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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116 등운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의성 구계에서 고운사길로 접어들어 고운사를 1.4km정도 남겨놓은 지점에 비로자나불이 세워져 있고. 의성군에서 역사관 위치. 수목해인도 설치.
해동 화엄종의 시조 신라의 의상대사가 신문왕 원년(681년)에 고운사(高雲寺)로 창건하였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신라말 불교와 유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如智), 여사(如事)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등운산(騰雲山, 해발 524m)은 구름(구름)을 타고[騰] 오르는 산(山)이라는 뜻이다. 지상에서 아주 높이 뜬 구름일수록 인간세상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높이 두둥실 떠 있는 구름은 수미산을 넘어선 곳에 있는 하늘나라인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즉 등운산(騰雲山) 고운사(孤雲寺)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사찰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려 정종 3년 운주가 현종 9년 천우가 대웅전·약사전·극락전·적묵당·설선당 등 중창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의 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 헌종 원년에 소실되어 만송, 호암 수월선사 등이 중창하였다.
가운루는 계곡 바닥 가장 낮은 암반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 기둥을 올린다음 마루를 놓아 하층을 만들고 상층은 기둥위에 공포를 두고 지붕을 올렸다. 계곡을 가로지르게 건축한 것으로 봐서 계곡을 건너는 다리 역할을 한 것 같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관음전·명부전·금강문·가운루·적묵당·우화루·동별실·서별실·금당·회운당·고운대암·고금당 등 25개가 있다. 가운루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석불좌상(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246호로, 3층석탑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현존하는 고운사 석조 여래좌상(보물 제246호)은 9세기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으므로 시대적으로 최치원과의 상관성도 매우 높아 보인다. 아울러 의상대사의 화엄사상을 높이 평가했던 최치원의 태도로 보아 의상스님에서 최치원으로 이어지는 고운사의 역사는 신라 화엄사상사 전체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 당한 승병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석학(碩學)으로 이름난 함홍선사(涵弘禪師)가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할 때는 무려 500여명의 대중스님이 수행한 도량(道場)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여러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쳐오다 1695년에 대규모 중창 불사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는데, 17세기 조선시대의 극렬한 불교 탄압에도 진행된 고운사의 중창 노력은 불교사적으로 매우 의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영조 20년(1744년) 어첩(御帖) 봉안각을 설치하고 이를 관리할 판사(判事)를 두었다는 내용은 이 시기 고운사의 사세를 유지해 가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1884년(고종21)에 건립한 연수전(延壽殿)이란 건물은 조선 영조가 내린 어첩(御帖)을 봉안하던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39년(1902년)에 새로이 지은 건물이고,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였던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건축형태로 독특하며, 외벽에는 여러 벽화들이 그려져 있으나 이젠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다.
최근에 세운 산문 "등운산 고운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존의 일주문은 아니고 대체로 일주문 앞쪽에 세워지는 "산문"으로 새롭게 만든것으로 규묘가 엄청나다. 일주문은 사찰의 입구이며 산문은 사찰이 속한 산의 입구인 것이다. 이 산문 뒷쪽에는 "고운노인요양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등운교다리를 지나면 고운사의 영역이다.
일주문(조계문) 고운사 산문(山門)을 지나 조계문(일주문). 민흘림기둥 2개를 세워 팔작지붕을 올린 조계문(일주문)은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만법(萬法 :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사찰의 입구로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이루는 것으로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일부문을 꼽으라면 고운사의 일주문을 추천하는 이들이 많다.일주문은 완전히 가분수다. 자칫 윗쪽의 무게로 인하여 쓰러질듯 보인다. 그래서 이 일주문은 처마끝에 네 귀퉁이에 기둥이 세워져 있다. 흔들림을 적게하고 무게를 분산시키는 역활을 한다. 이 기둥을 "활주"라고 한다.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라고도 한다. 곳곳에 크고 작은 돌탑의 무리들이 있다.
천왕문 정면3칸에 맞배지붕의 건축양식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일주문 다음에 통과하는 문으로 동서남북을 관장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ㆍ증장천왕ㆍ광목천왕ㆍ다문천왕이 조성되어 있다.
