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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5대10국 오대십국 오대 五代 후한(後漢) 기원전 947년~950년 중원왕조 중국역사왕조
출처:바이두백과 소스:이페어케이
후한(後漢, 5대 시대 정권의 하나)
후한(947~950), 5대 10국 때 유지원이 세웠다왕조, 도성동경개봉부(지금의 허난성개봉시).
후당이 멸망하자 석경당(石敬瑭)이 세운 후진이 유지원을 하동절도사로 임명하였다.서기 947년 거란 멸망 이후 중원을 차지했으나 거란병이 중원에서 불태워 약탈하는 바람에 민심을 잃고 북상했다.유지원 기회를 잡아라 태원에서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자로 하고, 사를 후한이라 하며, 후공이 변주로 병합되었다.동한(東漢)을 후한(後漢)이라 하고, 서한(西漢)을 전한(前漢)이라 한다.
이듬해 유지원은 병사한 뒤 차남 유승우가 왕위를 계승한 후한은제(後漢恩帝)다.950년 이수정 등 번진에서 반란이 일어나 후한은제가 곽위에게 명하여 정벌에 나섰으나, 후한은제는 곽위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곽위는 부득이하게 반항하고 후한은제는 반란을 일으켰다.패잔병에게 죽임을 당하여 후한은 멸망하였다.
약설 그림 출처: 《중국고대사 지도집》 [1]
중국어명 한외문명 Later Han 별명 후한 시간범위 947~950년 국토면적 89만㎢(건우2년)의 도시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 현재 하남개봉부)) 주요 민족 한족, 사타족의 주요 도시 낙양, 업도, 송주, 태원 등의 어종 중국어 상품인 한원통보, 개원통보의 창시자 유지원
카테고리
1 역사
2 주요 강역
삼황제 가계
역사
후한창립자는 후진의 하동절도사 유지원[2]이다.유지원은 사타인으로 가문이 가난하고 성이 유씨인 척한다.일찍이 당(唐) 명종(明宗) 하부의 편장( 偏將)이었으며, 전쟁에서 석경당(石敬瑭)의 명을 구한 덕분에 석경당(石敬 。)의 측근이 되었다.
석경당(石敬瑭)이 하동절도사(河東節度道使)를 맡을 때 유지원은 절도압아(節度 押亞)였다.석경당밀모조반시유지원(劉知源)도 참여하였고, 석경당(石敬瑭)은 후진황제가 된 후 그를 시위친군도우후로 봉하고, 보의군 절도사(保義軍節度使)를 받다가, 후에 바로 시위친군으로 승격하였다.마보군은 모두 지휘사를 지휘하여 금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었다.천복6년(941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지내고 베이징(北京)을 지켰다.
유지원 화상
유지원 화상
석경당 사후, 유지원은 천하의 대란을 예감하고, 태원을 경영하였다.토곡혼의 수령 백승복(白承福)을 처단하고 자신의 실력을 강화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과 수천 마리의 양마를 빼앗았다.거란군이 남하하여 공격한 후 진군 임변량그때 유지원은 구원투수도, 거란에 대항하지도 않고 외면했다.거란이 변량(變 灭亡)을 치고 멸망하자 거란 주여율덕광( 耶德光)에게 표시를 하였고, 예율덕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목발을 하사하였는데, 중원 왕조가 중요 신하들에게 준 지팡이에 해당한다.여율덕광은 개봉에서 황제를 칭하고 정식 국호는 요나라이다.
