이나 걸렸다. 2015년부터는 이태식 전 주미대사가 2대 이사장, 내가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20여명의 대학교수, 기독실업인, 교회 지도자들이 이사로 섬기고 있고 국내에 10개 지부 26개 대학, 해외에 10개 지부 22개 지역에 설치돼 있다. 외교부에서 ISF를 국제공공외교단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명기 10:19)
***[역경의 열매] 이승율 <23> “비즈니스 선교는 하나님의 훈령이자 섭리”
비즈니스 없는 곳에서도 복음 전도, 방황하는 젊은이들 재능 발굴 소망
이승율 회장이 지난 2월 CBMC 회장 취임 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창업선교’ 동역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철 기독경영연구원장, 한정화 전 중소기업청장, 이 회장, 김진수(캐나다 인디언 원주민 사역자) 장로.
한국기독실업인회(CBMC)의 2018년 슬로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가정과 일터를 행복하게’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을 근거로 했다.
CBMC는 기업인과 전문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과 비즈니스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 국제사명공동체다. 주님, 민족과 열방, 공동체를 위한 헌신을 실천강령으로 삼고 있다.
나는 평소 강연에서 기독인의 신앙 수준과 경륜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내적 역량 강화와 문샷 싱킹(Moonshot Thinking)을 주문할 때가 많다. 문샷 싱킹은 달을 관찰하기 위해 망원경의 성능을 놓고 경쟁할 때 아예 달에 갈 우주선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혁신적 발상을 지칭한다.
CBMC 사역에서도 나는 이 두 가지 구심력(내적 역량 강화)과 원심력(문샷 싱킹)의 메커니즘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CBMC 회원들이 사회에서 두 가지 힘의 균형점을 이루는 린치핀(linchpin·바퀴 축에 꽂는 핀) 같은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당시 장 칼뱅은 우리에게 직업은 신성한 것이요, 누구에게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가르쳤다. 그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서 본인에게 부여해준 재능과 은총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쳤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CBMC 사역은 단순히 기존의 비즈니스 세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비즈니스가 없는 곳에서도 복음 전도와 함께 새로운 기회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비즈니스를 가르치고 소통하는 일이야말로 창의적인 선교의 길이라 믿는다. 이러한 대안이 21세기 글로벌 선교를 위한, 한국CBMC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중국 개혁·개방 시기 옌볜과학기술대 사역을 통해 만나본 수많은 중국 청년에게는 이렇다 할 만한 비즈니스가 없었다. 옌볜과기대 교수들과 CBMC 회원들은 지역사회에 있는 그들에게 경영자 과정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실시하면서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갈 것과 고비가 올 때마다 선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믿음의 기도를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 결과 수많은 기독 기업가들이 그들 속에서 자라나고 더러는 중국사회에서 기업인으로 우뚝 서는 모습을 여럿 보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외치며 다닌다. 과거엔 ‘비즈니스 포 미션(Business for Mission)’ 또는 ‘비즈니스 애즈 미션(Business as Mission)’이라고 했지만 이젠 ‘비즈니스 이즈 미션(Business is Mission)’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비즈니스 자체가 우리의 일터사역이 되고 우리의 선교적 삶이 돼야 한다.
이것은 기독 실업인으로서 나의 인생 후반전을 굳건히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훈령이요 섭리였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손을 잡고 새로운 기회의 문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어 주셨고 여기까지 세워 주셨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나는 오늘도 비즈니스가 없는 곳에서 우왕좌왕하며 방황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해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 속에 감춰져 있는 재능을 살펴보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푯대를 향해 나아가려 힘쓰고 있다.
***[역경의 열매] 이승율 <24> 청년들 위한 창업선교로 복음의 지평 확대
청년들에 희망주는 하나님 나라 구현, 같은 뜻 가진 동역자들과 속속 연결
이승율 회장(가운데)이 16일 서울 마포구 한국CBMC 중앙회 사무실에서 한국중소기업경영자협회 김황일 부회장(왼쪽), 한국중소벤처무역협회 이상운 부회장과 일자리창출 및 창업교육을 위한 업무 협약식을 가진 뒤 자리를 함께했다.
청년들을 위한 ‘창업선교’를 한국기독실업인회(CBMC)의 기치로 내걸기 시작한 건 2월 말부터다. 한국CBMC 중앙회장 취임 인터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립된 용어다.
회장이 되고 난 다음 묵상 중에 내게 ‘이때를 위함이라’고 하는 에스더 왕후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국적의 청년들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줄곧 외친 답변은 일자리 문제와 미래 진로로 불안해하며 떠도는 젊은 청년들의 영혼에 대한 도전이었다.
나는 먼저 이 시대 한국사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그의 나라’(마 6:33)는 젊은 청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의 장을 열어주고 기회의 사다리를 세워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복음의 지평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세워진 젊은 청년들과 함께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동역하며 마침내 한반도 통일 사역과 글로벌 미션의 길로 함께 달려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의 뜻’임을 나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꿈을 꾼다. CBMC의 새로운 활로를 열고 내적 역량을 강화할 테마로 ‘창업선교’를 부르짖고 동역할 회원들과 이웃 단체들을 섭외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놀랍게도 회원사들 중 이미 이런 일을 수행해 온 회원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됐다. 하나님께서 예비라도 하신 양 여러 단체가 속속 연결되고 있다.