고불전 오래된 석불을 봉안해놓은 아주 작은 전각으로 그 요철 모양의 구조가 특이하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T'자 건물로 홑처마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원래는 약사전이였으나, 현재는 고불전(古佛殿)으로 미완성된 석불(石佛)만을 모시고 있다. 광배(光背)를 갖춘 석불상으로 결가부좌에 선정인(禪定印)을 결하고 있는 듯 하다. 전체적으로 세부 조각을 하지 않고 형체만 조각되어 있는 이 불상은 미완성이지만 안정되어 보이는 석불상이다.
고운사 가운루(駕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최치원이 지었다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계곡위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기둥을 세워 건물을 지었다. 가운루는 남쪽은 나무로 된 벽과 창이 막고 있는 반면 북쪽은 기둥만 있고 오픈된형태의 건물로서 특이하다. 건물의 내부 "駕雲樓" 편액, 고려 공민왕의 어필이다. 공민왕은 두 번의 내란과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전국을 유람할 때 고운사를 찾은 이후 학자로 구름에 몸을 싣고 만사를 잊고 선인(仙人)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가운루 현판을 어필로 남겼다고 한다.
우화루에는 현판이 두 개 달려있었는데, 밖에는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인 우화루(羽化樓)라는 현판이, 누각 안에는 불교적 용어인 꽃비가 내린다는 뜻을 가진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으나 현재는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지금은 '孤雲寺(고운사)' 편액이 걸려 있다
정면에 '고운사(孤雲寺)'라는 사액(寺額:사찰의 이름)이 걸려 있다. 우화루 가운루와 마찬가지로 최치원이 세운 누각이다. 극락전 아래에서 법당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
극락전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을 봉안하였다. 현재의 대웅보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큰법당 역할을 하던 유서깊은 건물로 소박. 절제, 엄중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좌협시 관세음보살은 천해(天海)스님이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불상을 송도 대흥산에서 찾아내어 고운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쪽의 좌우협시는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이고 뒤쪽의 안으로는 문수와 보현보살이며, 바깥으로는 금강장과 제장애보살이다. 후불탱은 적색과 녹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화기(畵記)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고풍스럽고 솜씨도 뛰어난 편이다.
종각(鐘閣)은 정면3칸, 측면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불전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이 있다.
1992년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은 50평 규모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조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수미단을 길게 조성하여 우견편단의 가사를 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조석예불과 사시불공 등 모든 의식과 법화가 이루어지는 고운사 신앙의 중심지이다.
법당안에는 신중단과 조사진영을 모신 조사단, 선망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영단이 있다. 앞면의 중앙 양쪽 주두(柱頭)와 지붕 용마루 끝에 용머리(龍頭)가 조각되어 대웅보전의 웅장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창호는 빗살창 문살로 짜여져 있다.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주불로 모신다.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석불(보물 제246호)은 균형잡힌 몸매와 인자한 상호, 비교적 완벽한 보존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운사의 모든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
연수전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으로 이뤄진 연수전(延壽殿)의 출입문. 문의 윗 부분에는 빗살을 만들어 용문양을 그려 붙였는데, 수호의 뜻이 담겨져 있다. 나무로 만든 대문에는 태극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연수전의 출입문인 만세문(萬歲門)은 임금의 장수만세(長壽萬歲)를 기원하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연수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4호로 지정, 조선 영조 20년(1744년)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牒)을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1884년 극락전 등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39년(1902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며, 숭유억불시대에 사찰내에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 지어졌다는 점이 이채롭다. 연수전(延壽殿) 편액은 광무8년(고종 41년, 1904년)에 해사 김성근 글씨, 연수(延壽)란 수명을 늘려 장수(長壽)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봉안한 법당으로 지장전, 시왕전이라고 한다. 명부전은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 초에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원래는 대웅전이였으나, 새로 '대웅보전'을 건립 이전, 현재는 명부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후에 인간이 심판받는 장소를 형상화 한 곳으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대왕과 그 권속들이 조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약 300년 전 법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1출목(外一出目) 익공(翼工) 형식이며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막돌쌓기한 기단위에 자연석의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내부 천정(天井)은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가구수법이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 건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지옥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다 구제한 다음 부처님이 될 것을 서원한 지장보살로서 아주 큰 서원을 세웠다하여 대원본존이라고도 한다. 좌우협시로는 젊은 수도승의 모습인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문인의 모습인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열분의 시왕상이 있으며, 문 입구에는 금강역사가 좌우를 지키고 있다. 주존의 지장보살은 목조(木造)로 제작하였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상(十王像)은 소조(塑造)로 제작한 것이다. 후불탱(後佛幀)의 화기(畵記)에 의하면, 건륭 5년(1740)에 개금을 하였다고 한다.