진제 석중귀 일행이 요군에 의해 호송되어 북상했을 때, 그는 비분인 척하며, 친병들을 거느리고 말했다.석중고를 구하려다가 수양에서 태원으로 돌아왔다.그런 후, 그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중원의 공허한 틈을 타서 황하를 건너 낙양으로 들어가 요나라가 키운 괴괴함을 죽였다뢰이종익모자.이어 도성을 변량(變梁)에 배치했다. [3]
유지원이 황제로 칭한 후, 그의 옛 일료좌는 모두 조정의 중신이 되어, 각지의 큰 요점을 차지하였다.부문은 양빈곽위임정부추밀사, 소봉길소우임재상, 왕장임삼사사, 사홍조시위친군마보군도 지휘사 겸 평장사이다.이들 중 궈웨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횡포하고 잔인한 자들이다.재상 소봉길과 같이 일찍이 하동에서 모료가 되었을 때, 유지원은 복을 빌기 위해 정옥을 명했지만, 실제로는 죄수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는데, 그는 죄수 전원을 모두 처형하여 '정옥'이라고 하였다.재상이 된 후에도 옛 관습을 고치지 않고, 도적이 된 본가와 이웃·보인 전족을 처단하도록 초조하였다."도자족수를 위해 죽이는 것은 이미 왕법에 맞지 않는데 이웃 보증이야, 너무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한다.다행히 '전족(全族)'은 겨우 빠졌다.
사홍조 또한 포악하기 그지없어, 금군 병권을 장악하고, 도읍을 경호하며,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조금이라도 법기를 어기고 죄의 경중을 묻지 않으면 극형에 처한다.심지어 낮에는 낮에 별이 뜨니 쳐다보는 사람이 있어 허리를 베이는 형벌이 되었다.술에 취해 성이 백 명 있다일군의 군사도 충돌이 발생하였으나, 요사스러운 말로 대중을 미혹하여 참수하였다.혀가 잘려나가고, 입이 터져라, 쥐가 나거나, 발을 부러뜨리는 등의 고문은 거의 매일 반복된다.
왕장임삼사사가 재테크를 맡아보았는데, 가렴주구였으므로 백성들이 이 때문에 파산한 자가 비할 수밖에 없었다.비두지. 구제. 두 개의 세금과 곡물을 징발할 때 곡마다 2리터씩 더 거두어 "쥐새쥐새쥐"라고 불렀는데, 왕장은 두 말을 더 거두어 이전의 10배와 맞먹도록 명령했다.관고 출납은 한 줄에 800문, 백성은 80문씩 내는 것을 '짧은 길목의 돈'이라 한다.후한은 또 소금, 알루미나, 누룩을 밀매한 자는 수에 관계없이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였다.
중앙대원이 이러하니 지방관료들의 발걸음이 더욱 흉포해진다.청주의 절도사 유수집법이 잔혹하여, 형벌을 할 때, 쌍장을 나란히 하는 것을 "합환장"이라 하며, 범인의 나이에 따라 장수를 결정하고 죄의 경중을 묻지 않는 것을 "수"라 한다.연장. 위주 자사 엽인루는 도적떼처럼 행패를 부려 도적떼를 죽이거나 다리줄을 끊어 골짜기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죽는다.서경유수왕수은이 돈을 모으기 위해 함부로 세금을 거두어 세목이 많아 화장실에 가고 거리에 구걸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두 세금을 내야 하고, 죽은 사람의 영구까지 돈을 내지 않으면 성을 나가 매장할 수 없었다.부하들을 놓아두고 남의 돈을 강탈하거나 훔치기도 한다.이 때문에 후한의 통치는 5대 10국 중 가장 잔악하고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해 팔리기도 힘들었다.
유지원은 황제로 1년밖에 살지도 못하고 병들어 죽었는데, 그 아들 유승우가 즉위하여, 사명은 후한이라 칭하였다.은제.
은제는 어려서, 정정은 훈구 대신인 양빈, 사홍조, 왕장, 곽위에 의해 지켜졌다.문신을 천대하는 무부의 집권을 놓고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이들 무장은 저마다 전횡을 부리며, 국정을 논할 때,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며, 큰 소리로 소리지르며, 근본을 논한다.황제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 은제를 참기 어렵다.이 사람들은 칼싸움은 할 줄만 알 뿐 나라를 안정시키는 도리를 전혀 모르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칼을 뽑아 들고 칼을 휘두르기도 하며, 거의 인명을 얻기도 한다.
