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좋은 시
환상/ 진실/ 감동의 귀환
강인한
환상은 논리를 초월한다.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는 동선 속에 건너뛰는 상상의 사이사이에는 이미지라는 숨은 징검돌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시를 읽는 묘미를 더한다. 요즘 신인들의 시가 환상을 추구하여 그럴 듯한 허구적 환상을 펼쳐내는 것을 볼 수 있으나 대개가 이것저것 잡동사니 같은 우연적인 환상의 이미지들을 연결 고리도 없이 마구잡이로 늘어놓기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읽다 보면 도대체 어떤 그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하고 종당엔 무수히 많은 기묘한 조각 그림 같은 이미지들이 출몰하여 그것들 스스로 시너지 효과를 내기는커녕 비유의 효과를 상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건 마치 세 종류 네 종류의 음료수를 섞었을 때 독특하고 신선한 맛이 아니라 오히려 밍밍한 개숫물 같은 맛이 난다고 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꽃 속에서 개가 짖는다
귀가 너무 아파서
성악가는 꽃을 꺾어 입에 넣고 씹는다 볼을 뚫고
사냥개 송곳니가 삐져나온다
머리가 나오고
앞발이 나오더니
으르렁거리며 풀밭 위의 피아노를 향해 달린다
공중엔 칠색의 손들이 새처럼 날고
그녀의 혀는 점점
100m 트랙처럼 늘어난다 교미 중인 구렁이처럼
목울대를 휘감는 말과 그림자
하늘의 유두에서 노을이 흘러내려 풀밭을 적시고
흰 손이 방아쇠를 당긴다
탕! 출발 신호가 울리자
피아노 속에 숨어 있던 흑인 아이들이 튀어나와
트랙을 달리고 달린다
그녀의 목구멍 속으로 폐 속으로 자궁 속으로
입과 항문이 입출구인 카니발 가곡무대
무대 중앙에 흰 드레스를 입은 침묵이 서 있고
객석 계단을 따라 빗물이 혀가 되어 흐른다
죽은 풀 죽은 꽃들의 살을 핥는
—함기석, 「칠색이 색칠되는 사물들의 누드 4」,『詩로 여는 세상』, 2011년 여름호
함기석의 시에서 환상적 이미지들은 특별한 에너지를 가지고 활발히 움직인다. 그가 문학 아닌 수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인지 그는 논리를 초월하는 환상의 창조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는 듯하다. 이 시는 ‘죽은 꽃 속의 개 짖는 소리’에서 출발한다. 성악가(그녀)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입 속에 꽃을 넣고 씹는데 ‘볼을 뚫고/ 사냥개 송곳니가 삐져나온다’ 흡사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어버리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 성악가의 입 속에서 출현한 개는 풀밭 위의 피아노를 향해 달리고 그녀(성악가)의 혀는 ‘100m 트랙처럼 늘어난다’ 그리고 트랙이 설치되었으므로 피아노의 검은 건반 속 흑인 아이들이 트랙을 달리는 것이다. ‘입과 항문이 입출구인 가곡무대/ 무대 중앙에 흰 드레스를 입은 침묵이 서 있’는 이미지는 이 시의 하이라이트이다. 성악가에게 침묵의 의미는 무엇인가(의인화된 침묵이라니!). 생명에 있어서 ‘죽음’과 같은 의미일 터이다. 그녀는 바로 ‘죽은 꽃’에 다름 아닌 존재인 것이다.
췌사를 하나 더하자면 시인의 뛰어난 환상 창조 능력에 비하여 ‘칠색, 색칠’ 같은 제목에 보이는 언어유희는 약간 머쓱한 느낌을 준다.
