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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영조(英祖) 17년(1741) / 4월 초8일
조정에 품의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원(祠院)을 설립하였거나 사적으로 추후하여 배향하였을 경우에는 감사는 파직하고 수령은 잡아다 치죄하고 유생은 5년간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자격을 정지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사를 잡아다 치죄하고, 수령은 고신(告身)을 빼앗고, 유생은 먼 곳으로 유배하는 건
1. 이번 4월 초8일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전교(傳敎)하기를, “일반적으로 법령(法令)이 해이해지는 원인은 오로지 어지럽게 변경하는 데에 있으니, 일체로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갑오년(甲午年, 1714, 숙종40)에 규정을 정한 뒤로 조정에 품의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우와 서원을 설립하였거나 사적으로 추후하여 배향하였을 경우에는 유현(儒賢)이나 대신(大臣)을 막론하고 모두 철거해야 할 것이다. 이전에는 이미 죽은 사람은 제외하고 그 사실에 대하여 듣고서 안 도신(道臣)은 모두 파직(罷職)하고, 수령(守令)은 잡아다 치죄(治罪)하며,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儒生)은 5년간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자격을 정지하였다. 차후로는 조정에 품의하지 않고 사원을 건립하였거나 추후하여 배향하였을 경우에 그 사실에 대하여 듣고서 안 도신은 잡아다 치죄하고, 수령은 고신 삼등(告身三等)의 율(律)을 시행하여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먼 곳으로 유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기고 아뢰지 않았을 경우에는 마땅히 어사(御史)로 하여금 사찰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금부(義禁府)ㆍ이조(吏曹)ㆍ예조(禮曹)ㆍ성균관(成均館)에 공문을 보냈다.
1. 예조(禮曹)에서 상고(相考)한 일에 관하여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통지하기를, “이번 4월 초8일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전교(傳敎)하기를,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이상의 전교 내용을 잘 살펴서 속히 도내(道內)의 각 고을에 엄격하고도 명백하게 통지해야 할 것입니다.
갑오년(甲午年) 이후로 조정에 품의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원을 설립하였거나 사적으로 추후하여 배향한 곳에 대해서 각별히 자세하게 조사하여, 마음대로 사원을 설립하였을 경우에는 곧바로 철거하고 사사로이 추후하여 배향한 위판(位版)도 즉시 철거하되, 어느 해 어느 달에 건립하고 어느 해 어느 달에 추후하여 배향하였는지에 대하여 일일이 열거하여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원을 설립하였을 때와 추후하여 배향하였을 때 재임하였던 감사와 수령 및 앞장서서 주도하였던 유생 등을 모두 분명하게 조사한 다음 지명하여 고발하되, 속히 위에 아룀으로써 이를 근거로 삼아 처리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상고하여 시행하되, 관문(關文)이 도착하는 즉시 회답하는 공문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D001] 고신 삼등(告身三等) : 탈고신 삼등(奪告身三等)의 준말로 관원이 죄과를 범한 경우 그 직급에서 3등을 강등시키는 일. 고신은 직첩(職牒) 곧 사령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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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영조(英祖) 17년(1741) / 8월 15일
경상도(慶尙道)에서 갑오년(甲午年) 이후에 창건한 서원을 조사하여 장계를 올리는 건
1. 경상 감사(慶尙監司) 심성희(沈聖希)가 올린 계본(啓本)에,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신이 감영(監營)에 도착한 초기에 각 고을의 문보(文報)를 취합하여 작성한 책자를 직접 열람하여 본 결과 편액의 하사 여부, 건립한 연도 및 배향한 인원의 관직과 성명을 대부분 써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은 정사(精舍)나 이사(里社)나 효사(孝社)로 일컫는 등 그 칭호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재삼 관문(關文)을 발송하여 엄하게 조사하고 탐문해본 결과 이른바 정사 등의 칭호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에 유생들이 학업을 익히는 장소로 삼았다가 그곳에 위패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옛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주자(朱子)의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의의를 모방하여 호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명칭이 달라서 일의 대체가 조금 가볍기는 하지만, 금령을 무시한 채 사사로이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에 있어서는 여타의 서원과 그리 심하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조정의 명령과는 관계없지만 한결같이 각 고을에서 작성한 책자에 따라 모두 정리해 아뢰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소급하여 배향한 일에 대해서는 갑오년(甲午年) 이전에 사사로이 건립하고 편액이 하사되지 않은 서원에는 소급하여 배향한 사람이 많았으나 편액이 하사된 서원은 일의 대체가 달라서 조정에 품의하지 않은 채 감히 소급하여 배향하지 않았으므로 금령이 반포된 전후를 막론하고 소급하여 배향한 자가 없었습니다. 