각종 발호행위로 한은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측근과 상의하여 복병을 하였다.전문은 양빈(楊弘)사홍조(史弘朝)왕장(王章) 등 세 사람이 조정에 들어갈 때를 틈타 그들을 일거에 죽이고 그 종족을 멸망시켰다.또 사람을 보내 업도의 곽위를 지키게 하였는데, 곽위가 소식을 듣고 말았다.거병하여 대군을 이끌고 변량(變 梁)으로 달려가 후한금군을 격파하였다.한은제는 황무지를 버리고 도망하다가 도중에 살해되었다.곽위는 변주에 들어와 태후임조칭제(太後임조칭제)를 요청하고, 유지원의 조카 무령(武寧)을 맞아 유윤을 황제로 삼기로 했다.유윤이 변량(變梁)으로 떠날 때, 곽위지(郭威之)는 사람을 꾀어 계단(啓丹)에 침입하게 하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상경하여 적을 맞이하다가, 중도에 이르러 병사들이 분변하여, 황포를 곽에 걸쳤다.그 위풍은 곽위를 황제로 옹립한 뒤 변량(變 。)으로 돌아갔다.
유윤행이 송주에 도착했을 때 곽위는 이미 한발 앞서 변량(變梁)으로 들어가 태후를 핍박하여 봉직하였다.이미 '감국'이라 하여, 조정의 대권을 총람하였고, 태후의 이름으로 유빈을 폐위하고, 유윤을 개부의동삼사로 강봉하여 검교태사 상주국상음공으로 하였다.또 곽숭위를 송주로 보내 유윤을 감금했다.서기 951년, 궈웨이는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연호는 광순, 국호는 주, 사칭 후주였다.
후한은 건립에서 멸망하기까지 겨우 3년, 역이제는 5대 십국 중에서 가장 단명한 정치였다.권리.
명나라 왕부의 평론에서는 "나라를 얻어서 속사하였는데, 사타 유씨처럼 되지 못한 자는 오히려 반역한다.군사가 함께 피를 흘리지 않으면 패망하고, 군중이 곧 죽으면 나라가 망하고, 취고가 쉬워도 사타 유씨처럼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4].
주요 강역
후한성시 강역은 현재 산둥성허난성양성, 산시성산시의 대부분과 강이다.북, 후베이, 안후이, 장쑤의 일부.요멸 후진의 시기에, 원래 후진의 계단·성·진·봉 4주는 후촉에 빼앗겼으나, 후한이 건국된 후 다시 따랐다.요수에서 승주를 차지하다. [5]
황제 가계
皇帝世系编辑
庙号 | 谥号 | 姓名 | 在位时间 | 年号及使用时间 | 陵寝 | |
文祖 | 明元皇帝 | 刘湍 | - | - | - | |
德祖 | 恭僖皇帝 | 刘昂 | - | - | 沛陵 | |
翼祖 | 昭宪皇帝 | 刘僎 | - | - | 威陵 | |
显祖 | 章圣皇帝 | 刘琠 | - | - | 肃陵 | |
高祖 | 睿文圣武昭肃孝皇帝 | 刘暠 | 947——948 | 乾佑 | 948——950 | 睿陵 |
- | 隐帝 | 刘承佑 | 948——950 | 颍陵 |
注:后汉初期沿用后晋的天福年号,948年建年号乾佑。 [6]