신인을 선발하는 공모제에서 마지막 최종 본심에 남은 세 명 내지 다섯 명의 작품 수준은 별반 차이가 없다. 여기에선 대체로 ‘운’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도출되는 과정에 사실은 문제가 크게 내재하기도 한다. 매우 유력하며 중요한 신인을 예심에서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탈락자들 속으로 파묻어버리는 경우. 평론가들 일색으로 꾸며진 심사위원들이나, 아직 신인의 티를 채 벗지 못한 심사위원의 구성에서 뽑힌 새로운 신인에는 아무래도 믿음이 덜 간다. 등단 10년 이상의 실력을 인정받는 시인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선발한 신인은 그에 걸맞을 만큼 탄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다음의 시인 조인호에 믿음이 가는 첫째 이유다.
철과 장미의 문명 속에서 그는 용접공으로 일했다 철가면을 쓰면 산소용접기 밖으로 장미처럼 피어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그는 철과 장미를 사랑했다 불이 붙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고 쇠못을 씹어 먹는 철인이었다 중금속에 중독된 그의 눈은 세상이 온통 붉은색 셀로판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용접 불꽃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들수록 세상에 없는 단 하나의 붉은색을 지닌 철의 장미를 그는 볼 수 있었다 그의 피는 붉은 철로 철철 흘러 넘쳤고 그는 조금씩 녹슬어 갔다
그의 철근콘크리트 지하방은 습하고 어두운 철가면 같았다 철가면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자물쇠처럼 무거웠다 강철 수면(水面) 위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점점 철가면을 닮아갔다 그는 눈을 뜰 때마다 철가면을 쓴 채 욕조 안에 몸을 담근 자신을 발견하곤 헀다 파이프들이 붉은 녹을 떨어뜨리며 삐걱거렸다 욕조 속의 물이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그의 알몸은 장미 잎 같은 붉은 화상 자국투성이였다
그는 일생 동안 불꽃만을 바라본 몽상가에 가까웠다 그는 용접 불꽃 속에서 살아 있는 구멍들을 보았다 오, 입 벌린 구멍들 모음들 비명들이 불타오르는 지옥을 보았다 그 구멍 저 편에선 아름다운 붉은 장미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두 눈엔 콘센트 구멍 같은 어둠이 고여갔다
그는 철가면을 쓴 채 홍등이 켜진 도살장 골목을 붉은 쇳물처럼 흘러다녔다 도살장 골 목 어둠 저편 번쩍거리는 칼날들이 뱀의 혀 같은 용접 불꽃처럼 쉭쉭거렸다 붉은 장화를 신은 인부들이 소 머리가 가득 쌓인 수레를 끌고 다녔다 도살장 담벼락엔 덩굴장미가 대퇴부 핏물처럼 번지고 있었다 담벼락 너머 높다란 송전탑에서 철근들이 금속성의 동물 울음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도살장 시멘트 바닥 물웅덩이 위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고 고압전류 같은 쩌릿쩌릿한 비가 내렸다
그는 송전탑 꼭대기 위로 덩굴장미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번쩍, 가시철조망 같은 번개가 송전탑에 내리꽂혔다 고압전류 속에서 그는 자신의 철가면과 함께 흐물거리며 녹아들었다 철가면이 송전탑의 철근 속으로 들러붙고 있었다 송전탑 밑 지상의 사람들이 붉은 뼈를 드러낸 채 해골처럼 웃고 웃었다 번개가 번쩍거릴 때마다
송전탑은 거대한 한 송이 붉은 장미로 피어났다
—조인호, 「철가면」, 시집 『방독면』, 문학동네, 2011, 6
신인의 첫 시집은 독자에게도 설레는 기대감을 안겨준다. 조인호의 첫 시집 『방독면』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기억할 만한 시집임에 틀림없다. 하나의 문제를 던져준다는 점에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 이 시리즈의 시집 전체가 안고 있는, 낱장으로 금방 너덜너덜 페이지가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장정이나 편집 체제의 불편함은 접어둔다 치더라도, 특별히 이 시집 2부에 보이는 세로짜기 시의 배열은 눈에 띈다. 아니, 눈에 띄게 거슬린다. 굳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할 어떤 필연성이 없어 보인다.