이 또한 각 고을에서 보고한 바에 따라 사실대로 장계를 올려 아룁니다. 갑오년 이후에 창건한 서원 가운데 조정에서 특별히 은전(恩典)의 편액을 하사한 서원이나 예조(禮曹)에서 복계(覆啓)하여 윤허를 받은 서원은 거론하지 않고, 다만 금령을 어기고 사사로이 건립한 서원만 마땅히 철거의 대상으로 삼아 다음에 열거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 당시 재임한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고발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감사는 재임한 연월(年月)에 대하여 각 고을에서 책자로 작성하여 기록한 바를 본영(本營)의 선생안(先生案)에 기록된 바와 대조하였으며, 수령은 한결같이 본 고을에서 보고한 바에 따랐으나 간간이 감영에 비치된 수령 교체의 기록을 대조하여 누차 수정하여 모두 고발하였습니다.
대구부(大丘府):민충사(愍忠祠)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황선(黃璿)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기미년(己未年) 10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監司)는 조명겸(趙明謙)이고 판관(判官)은 이권중(李權中)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儒生)은 김창윤(金昌胤)입니다. 유애사(遺愛祠)는 고(故) 판관 유명악(兪命岳)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기미년 4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 고을 백성이 옛날 판관이 죽은 것을 슬퍼한 나머지 그가 남긴 사랑을 기리기 위해 한 칸의 사당을 읍내(邑內) 다른 생사당(生祠堂) 옆에 건립한 것인데, 나무 신주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서원이 아니고 향현사(鄕賢祠)도 아니며, 생사당과 마찬가지이므로 고발에 있어서는 생사당의 예에 따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전 감사 유척기(兪拓基)의 생사당은 기미년 6월에 창건하였고, 전 판관 이협(李埉)의 생사당은 경신년(庚申年)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안동부(安東府):낙빈서원(洛濱書院)은 익찬(翊贊) 이유장(李惟樟)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임인년(壬寅年) 7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유명응(兪命凝)이고 부사는 이인복(李仁復)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성전(李成全)입니다. 옥계서원(玉溪書院)은 고려조 도관찰사(都觀察使) 김자수(金自粹), 진사(進士) 김언기(金彦璣), 좌랑(佐郞) 김팔원(金八元), 현감(縣監) 정사성(鄭士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순치(順治 청(淸)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644~1661) 무술년(戊戌年)에 강당(講堂)과 고사(庫舍)를 건립하였다고 하며, 사당은 신해년(辛亥年) 8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조현명(趙顯命)이고 부사는 이덕부(李德孚)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김성월(金聖鉞)입니다.
상주목(尙州牧):죽림향현사(竹林鄕賢祠)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성람(成灠), 증 지평(贈持平) 성헌징(成獻徵), 왕자사(王子師) 성만징(成晩徵)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정사년(丁巳年) 11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유척기이고 목사는 이수보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채명필(蔡命弼)입니다. 이계효사(伊溪孝社)는 증 형조 좌랑(贈刑曹佐郞) 염행검(廉行儉)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정사년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민응수(閔應洙)이고 목사는 이수보(李秀輔)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김창흠(金昌欽)입니다. 증연충렬사(甑淵忠烈祠)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증 영의정(贈領議政) 윤섬(尹暹), 홍문관 교리 증 직제학(贈直提學) 박호(朴箎), 병조 좌랑(兵曹佐郞) 증 도승지(贈都承旨) 이경류(李慶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오년(戊午年) 정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유척기이고 목사는 이수보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송치호(宋治皥)입니다.
