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고백 / 정선례
좋은 일이 있을 때 수다스럽게 자랑하면 나보다 더 기뻐하는 친구와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기운없이 혼자 들어온 그 누군가에게도 말없이 차 한 잔 건네고 싶다.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다 따뜻함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이다. 우리는 저마다 기호식품이 뚜렷하다. 비 오는 날이나 글 쓸 때 마시는 뜨거운 원두커피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이 들어 가면서 눈물 쏟아본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헤아리게 된다.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눈부신 태양이 환하게 비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어둠과 밝음의 갈림길에서 아끼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마음 통하는 사람과 산길을 걷고 산 아래 카페에서 맛있는 차는 즐거움이다. 나와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은 차에 운동화 하나쯤은 싣고 다닌다. 시도 때도 없이 숲 걷기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내 가방에는 항상 보온병이 들어있다. 한여름에도 팔팔 끓인 보리차나 커피를 마셔야 갈증이 풀리는 것 같고 기분도 좋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온도의 차이가 매우 크다. 우리 집 전기밥솥에는 수시로 마시기 위해 미리 넣어둔 우유나 물이 데워져 있다. 음식이나 집이 뜨거워야 좋고 사람까지도 그렇다. 식당에 가면 차림표에 돌솥비빔밥이 있으면 나는 으레 시킨다. 그릇 가게에서 마음에 든 게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손이 가서 집에도 뚝배기가 몇 개 있다. 라면도 이 그릇에 끓이면 맛이 찰지고 다 먹을 때까지 식지 않아 요리할 때 즐겨 사용한다. 뜨거운 음식이 더욱 당기는 건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이다. 뜨겁게 더 뜨겁게를 입에 달고 산다. 내가 느끼는 음식 맛을 좌우하는 첫 번째 조건은 재료의 온도이다. 피자도 배달시킨 거는 어느 정도 식어있어 별로고 가게에서 갓 구워내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야 맛있다. 과일도 실온에 뒀다 먹어야 좋다. 한여름에도 나는 냉장고 물을 꺼내 마시지 않고 실온에 둔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신다. 우리 집에 와서 차를 마시다가 간혹 입천장이 덴 손님들이 있다. 팔팔 끓여 내는데 그렇게까지 뜨거운 줄 모르고 순간 후룩 마셨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니까 상대방도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이 뜨거운 음식을 못 먹었다. “차가 뜨거워요” 차를 내오면서 내가 항상 하는 말이다. 담배나 술처럼 중독되었나 보다. 주변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다. 내가 유일하게 차게 먹는 음식이 있긴 있다. 맥주와 수박이다. 맥주는 일년내내 차게 마시고 수박은 한여름에만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다.
이런 습관을 주변에서는 심심치 않게 걱정하는지라 일 년에 몇 차례 이빈인후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안심된다. 억지로라도 미지근하거나 차갑게 먹으려고 노력하면 바뀔까?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오롯이 내 몫이다. 그런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구가 크지만 건강은 지켜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아무리 뜨거운 것이 생각나도 늦기 전에 식도나 위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이제는 습관을 바꿔야 하는데 될지 모르겠다.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는 내 의지에 달렸다는 것을 잘 알지만 뜨겁지 않으면 맛이 없다. 아프고 나서 체력이 많이 떨어져 한동안 해롭다 한 것은 일절 끊었다.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다시 예전 습관으로 돌아갔다. 건강에 대한 경각심이 흐려졌다. 후회의 순간과 만나지 않으려면, 이 글을 쓰는 오늘을 계기로 해로운 것들과 이별해야 한다. 올바른 식습관인 너무 뜨거운 음식이나 차를 포기하는 건 여전히 자신 없지만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취향보다 몸이 고장났을 때 치료의 고통이 크기에. 100세 시대라 하지 않던가.
함께 사는 사람과 사소한 의견 차이로 종종 큰소리가 오간다. 며칠씩 말을 하지 않고 지내서 아주 불편하다. 비록 잘 맞지는 않지만 내 성향을 아는 남편은 크게 다툰후에도 화목보일러가 꺼질세라 나무를 넣는다. 추우면 아파하는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하게 살아온 우리가 이만큼 세월을 지나온 것은 그나마 서로에게서 따뜻한 배려를 보았기에 가능했다. 대화를 충분히 하면서 타고난 성향이 다름을 인정하고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평화가 찾아 든 것이다. 남편은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밤새워 켜야 하고 일하고 들어와서 저온저장고에 들어가 앉았다 나온다. 더위를 많이 타서 방 온도를 낮게 해놓고 한겨울에도 옷을 얇게 입는다. 여름을 못 견뎌 하며 외출하고 돌아오면 에어컨부터 튼다. 냉장고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아 항시 보리차를 끓여 냉장고에 채워 놓는다. 방바닥이 지글지글한데도 솜이불을 덮어야 잠이 드는 나와는 성향이 참 다르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시간이 더디게 혹은 빠르게 흐르는 것을 경험한다. 성향의 차이에서 오는 사람 관계에서도 온도 차이는 있다. 만나면 편한 사람과는 서로가 가진 온도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몸에 열이 많은 이들은 대부분 이성적이고 자신만의 선이 있어서 넘어오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이들과 있으면 거리감이 있어 외롭다. 반면에 몸은 차가운데 마음의 온도는 뜨거운 사람이 있다. 이들은 자칫 데일 수도 있어 약간의 거리는 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대는 어떤 온도를 가졌는가?
첫댓글 저는 미지근합니다. 시적 감수성이 풍부하신 정 선생님은 뜨거운 분이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미지근함 좋아요. ㅎ
저도 뜨거운 음식은 좋아하는데 몸은 무척 찹니다.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심성이 곱지 못하구요.
저와 완전 같습니다. 계모임 해야 할 듯 ㅎㅎ
저도 항상 뜨거운 음식을 좋아합니다. 더운 여름철에도 냉카피는 싫습니다.
곽주현 선생님 뜨거운 남자셨군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글 읽고 회원들이 자신의 온도가 어떤지 생각하겠는데요?
ㅎㅎ 고맙습니다.
음식 성향도 성격을 많이 닮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는 똑 부러진 성격을 가지신 것 같아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황정혜 선생님과 숲길 걷고 싶습니다.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글 정말 재미있게 잘 쓰시던데요.
방송작가나 잡지사에 근무하셨다면 능력을 발휘하셨을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그때 달라요. 따스하게 다가오면 따뜻으로 차갑게 다가오면 냉차게 아직도 사람이 덜 되었나 봅니다. 하하하!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마음이 아닐런지요.
저도 예전에 글에도 썼지만 아주 뜨겁거나 차갑거나를 좋아합니다.
미지근한 건 차도, 인간 관계에서도 별로입니다.
"선례는 뜨거운 걸 좋아한다."
맞지요? 호호!
나를 미소짓게 하는 여인 양선례 선생님
누구에게 뜨거운 고백을 했나 했습니다. 제목이 호기심을 끄네요.
저도 찬물은 안 먹고, 뜨거운 방바닥 좋아해요.
제목을 이렇게 저렇게 써보고 최종 결정.
스승의 역할에 가장 성실한 분 박선애 선생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