지장보살 우협시 시왕, 오른쪽으로 부터 제2 초광대왕(화탕지옥), 제4 오관대왕(검수지옥), 제6 변성대왕(독사지옥), 제8 평등대왕(철상지옥)이 있다. 그리고 죽어서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 죽어서 저승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고운사 명부전 지장보살을 만나뵙고 왔느냐고 묻는다는 얘기가 전해올 정도로 지장신앙으로 유명한 도량이다.
삼성각 제물을 주는 '산신'과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그리고 복락을 선사하는 나반존자 '독성'을 함께 모신. 불교 고유의 신앙이라기 보다는 도교나 토속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경우이다.
적묵당(寂默堂) 고요하게 앉아 깊이 생각하고 말이 없다는 뜻
나한전은 응진전 또는 영산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석가모니불을 모셔 놓았다. 정면 3칸의 주심포(柱心包) 형식의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창호는 띠문살로 짜여져 있고, 중앙의 어간문은 3분합의 문이고 양쪽은 각 2분합의 문을 달았다. 이 건물은 원래 현 대웅보전 자리에 있던 대웅전으로 조선 중기에 세워졌다. 건물을 이전하면서 16나한을 모셨고 전각의 이름도 바뀌었다. 불상은 우리나라에 보기드문 지불(紙佛)로 매우 원만한 상호를 보여준다.부처님 제자중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란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보통 열여섯분의 나한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 하며, 오백분의 나한을 모신 곳을 '나한전'이라고 한다.
고운사 삼층석탑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8호) 높이는 3m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의 석탑으로 만들어졌으며, 기단부와 옥개석이 약간 훼손된 것이 보인다. 이중기단으로 상대석(上臺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조각되어 있다. 기단부 위에는 한장의 갑석(甲石)을 깔았다. 약간 둔중해 보이는 탑신부(塔身部)의 1층 옥개받침은 4단이고 2층과 3층 옥개받침은 3단으로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한 편이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고금당 선원은 서산, 사명, 전강 큰스님들이 거쳐간 활구 참선 도량이다. 특히 1980년 주지로 부임하신 현봉 근일 대종사께서 용맹 정진 도량을 만들어 대중을 지도하여 오셨다. 지금의 고금당 선원은 1990년 새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조실 스님의 지도 하에 면벽 참석 납자가 끊이질 않고 있다.
백련암 일주문 좌측에 현대식검물과 함께 2층으로 지어진 백련암.원래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던 장소였으나 지금은 수련회나 재가불자들의 선방으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옛날에는 백련암의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 새로 지은 건물의 크기는 대규모라고 할 수 있다. 측면 3칸 정면 7칸의 팔작지붕으로 2층의 구조로 되어 있다.
용왕각은 백련암보다 10여미터 높은곳에 있는 암자로 각면 1칸의 맛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대향각 백련암 바로 옆에 있는 대향각은 원래 연수전 옆에 있던 건물로 1999년도에 현 위치로 이전하여 해체복원했다. 현재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대향각의 아래층이 "해우소"다
열반당 옛날 스님들이 노령으로 거동이 힘들어지면 이 건물에 기거하다가 운명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무설전 큰 방 한 개로 이루어진 건물로 수련대회나 기도시 방문객들의 숙소로 사용된다.
만덕당 스님들의 공양장소이며 간혹 회의장소로도 쓰인다. 공양을 짓는 식당과 연결되어 있다.
서쪽벽면에는 유명한 호랑이 벽화가 있는데, 사방에서 호랑이 눈빛에서 벗어나고자 자리를 옮겨봐도 호랑이의 매서운 눈길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병인년 호랑이띠인 올해는 연초부터 수많은 관광객이 이 호랑이를 보기위해 몰려들고 있다. 위 그림은 모사본이다. 우화루 벽면에 원래 있었던 호랑이 벽화의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벽면을 떼어내어 후원 공양간 입구에 유리로 덮은 상태로 전시되고 있다. 누가 언제 그렸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말기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운대암 역대 고운사의 가장 큰스님이 주석하는 건물이다. 현재 주지스님의 처소이며 1999년도에 중수하였다.
아거각 원래 서산대사의 진영을 모시던 영각이었으나 현재는 스님의 숙소로 쓰인다.
극락교 만덕당쪽에서 가운루로 나오는 계곡위의 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