경주부(慶州府):운천향현사(雲泉鄕賢祠)는 찰방(察訪) 이언괄(李彦适), 군수(郡守) 권덕린(權德麟)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임자년(壬子年) 5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조현명(趙顯命)이고 부윤(府尹)은 김시형(金始炯)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신중(李愼中)입니다. 단구사사(丹丘社祠)는 증 참의(贈參議) 이희룡(李希龍), 학생(學生) 권부흥(權復興), 도사(都事) 이문진(李文軫)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경술년(庚戌年) 2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박문수(朴文秀)이고 부윤(府尹)은 이중관(李重觀)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석표(李碩標)입니다. 생사당은 전 부윤 조명겸(趙明謙)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경신년(庚申年) 2월에 창건하였습니다.
성산현(星山縣):도천서원(道川書院)은 선교랑(宣敎郞) 배상룡(裵尙龍)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기유년(己酉年) 2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박문수이고 목사는 이보혁(李普赫)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정익흠(鄭益欽)입니다. 세덕사(世德祠)는 농서공(隴西公) 이장경(李長庚),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 문민공(文愍公) 이숭인(李崇仁), 문경공(文景公) 이직(李稷)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신해년 정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조현명이고 목사는 윤세겸(尹世謙)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태희(李泰熙)입니다. 운암향현사(雲岩鄕賢祠)는 증 제용정(贈濟用正) 최항경(崔恒慶)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갑인년(甲寅年) 정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김시형이고 목사는 윤용(尹容)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김태현(金台鉉)입니다. 죽계영당(竹溪影堂)은 영의정(領議政) 민진원(閔鎭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기미년 11월에 창건하여 아직 위패를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조명겸이고 현감은 조진희(趙鎭禧)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윤화언(尹和彦)입니다.
영해부(寧海府):인산서원(仁山書院)은 참봉(參奉) 이휘일(李徽逸)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강희(康熙) 정묘년(丁卯年)에 창건하였습니다. 건륭(乾隆) 정사년(丁巳年)에 그의 아우 이현일(李玄逸)의 사건으로 인해 서원을 철거한 뒤 같은 해 8월에 경내의 다른 곳으로 옮겨 건립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유척기이고 부사는 이세진(李世璡)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박용상(朴龍尙)입니다.
순흥부(順興府):구봉정사(九峯精舍)는 좌랑(佐郞) 홍우정(洪宇定)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을묘년(乙卯年) 2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김재로(金在魯)이고 부사는 송상유(宋相維)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조식(趙栻)입니다. 숭보사(崇報祠)는 증 참판(贈參判) 황전(黃躔)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을묘년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민응수(閔應洙)이고 부사는 송상유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황덕규(黃德圭)입니다.
선산부(善山府):충렬사(忠烈祠)는 현감(縣監) 허응상(許應祥)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을묘년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민응수이고 부사는 조두수(趙斗壽)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박해령(朴海齡)입니다.
진주목(晉州牧):생사당은 고 목사(牧使) 윤기경(尹基慶)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기미년 7월에 창건하였습니다.
울산부(蔚山府):생사당은 고 병사(兵使) 최진한(崔鎭漢)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정미년(丁未年) 7월에 창건하였습니다.
합천군(陜川郡):용천서원(龍川書院)은 부솔(副率) 문동도(文東道)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갑오년(甲午年) 11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홍우녕(洪禹寧)이고 군수는 이정석(李挺晳)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김각(金珏)입니다. 생사당은 고 군수 이병태(李秉泰)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갑인년(甲寅年) 2월에 창건하였습니다. 운계사우(雲溪祠宇)는 서산 부원군(瑞山府院君) 정인경(鄭仁卿), 증 참판 정인함(鄭仁涵)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오년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유척기이고 군수는 구정훈(具鼎勳)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정천우(鄭天佑)입니다.