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신인의 유치한 객기에 지나지 않을 뿐으로 간주된다. 2008년 가을호 계간지에 발표하고, 약간의 손질을 거쳐 이 시집 맨 앞에 배치한, 이를테면 시집 전체의 향방을 지시하는 마스터키에 해당하는 작품 「철가면」은 힘차게 비극을 밀고 나가는 저력과 시의 탄탄한 구조미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함기석의 시가 독자에게 환상의 그림을 그려주며 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이 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환상적인 그림 속에 숨은 진실을 독자에게 찾아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산소 용접을 하는 용접기능공이 얼굴에 쓰는 마스크를 여기서 시인은 ‘철가면’이라고 부른다. 가면이란 자신의 얼굴은 물론 속마음, 표정, 감정 들을 감추기 위해 쓰는 것, 철가면은 감정이 없고 아무런 생각이 없고 표정이 없는 또 하나의 얼굴. 금속을 용접하는 불꽃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느새 기계의 콘센트 구멍을 닮아 있다. 강철, 쇳물, 파이프, 녹, 장미, 도살장, 핏물, 번개… 등의 이미지가 거느리는 색조는 모두 붉은색이다. 그 붉은색 속에서 매일같이 살아가며 그 스스로 파이프처럼 녹이 슬어가다가 그는 마침내 송전탑 위로 기어 올라가 자신을 거기에 용접시키는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한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잃고 문명사회의 기계화 된 일상에 함몰되어 한낱 기계의 일부로 전락하고 만다는 메시지가 드물게 힘찬 필치로 그려진 시라고 하겠다.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이시영, 「어머니 생각」, 『현대시학』, 2011년 7월호
고집스레 몇몇 해를 산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산문시라는 게 자칫 한 발 옆으로 비키면 그대로 시 아니라 산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험이 크다. 그래서 한때 그가 나가서 가르치는 대학원의 학생들조차 선생님인 그가 그 무렵에 쓴 산문시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때가 많았다. 신문기사 같기도 하고, 그저 지난날의 흔치 않은 인상을 간단히 메모한 것에 지나지 않은 산문일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산문시 역시 일단은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시관이었고, 그는 산문시에서는 어느 한 대목에 포에지가 스며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좀더 유연한 포즈로 시에 접근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산문시에 대한 각각 다른 견해의 차이로 나와 그 사이에 상당히 어색한 상거의 시간이 흘렀고, 그러다가 홀연히 나타난 이 시를 대하자 눈이 번쩍 띄었다.
시인의 첫 시집 『만월』에서 느끼던 순수한 감동의 물결이 오늘 다시 휘몰아쳐 온 것이었다. 이 시를 읽은 우리 연배의 시인들 모두 같은 소감으로 반가워했다. 이제 우리 세대에선 생존한 어머니보다 사별한 어머니가 더 많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아름답고 즐거운 것만 간직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는가. 치매로 고생하는 어머니와 이별하기까지의 괴로운 기간이 길면 길수록 자식 된 도리로서의 슬픔은 반비례하는 것에 틀림없을 터. 따로 간병인을 둘 수 없는 처지고 보면 병자를 모시고 사는 그 시중이 얼마나 괴롭고 마음 아플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머니 손목을 문고리에 묶어두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가슴을 쓸어내리’는 화자의 모습이 선하다.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좋아하시던 어머니…….’ 이런 모자간이다. 그 어머니에게 이만한 효자는 다시없고, 거꾸로 그 어머니 앞에 아들은 그만한 불효자가 또한 다시없다. 어느 순간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이 순수 서정의 감동은 현란한 수사도 아니요 이 시의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오늘 이시영 시인이 돌아왔다. 진정성이 주는 감동의 현현을 여기서 본다.
—《詩로 여는 세상》201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