后汉 (五代时期政权之一)
后汉(947年~950年),五代十国时期由刘知远建立的王朝,都城东京开封府(今河南省开封市)。
后唐覆灭后,石敬瑭建立后晋,任命刘知远为河东节度使。公元947年,契丹灭后晋后占据中原,但因契丹兵在中原烧杀抢掠,大失民心,只好北撤。刘知远抓住时机,在太原称帝,国号汉,史称后汉,后攻克并定都于汴州。亦有称东汉为后汉者,称西汉为前汉。
第二年刘知远病死,刘知远的次子刘承佑嗣位,即后汉隐帝。950年李守贞等藩镇发生叛乱,后汉隐帝命郭威征讨,但后汉隐帝猜忌郭威,欲杀之,郭威不得已反叛,后汉隐帝为溃军所杀,后汉就此灭亡。
概述图片来源:《中国古代史地图集》 [1]
中文名汉 外文名Later Han 别 名后汉 时间范围947年 至 950年 国土面积89万平方公里(乾佑二年) 都 城东京开封府(今河南开封) 主要民族汉族、沙陀族 主要城市洛阳、邺都、宋州、太原等 语 种汉语 货 币汉元通宝、开元通宝 开创者刘知远
目录
1 历史
2 主要疆域
3 皇帝世系
历史
后汉创建者是后晋的河东节度使刘知远 [2] 。刘知远是沙陀人,家世贫寒,冒姓刘氏。早年是唐明宗部下的偏将,因为在战争中救过石敬瑭的命,遂成为石敬瑭的亲信。
石敬瑭任河东节度使时,刘知远是节度押衙。石敬瑭密谋造反时,刘知远也参与了,石敬瑭当上后晋皇帝后封他为侍卫亲军都虞候,领保义军节度使,后来又很快升任为侍卫亲军马步军都指挥使,成为禁军的最高统帅。天福六年(941年),任河东节度使、北京留守。
刘知远画像
刘知远画像
石敬瑭死后,刘知远预感到天下将要大乱,所以着力经营太原。为加强自己的实力,他处死了吐谷浑首领白承福,夺取了大量的财富及数千匹良马。契丹军南下攻打后晋兵临汴梁时,刘知远既不出兵救援,也不抗击契丹,而是冷眼旁观、静观其变。等到契丹攻下汴梁,灭亡后晋后,他派人奉表于契丹主耶律德光,耶律德光呼其为儿,并赐与木拐,相当于中原王朝赐给重要大臣的几杖。耶律德光在开封称帝,正式立国号为辽。
当晋帝石重贵一行被辽兵押解北上时,他假装悲愤,率亲兵说要营救石重贵,实际走到寿阳便又转回太原。然后他亲率大军乘中原空虚之际渡过黄河,进入洛阳,杀死辽扶植的傀儡李从益母子,以绝人望。随后将都城设在汴梁。 [3]
刘知远称帝后,他的旧日僚佐均成为朝廷重臣,占据各大要害部门。杨邠、郭威任正副枢密使,苏逢吉、苏禹任宰相,王章任三司使,史弘肇任侍卫亲军马步军都指挥使兼平章事。这些人中除郭威外其馀均为蛮横无知、贪暴残酷之徒。如宰相苏逢吉,早在河东为慕僚时,刘知远命其静狱以祈福,实际上是要他释放囚犯,而他却把全部囚徒统统处死,号曰“净狱”。当了宰相以后,仍不改旧习,曾草诏要将为盗者的本家和四邻、保人全族处斩,有人驳斥说:“为盗者族诛,已不合王法,何况邻保,这样做不是太过分了吗?”苏逢吉不得已,才勉强删去“全族”二字。
至于史弘肇更是残暴绝伦,他掌握禁军兵权,警卫都邑,只要稍有违犯法纪,不问罪之轻重,便处以极刑。甚至太白星白昼出现,因为有人仰观,就被处以腰斩。有一百姓因酒醉与一军士发生冲突,也被诬以妖言惑众而斩首。至于断舌、决口、抽筋、折足等酷刑,几乎每日不断。