영덕현(盈德縣):신안영당(新安影堂)은 회암(晦菴) 주문공(朱文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을묘년 4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민응수이고 현감은 홍우집(洪禹集)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유중휘(柳重輝)입니다.
김해부(金海府):충렬사(忠烈祠)는 증 참의(贈參議) 송빈(宋賓)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오년 12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이집(李㙫)이고 부사는 김중구(金重九)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조구령(曺九齡)입니다.
함안군(咸安郡):도림서원(道林書院)은 담장 안에 별묘(別廟)가 있고 본 서원은 바로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서원인데, 정축년(丁丑年)에 창건하였습니다. 별묘는 현감(縣監) 이칭(李偁), 목사 이정(李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임인년(壬寅年)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홍우전(洪禹傳)이고 군수는 조호신(趙虎臣)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조경식(趙景栻)입니다. 안도이사(安道里社)는 증 호조 좌랑(贈戶曹佐郞) 배여경(裵汝慶)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병진년(丙辰年) 10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민응수이고 군수는 김성후(金聖垕)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억(李檍)입니다. 산족영당(山足影堂)은 참판(參判) 조영복(趙榮福)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을묘년 7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민응수이고 군수는 본군(本郡)을 겸임한 진안 현감(鎭安縣監) 고처량(高處亮)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조영휘(趙榮徽)입니다.
예안현(禮安縣):오산정사(烏山精舍)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김령(金坽)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을묘년 5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민응수이고 현감은 송요보(宋堯輔)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김시섭(金時燮)입니다.
예천군(醴泉郡):광천정사(廣川精舍)는 효자(孝子) 반유(潘濡), 집의(執義) 태두남(太斗南), 찰방(察訪) 송복기(宋福基)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병오년(丙午年)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조영복(趙榮福)이고 군수는 이사일(李思一)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태응성(太應星)입니다.
하양현(河陽縣):생사당은 고 현감 이경신(李敬臣)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경술년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고성현(固城縣):곤의서원(崑義書院)은 증 병조 판서(贈兵曹判書) 어연(魚淵), 증 좌찬성(贈左贊成) 어변갑(魚變甲),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어효첨(魚孝瞻), 장령(掌令) 이의향(李義享)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이전에 창건하였다가 병화(兵火)로 인해 불타버렸고, 건륭(乾隆) 기미년 3월에 옛터에다 중건(重建)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이기진(李箕鎭)이고 현감은 이석좌(李錫佐)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현(李現)입니다.
양산군(梁山郡):생사당은 고 군수 이흡(李潝)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계축년 11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군위현(軍威縣):생사당은 고 현감 민진강(閔鎭綱)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정사년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밀양부(密陽府):생사당은 고 부사 조언신(趙彦臣)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정미년 9월에 창건하였습니다.
봉화현(奉化縣):향현사는 고려(高麗)의 학사(學士) 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 밀직제학(密直提學) 정운경(鄭云敬)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정미년 9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황선(黃璿)이고 현감은 이귀령(李龜齡)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금명현(琴命絃)입니다. 조계정사(藻溪精舍)는 생원(生員) 금오(琴梧), 생원 임확(任碻)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정미년 10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황선이고 현감은 이귀령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금성(琴)입니다.
의성현(義城縣):옥천정사(玉川精舍)는 진사(進士) 박장춘(朴長春), 증 승지(贈承旨) 이세헌(李世憲)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계묘년(癸卯年)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이정제(李廷濟)이고 현감은 심위(沈瑋)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박경유(朴慶游)입니다.
