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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누구인가
아홉 번째로 문수보살은 현수(賢首)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모든 부처님은 다만 일승(一乘)에 의하여 생사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모든 불국토(佛國土)를 관찰하여 보면 사정이 각각 다릅니다. 즉 세계, 중생, 설법(說法), 초월(超越), 수명(壽命), 광명(光明), 신력(神力)등 모든 조건이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불법을 갖추지 않고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현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문수보살이여! 불법은 변하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한 법[一法]일 뿐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한 길[一道]에 의하여 생사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몸은 다만 하나의 법신(法身)이며, 또 그 마음이나 지혜도 일심(一心)이며, 하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방법에 따라서 설법과 교화도 달라집니다.
또 모든 부처님의 국토는 평등하게 장엄되어 있지만, 중생들이 쌓아온 업[宿業]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눈에 비치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힘은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중생의 숙업이나 과보에 따라서 진실한 세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열 번째로 모든 보살들은 문수보살을 향하여 물었다.
"불자여,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을 저마다 설하였습니다. 아무쪼록 다음에는 그대가 그 깊은 지혜에 의하여 부처님의 경계를 설하여 주십시오.
부처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며, 또 그 원인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면 거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또 어떻게 하면 그 세계를 알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때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여래의 깊은 세계는 흡사 허공과 같이 광대합니다. 설사 중생이 거기에 들어간다 해도 진실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계의 원인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고 있으며, 가령 부처님이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설법하신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다 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해탈시키고자 할 때에는 중생의 마음이나 지혜에 따라서 불법을 설하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설하여도 불법은 다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중생의 능력에 따라서 자유자재하게 설하여 무수한 중생의 세계에 들어가시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항상 맑고 고요합니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만의 세계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림이 없으며 그 세계는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업(業)도 아니고 번뇌고 아니며 적멸(寂滅)도 아닙니다. 또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평등하게 중생의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 안에 있고, 부처님은 단 한 생각[一念]만으로 중생의 마음을 낱낱이 분명하게 압니다."
문수보살이 이와 같이 설했을 때,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하여 이 사바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의 숙업과 신체, 능력, 지계(持戒) 등의 각기 다른 상태가 나타났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방의 무량무수한 세계에 있는 중생의 차별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화엄경> ‘제 6장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몸붙여 살던 땅 곧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열일곱 살 된 소년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이스라엘은 늘그막에 요셉을 얻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여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
한 번은 요셉이 꿈을 꾸고서 그것을 형들에게 말한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형들은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셔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묶은 단이 우뚝 일어서고, 형들의 단이 나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였어요."
형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성싶으냐? 정말로 네가 우리를 다스릴 참이냐?"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얼마 뒤에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들어 보셔요. 또 꿈을 꾸었어요.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그가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할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었다. "네가 꾼 그 꿈이 무엇이냐? 그래, 나하고 너의 어머니하고 너의 형들이 함께 너에게로 가서, 땅에 엎드려서, 너에게 절을 할 것이란 말이냐?"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의 양 떼를 치려고, 세겜 근처로 갔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가 알고 있듯이, 너의 형들이 세겜 근처에서 양을 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너의 형들에게 좀 보내야겠다." 요셉이 대답하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너의 형들이 잘 있는지, 양들도 잘 있는지를 가서 살펴보고, 나에게 와서 소식을 전해 다오." 그의 아버지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그를 떠나보냈다. 요셉이 세겜에 도착하였다.
어떤 사람이 보니, 요셉이 들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가 요셉에게 물었다. "누구를 찾느냐?"
요셉이 대답하였다. "형들을 찾습니다. 우리 형들이 어디에서 양을 치고 있는지, 나에게 일러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너의 형들은 여기에서 떠났다. '도단으로 가자'고 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 가서, 도단 근처에서 형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서, 그를 죽여 버리려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말하였다.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자,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르우벤이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건져 내려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는 흘리지 말자. 여기 들판에 있는 구덩이에 그 아이를 던져 넣기만 하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자." 르우벤은 요셉을 그들에게서 건져 내서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요셉이 형들에게로 오자, 그들은 그의 옷 곧 그가 입은 화려한 옷을 벗기고,
그를 들어서 구덩이에 던졌다. 그 구덩이는 비어 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다.