王章任三司使负责理财,惟知暴敛,致使百姓因此而破产者比比皆是。旧制,两税征粮时,每一斛加收二升,称之为“鼠雀耗”,而王章命令加收二斗,相当于以往的十倍;旧制,官库出纳钱物,每贯只给八百文,百姓交税也是如此,每百文只交八十文,称之为“短陌钱”,而王章规定官库给钱每百文只给七十七文,但百姓交税每百文仍交八十文。后汉还规定私贩盐、矾、酒曲者,不论数量多少,统统处以死罪。
中央大员如此,上行下效,地方官员更加残暴。青州节度使刘铢执法残酷,行刑时,双杖齐下,谓之“合欢杖”;他还根据犯人年龄的大小决定杖数,而不问罪之轻重,谓之“随年杖”。卫州刺史叶仁鲁捕盗时,往往将普通平民当成盗贼杀戮,或挑断脚筋,抛弃山谷,致使这些人“宛转号呼,累日而死”。西京留守王守恩为了聚敛钱财,胡乱收税,税目之多,包括上厕所,上街行乞,都要交税,甚至连死人的灵柩,如不交钱,也不准出城埋葬。有时还放纵部下,强抢或偷盗人家钱财。因此后汉的统治是五代十国中最残暴的,百姓极度困苦,以致卖儿贴妇都不能度日。
刘知远只当了一年皇帝就病死了,其子刘承祐继位,史称后汉隐帝。
隐帝年幼,朝政被勋旧大臣杨邠、史弘肇、王章、郭威所把持,武夫掌权歧视文臣,遭致内部矛盾不断。这些武夫悍将,个个专横跋扈,议论朝政时,吵吵嚷嚷,大呼小叫,根本不把皇帝放在眼里,使隐帝难于忍受。这些人只知舞枪弄刀,却根本不懂安邦定国的道理,有时争吵起来,甚至拔刀动剑,几乎闹出人命。
各种跋扈行为使汉隐帝实在忍无可忍,于是和亲信商议,伏兵殿门,趁杨邠、史弘肇、王章三人上朝之时,一举将他们杀死,尽灭其族。又派人刺杀镇守邺都的郭威,郭威闻讯遂举兵反抗,率领大军杀奔汴梁,击败了后汉禁军。汉隐帝落荒而逃,途中被杀。郭威进入汴州后请太后临朝称制,并决定迎立刘知远之侄武宁节度使刘赟为帝。就在刘赟动身前往汴梁时郭威指使人假报契丹入寇,自己率大军出京迎敌,行至中途,兵士哗变,将黄袍披在郭威身上,拥立郭威为帝,然后转回汴梁。
刘赟行至宋州时郭威已抢先一步进入汴梁,逼迫太后下诏封自己为“监国”,总揽朝政大权,并以太后名义下诏废黜了刘赟,降封刘赟为开府议同三司、检校太师上柱国、湘阴公,又遣部将郭崇威到宋州将刘赟囚禁在当地。公元951年,郭威正式登上皇帝宝座,年号广顺,国号周,史称后周。
后汉从建立到灭亡仅三年,历二帝,是五代十国里最短命的政权。
明代王夫之评价曰:“得国而速亡,未有如沙陀刘氏者也;反者一起,兵未血刃,众即溃,君即死,国即亡,易如吹稿,亦未有如沙陀刘氏者也” [4] 。
主要疆域
后汉盛时疆域约为今山东、河南两省,山西、陕西的大部,河北、湖北、安徽、江苏的一部分。在辽灭后晋之际,原属后晋的阶、成、秦、凤四州被后蜀夺取,但后汉建立后又从辽手中夺得胜州。 [5]
皇帝世系
皇帝世系编辑
庙号 | 谥号 | 姓名 | 在位时间 | 年号及使用时间 | 陵寝 | |
文祖 | 明元皇帝 | 刘湍 | - | - | - | |
德祖 | 恭僖皇帝 | 刘昂 | - | - | 沛陵 | |
翼祖 | 昭宪皇帝 | 刘僎 | - | - | 威陵 | |
显祖 | 章圣皇帝 | 刘琠 | - | - | 肃陵 | |
高祖 | 睿文圣武昭肃孝皇帝 | 刘暠 | 947——948 | 乾佑 | 948——950 | 睿陵 |
- | 隐帝 | 刘承佑 | 948——950 | 颍陵 |
注:后汉初期沿用后晋的天福年号,948年建年号乾佑。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