현풍현(玄風縣):생사당은 전 현감 조진태(趙鎭泰)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경신년(庚申年)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비안현(比安縣):백천정사(白川精舍)는 현령 유포(柳砲), 중랑장(中郞將) 변용(卞勇), 중훈대부(中訓大夫) 이훈(李薰), 찰방(察訪) 장문서(張文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술년(戊戌年) 7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이집(李㙫)이고 현감은 홍언도(洪彦度)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변태화(卞泰和)입니다.
문경현(聞慶縣):생사당은 전 현감 정석범(鄭錫範)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신년(戊申年) 8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경산현(慶山縣):생사당은 고 현령 심수준(沈壽浚)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기해년(己亥年) 7월에 창건하였고, 전 현령 유유(柳愈)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은 경신년 3월에 창건하였습니다.
흥해군(興海郡):송계영당(松溪影堂)은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갑진년(甲辰年) 3월에 창건하고 아직 위패를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김동필(金東弼)이고 군수는 김몽익(金夢翼)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시정(李是禎)입니다.
칠곡부(漆谷府):사양서원(泗陽書院)은 담장 밖에 별사(別祠)가 있습니다. 본 서원은 바로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서원으로 순치(順治) 8년에 창건하였고, 별사는 처사(處士) 이원경(李遠慶)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정유년(丁酉年) 11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권업(權𢢜)이고 부사는 김중려(金重呂)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윤경인(尹景仁)입니다.
신녕현(新寧縣):생사당은 전 현감 서명오(徐命五)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경신년 8월에 창건하였습니다.
영천군(永川郡):창주이사(滄洲里社)는 부제학(副提學) 조상치(曺尙治)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병진년(丙辰年) 10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민응수이고 군수는 이겸좌(李謙佐)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조익기(曺益基)입니다.
청도군(淸道郡):전 군수 윤봉구(尹鳳九)에게 제사를 지내는 생사당은 정미년 5월에 창건하였고, 전 군수 심탁(沈鐸)에게 제사를 지내는 생사당은 기미년 7월에 창건하였습니다.
의흥현(義興縣):화잠서원(華岑書院)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신년(戊申年) 정월에 창건하고 아직 위패를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황선이고 현감은 김지경(金趾慶)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이시복(李時馥)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건륭(乾隆) 6년 8월 11일에 예조(禮曹)에 계하(啓下)하였다.
[주-D001] 창주정사(滄洲精舍) : 주자(朱子)가 만년에 학문을 강론한 곳이다. 주자가 저술한 《회암집(晦菴集)》에 〈창주정사고선성문(滄洲精舍告先聖文)〉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삼아 사사로이 사당을 건립하여 공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낸 것임.[주-D002] 선생안(先生案) : 각 관아(官衙)에서 전임(前任) 관원(官員)의 주소, 성명, 관직명, 생년월일 등을 기록하여 비치하는 문부(文簿)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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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54권, 영조 17년 12월 10일 辛丑 2번째기사 1741년 청 건륭(乾隆) 6년
정언 임박이 호서의 시험을 관장하여 비난받은 지평 안식을 파직하라고 청하다
정언 임박(任璞)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평(持平) 안식(安栻)이 호서(湖西)의 시험을 관장하여 비난의 소리가 떠들썩하게 일어났는데, 금방 파직시켰다가 곧바로 다시 제수하여 대각(臺閣)에 수치를 끼쳤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능침(陵寢)의 화소(火巢)248) 안에서 몰래 도살(屠殺)을 한 것은 일이 매우 놀라우니, 해당 능관(陵官)을 즉시 사태(査汰)시켜야 합니다. 동지 부사(冬至副使) 정언섭(鄭彦燮)과 전 서장관(書狀官) 권현(權賢)은 행구(行具)의 수용(需用)을 빙자하여 시전(市廛)의 물건을 함부로 취하였으니, 마땅히 삭파(削罷)의 형벌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경성 판관(鏡城判官) 주기(朱杞)는 전관(前官)이 비치해 둔 진곡(賑穀)을 모두 아복(衙僕)의 실어가는 것으로 돌려 원망과 비난이 고을에 가득하니, 마땅히 삭탈 관직(削奪官職)시켜야 합니다.