그들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마침 이스마엘 상인 한 떼가 길르앗으로부터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낙타에다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자,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 차라리 그 아이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자. 아무래도 그 아이는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피붙이이다."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갈 때에,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꺼내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스무 냥에 팔았다. 그들은 그를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르우벤이 구덩이로 돌아와 보니, 요셉이 거기에 없었다. 그는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서,
형제들에게 돌아와서 말하였다. "그 아이가 없어졌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그들은 숫염소 한 마리를 죽이고, 요셉의 옷을 가지고 가서, 거기에 피를 묻혔다.
그들은 피묻은 그 화려한 옷을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말하였다. "우리가 이 옷을 주웠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그 옷을 알아보고서 부르짖었다. "내 아들의 옷이다! 사나운 들짐승이 그 아이를 잡아 먹었구나. 요셉은 찢겨서 죽은 것이 틀림없다."
야곱은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 베옷을 걸치고, 아들을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울었다.
그의 아들딸들이 모두 나서서 그를 위로하였지만, 그는 위로받기를 마다하면서 탄식하였다. "아니다. 내가 울면서, 나의 아들이 있는 스올로 내려가겠다." 아버지는 잃은 자식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요셉을 보디발이라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는 바로의 신하로서, 경호대장으로 있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37장)
오늘 화엄경에서 [여래의 깊은 세계는 흡사 허공과 같이 광대합니다. 설사 중생이 거기에 들어간다 해도 진실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계의 원인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고 있으며, 가령 부처님이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설법하신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다 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를 보자.
이런 문장을 조심해야 한다. 사람을 현혹시키려는 거짓 문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 입지를 강화하려는 본능적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불가지론이 맞고,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현상에 의식을 투입하는 뇌의 작동 과정일 뿐이며, 이때 만들어지는 언어적 연결에 의해 늘 구름처럼 흩어졌다 모였다는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 위의 문장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 것일까? 해보자.
[여래의 깊은 세계는 흡사 허공과 같이 광대합니다. 중생도 그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래는 여래대로 중생은 중생대로, 아니 여래가 중생이 되고 중생이 여래가 되어 각자만큼 인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부처님이 중생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많이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만큼 아는 걸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평등이고 무차별의 시선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염두에 둘 것은 언어로 우리는 관계의 지위를 명확히 하려 하고, 이것이 실제로 질서를 잡아주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질서는 공동체의 높은 생존 전략이 된다.
오늘 창세기에서 [형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성싶으냐? 정말로 네가 우리를 다스릴 참이냐?"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를 보자.
꿈 이야기를 통한 복선 깔기도 오래전부터 시도해온 이야기 요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문장이다. 이는 지금도 유효한데, 자칫하면 이야기 밀집도를 흐릴 수 있다. 개연성과 필연성을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심해서 만들어 내야 한다.
<향모를 땋으며>에 나오는 글을 보자.
[연장자들 말로는 옛날에는 나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나름의 회의를 소집하여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식물이 귀머거리에 벙어리이며 고립되어 소통하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대화 가능성은 일언지하에 일축되었다. 과학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완전히 중립적인, 관찰자로부터 독립적으로 관찰하는 지식 획득 체계를 표방한다. 하지만 식물이 소통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도출된 것은 ‘동물’이 말하는 데 쓰는 메커니즘을 식물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식물의 잠재력은 오로지 동물의 능력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인식되었다. 최근까지도 식물이 서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꽃가루는 영겁의 시간 동안 어김없이 수꽃에서 암꽃으로 전달되어 열매를 맺었다. 바람이 꽃가루를 어김없이 날라준다면 메시지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연장자들이 옳았다는, 나무들이 정말로 서로 이야기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나무들은 페로몬을 통해 소통한다. 페로몬은 호르몬을 닮은 화합물로, 의미를 품은 채 바람을 타고 퍼진다. 과학자들은 곤충에게 공격받아-매미나방이 잎을 뜯어 먹거나 나무좀이 나무껍질에 파고들어-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나무가 방출하는 특별한 화합물의 정체를 밝혀냈다. 나무들은 이런 조난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이봐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제가 공격을 받고 있어요. 길목을 막아서 적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세요.” 바람을 맞는 쪽의 나무들은 경고 신호를 전달하는 소수의 화합물을 감지하여 위험을 알아차린다. 이는 방어용 화학 물질을 만들 시간을 벌어준다. 유비무환이니까. 나무들이 경고를 주고받고 침입자는 퇴치된다. 이는 개체뿐 아니라 숲 전체에도 유익하다. 나무는 상호 방위를 논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 글에서 “페로몬은 호르몬을 닮은 화합물로, 의미를 품은 채 바람을 타고 퍼진다.”를 보자.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오로지 생존 전략일 것이다. 페로몬의 화학식이 복잡해도 여기에 존재의 고찰이 들어있을까? 앗, 이 문장을 쓰는 순간 식물이 왜 그런 생각을 못한다고 여기고 있을까? 식물과 우리들의 구성 원자는 같은 게 많지 않은가? 단순히 뇌가 없다는 걸로 식물은 사유를 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인간만이 철학과 종교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질문과 풀이가 수많은 텍스트로 나와 있다고 하더라도 실은 잘 모르고, 의외로 질문과 풀이도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무는 누구인가, 나무는 왜 사는가? 아마 할 것이다. 다만 텍스트를 생산하지 못할 뿐 나나 나무나 같은 질문을 던지며 살아갈 것이다. 일단 그렇게 생각해 보자.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글을 보자.