한정화 전 중소기업청장이 설립·운영해 왔던 기독경영연구원(원장 박철),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창업사관학교와 BI(비즈니스 인큐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나선 중소기업진흥공단(이사장 이상직), 국방부로부터 전역 장병들의 창업교육을 위탁받고 상담과 인턴을 지원하는 사업을 함께 기획하고 있는 한국중소기업경영자협회와 한국중소벤처무역협회, 서울 노량진을 오가는 20만명 공시생을 대상으로 창업선교의 기치를 내건 CTS(우리는 이 사역을 ‘노량대첩’이라 부르기로 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기반을 둔 동남아 지역 창업 선교사들의 단체인 커피선교회(회장 손문성 선교사), 캄보디아 라이프대학 및 라오스 비엔티안에 있는 로고스칼리지의 직업학교 등이 대표적 사례다.
회원사 가운데 르호봇비즈니스센터의 박광회 회장(세계로 지회)은 20년 전부터 창업 희망자들을 돕는 공유사무실 운영 사업을 계속해 온 결과 현재 전국에 정부 지원으로 54개 사업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행복한 지회’의 조성화 대표는 본인 스스로 창업한 경험을 토대로 1200개 이상의 기업 컨설팅을 해온 바 있다.
더불어 한국CBMC 창업선교위원회 멘토단에는 200여 창업사를 배출한 포스텍지주회사의 박성진 교수, 한동대 창업 및 취업담당 교수인 김학주 ICT 공학부장, 공정거래위원회 국장 출신으로 창업 기업의 고충을 도와주는 ‘지식비타민’의 이경만 대표 등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들과 함께 이루는 창업선교의 꿈이 하나님 손에 붙잡혀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미래 희망의 기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우리 청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복음의 지평을 열어 주소서. 아멘.”
***[역경의 열매] 이승율 <25·끝> 베드로를 닮은 나… 그물 던질 ‘깊은 곳’은 북한
가족 3대 16명 모두 믿음의 자녀… CBMC 통해 대북 비즈니스 꿈꿔
이승율 회장 슬하의 직계 가족 사진. 이 회장 가족은 3대에 걸쳐 16명이 모두 교회에 출석하는 믿음의 가정으로 우뚝 섰다.
스스로 인생을 반추해 볼 때 어깨가 남들보다 넓고 성정이 불같이 급했던 베드로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깊은 곳’은 어디일까를 곰곰이 묵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마 26:34, 막 14:30, 요 13:38)의 비겁함과 불신앙적인 태도가 내게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회개를 수없이 해봤다.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했던 베드로의 고백(마 16:15∼16, 막 8:29, 눅 9:20)이 곧 나의 고백이 될 것이라는 철벽같은 믿음도 스스로 느낀다.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고 당부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겨 평생의 화두로 삼겠다는 다짐도 여러 번 했다.
베드로에 관한 이런 것들을 묵상하면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떨리는 새로운 감동을 느낀다. 마음에 울컥거리는 소망이 생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가정과 일터가 주님이 원하시는 그 ‘깊은 곳’ 반석 위에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굳건히 세워지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세 자녀와 여덟 손주들이 ‘깊은 곳’에 가서 날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가족기업(반도이앤씨)이 대를 이어 이웃을 돌보고 나라와 민족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미덥고 ‘귀여운’ 믿음의 선배를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단연코 내 세 자녀를 택할 것이다. 그들은 불신자 아버지를 위해 10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온전히 금식하며 기도해 주었고 스스로도 믿음의 자녀로 잘 자라줬다.
연세대 의대를 나온 첫째 동엽은 신경외과 전문의가 돼 참포도나무병원을 운영하고 있고 둘째 동헌은 포항공대를 졸업한 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양자물리학 석·박사 과정과 예일대 박사후 과정, 산타바바라 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작년부터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미국에 유학 간 딸 현주는 코넬공대 토목학과 학사·석사(CM전공)를 졸업, 부모가 하는 건설업을 계승한 셈이 됐다. 세 자녀가 일찍 가정을 이룬 후 낳은 8명의 손주(4남 4녀)까지 믿음의 아이들로 자라고 있으니 나는 가끔 ‘8복 가정’이라 말한다.
내가 소망하는 그 ‘깊은 곳’은 북한이 되리라는 운명적 예감이 든다. 평양과기대 졸업생들에게 창업스쿨을 열어주고 후일 그들이 한국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지원하는 BI(비즈니스 인큐베이터)의 파트너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일까. 한국기독실업인회(CBMC)를 통해 그들과 손잡고 북한에 비즈니스를 일으키며 장차 한민족 통합 경제의 일꾼으로 거듭나도록 이끄는 일이 불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예비돼 있고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으로 충만하리라.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와 동행하시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