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론 강설 41>
기신론을 주석한 여러 소가들(1)
고래로 기신론에 대한 주석서가 많이 나왔다.
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한 · 중 · 일 동양 삼국에서 간행된 기신론 주석서가 200여 종에 달하고 특히 불교학이 발달된 일본에서 간행된 기신론 연구서만 하여도 최근까지 200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연구가 시도되어 왔다는 것은 바로 기신론이 대승불교의 중요한 텍스트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최초의 기신론 주석서는 중국의 수(隋)나라 때 담연(曇延:516~588)이 지은 <대승기신론의소(大乘起信論義疏)>이다.
그는 처음 『열반경』 연구에 몰두하여 <열반경소>를 짓기도 하였는데, 잠을 자다 꿈에서 마명을 만났다는 설화가 있다.
꿈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백마를 타고 나타나 그에게 『열반경』의 근본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담연은 마명보살이라 생각하여 그가 『기신론』의 저자임을 믿고서, 『열반경』의 대의와 『기신론』의 대의가 서로 상통함을 발견하고 기신론의 소를 짓는 실마리를 찾아냈다고 한다.
『열반경』의 중요한 대의가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체중생실유불성설(一切衆生悉有佛性說)’이다.
이는 기신론의 진여설과 그대로 상통하는 내용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열반경과 기신론을 통하여 당시 중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소개된 것이다.
담연에 의하여 기신론의 가르침이 당시 중국 사회에 많이 퍼지게 되었다.
담연은 북주(北周) 문제(文帝)의 귀의를 받아 한 때 국통(國統)으로 있었던 스님이다.
그러나 후에 무제(武帝)의 폐불사태(廢佛事態)가 일어나 태행산(太行山)에 숨어 지내기도 한다. 이때 그는 기신론의 서문인 귀명게를 읽으며, 불교가 쇠망할까 안타까워하여 불교중흥의 의지를 다지며, 불교가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갈구하면서 법을 펴고자 하는 서원을 세웠다.
그러다가 수(隋)나라 문제 때 황제를 만나 불교를 부흥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그를 신임하여 불교의 승려들을 지도하게 하게 한 적이 있다.
그가 지은 <열반경소>는 일부분만 전해지고 <기신론소>는 상 · 하 2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하권이 없어지고 현재 상권만 전해지고 있다.
담연과 같은 시대의 지개(智愷:518~568)도 <기신론소>를 지었다.
그는 기신론의 주(註)와 소(疏), 그리고 <일심이문대의(一心二門大義)>, <소주본교합(疏註本校合)> 등 4개의 저술을 했다고 하지만 대각국사 의천이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목록』에 이름만 남아 전할 뿐이다.
혜원(慧遠:523~592)이 지은 <대승기신론의소>는 예로부터 여러 소들 가운데삼대소(三大疏)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소로 알려져 왔다.
그가 정영사(淨影寺)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정영(淨影)이 호(號)가 되어 그의 소를 <정영소>라 부르기도 하였다.
똑같은 이름의 <대승기신론의소>를 당(唐)의 화엄 2조 지엄(智儼:602~668)이 지은 것도 있었지만 남아 전하지 않는다. 세 사람의 소(疏) 이름이 같았다는 것이다.
혜원은 원래 선법(禪法)을 열심히 닦아 이름이 알려진 승조(僧稠:480~560)의 제자였다.
승조는 달마가 중국에 오기 이전의 선법인 선관(禪觀)을 닦아 선승으로 이름나 있던 스님이었다.
이 승조에게 와서 법을 구한 혜원이 선관을 닦다가 기신론의 ‘심진여(心眞如)’라는 말에 매료되어, 관법 중에 진여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일체 망념이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진여라는 것을 터득하였다 한다.
그의 <기신론소>에는 “심법 가운데 망(妄)이 없어진 것을 진(眞)이라 한다(心法中無妄故 是謂眞)”는 구절이 있다.
혜원은 한때 경전을 열심히 독송하였는데, 『법화경』과 『유마경』을 1000번씩 읽었다 한다.
그렇게 경을 열심히 수지 독송하고 호법의 서원을 크게 세워,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폐불정책을 펴 불교를 탄압할 때 무제에게 불교를 탄압하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하던 불교탄압중지를 결연히 요청하여 주위를 감동케 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삼무일종의 난(三武一宗之難)’이라고 하는 중국 역사에 있어서 대대적인 불교탄압을 자행한 네 왕이 있었다.
북위(北魏)의 무제, 북주(北周)의 무제, 당(唐)의 무종(武宗)의 무(武)자가 들어간 세 왕과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불교를 탄압한 사태(沙汰)를 4번의 폐불사태(廢佛沙汰)라 한다.
이를 법난(法難)이라 하는데 후주 세종 때가 가장 극심했다.
- 지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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