[파리의 포장도로가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장발장의 집은 그와 상관없이 완전한 별천지였다. 부근에 바렌 거리의 고전적인 훌륭한 주택가가 있고, 앵발리드의 둥근 지붕이 바로 옆에 보이고, 부르고뉴 거리와 생 도미니크 거리의 포장마차들이 화려하게 근처를 굴러다니고, 노랗고 희고 빨갛고 갈색인 승합 마차들이 바로 옆 사거리를 지나 다녔으나 그의 집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플뤼메 거리에는 늘 쓸쓸함이 가득했고 조용했다. 옛 주인은 죽고, 혁명이 스쳐 가고, 집의 부(富)는 무너져 버리고, 부재와 망각이 겹치면서 양치류, 현삼, 독당근, 서양가새풀, 디기탈리스, 키 큰 잡초, 연녹색 옷감 같은 넓은 잎을 가진 키 큰 식물과 도마뱀, 풍뎅이, 겁 많고 재빠른 곤충들이 있는 대로 다 모여들어 그 거리는 점점 더 기묘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이곳은 정체가 불투명한 야성적이고 거친 위대성이 땅 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의 보잘것없는 손길을 대신해 개미에서 독수리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신의 손길이 닿아, 파리 한구석, 그 하잘것없는 정원에 ‘신세계’의 처녀림과 같은 거칠고 웅대한 자연이 한껏 꽃피고 있었다.]
위 글에서 “옛 주인은 죽고, 혁명이 스쳐 가고, 집의 부(富)는 무너져 버리고, 부재와 망각이 겹치면서 양치류, 현삼, 독당근, 서양가새풀, 디기탈리스, 키 큰 잡초, 연녹색 옷감 같은 넓은 잎을 가진 키 큰 식물과 도마뱀, 풍뎅이, 겁 많고 재빠른 곤충들이 있는 대로 다 모여들어 그 거리는 점점 더 기묘해졌다.”란 표현을 보자. 여기서 ‘부재와 망각’은 군더더기일까, 아니면 뛰어난 이음 과정일까? 한 번 빼보자.
“옛 주인은 죽고, 혁명이 스쳐 가고, 집의 부(富)는 무너져 버리고, 양치류, 현삼, 독당근, 서양가새풀, 디기탈리스, 키 큰 잡초, 연녹색 옷감 같은 넓은 잎을 가진 키 큰 식물과 도마뱀, 풍뎅이, 겁 많고 재빠른 곤충들이 있는 대로 다 모여들어 그 거리는 점점 더 기묘해졌다.”
앞의 문장은 사람 세상과 자연 세상이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는데, 뒤의 문장은 둘이 따로 노는 것 같다. 좀 어렵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그대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대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대에게 감사드리기 위하여 온 것이오. 그리고 만약 언짢게 여기지 않는다면, 카말라여, 그대에게 나의 친구가, 나의 스승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바이오. 나는 그대가 도통한 그런 방면의 기술에는 아직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오.”
그러자 카말라가 큰 소리로 웃었다.]
만일 내가 “그대가 너무 아름다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겠지만, 성공 확률이 낮을 것이다.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나는 왜
나무는 누구인지
나무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나무는 왜 사는지
나무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나무는 어디로 가는지
나무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내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버린다고 하면서도 내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그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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