성산 현감(星山縣監) 이수보(李秀輔)는 서원(書院)의 일로써 붙잡혀 와서 공초(供招)를 바침에 있어 충렬사(忠烈祠)의 명칭을 향현사(鄕賢祠)로 바꾸었는데 도신(道臣)이 조사하여 보고함에 미쳐서 서로 덮고 숨겨주어 끝내는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으니, 이수보는 마땅히 파직시키고 도신 또한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되 주기는 굶주린 백성을 구원할 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이수보는 일이 임금을 속인 것에 관계되니,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사처(査處)하게 하라."
하였다.
[註 248]
화소(火巢) : 산불을 막기 위하여 능(陵)·원(園)·묘(墓)의 해자(垓字) 밖에 있는 초목을 불살라 버린 곳을 말함.
○正言任璞上疏, 略曰:
持平安栻, 掌試湖西, 謗言喧著, 乍罷旋除, 貽羞臺閣, 宜罷其職。 陵寢火巢內潛屠, 事甚驚駭, 當該陵官, 卽令査汰。 冬至副使鄭彦燮、前書狀官權賢, 憑藉行具之需, 濫取市廛之物, 幷宜施罷削之律。 鏡城判官朱杞, 前官備置之賑穀, 都歸衙僕之駄去, 怨詈溢境, 宜削職。 星山縣監李秀輔, 以書院事被拿納供也, 以忠烈祠之名換鄕賢祠, 而及道臣査報, 互相掩諱, 竟至全脫, 李秀輔宜罷其職, 道臣亦宜重推。
批曰: "幷依施, 而朱杞不恤賑民, 李秀輔事係欺君, 幷令該府査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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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집 부록 제4권 / [기(記)] / 석문정사(石門精舍) 중수기(重修記)
안동 고을에서 서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이른바 석문정사라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학봉 김 선생께서 평소에 도를 강론하던 곳이다.
천등산(天燈山) 한 자락이 솟았다 낮았다 꾸불대며 수십 리를 내려와서 낙동강 강가에 이르러 우뚝하니 솟아나 청성산(靑城山)이 되었는데, 푸른 절벽과 기이한 바위가 마치 모자를 엎어 놓은 것 같고 홀(笏)을 세워 놓은 것과 같아, 괴이한 형상을 어떻게 말할 수조차 없다. 그 높이를 헤아려 보면 정사(精舍)는 전체 높이의 3분의 2쯤 되는 곳에 자리해 있다. 그런데 낙동강 물이 동남쪽에서 흘러와 북쪽을 향해 흐르면서 곧장 이 산 아래에 이르렀다가 또다시 서쪽으로 꺾여서 산 바깥쪽을 돈다. 멀리 강변과 산봉우리는 기이하고도 교묘하며, 맑은 못과 긴 여울은 맑고도 깨끗하여, 마치 산은 머리를 틀어올린 것 같고 물은 쇠거울을 펼쳐 놓은 듯하다. 이에 그 맑은 기운과 뛰어난 전망은 동남쪽 지방 전체를 둘러보아도 아마 이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선생께서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온 뒤에 도가 행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고요히 수양할 뜻을 품어 그윽하면서도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았다. 그러다가 이 언덕을 보고는 맑으면서도 드넓고 외지면서도 뛰어난 풍치를 좋아하였다. 이에 즉시 조금 평평한 곳을 다져서 정관(亭館) 하나를 지었는데, 서쪽 두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고, 그 뒷쪽으로 한 칸을 넓혀서 장경각(藏經閣)을 만들고, 동쪽으로 네 칸은 서늘한 마루방으로 만들고, 그 서쪽에 있는 일곱 칸은 승료(僧寮)로 만들어, 방과 마루가 있고 부엌과 창고가 있게 하였다.
그 서쪽 가에는 두 개의 돌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돌이 커서 마치 문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를 석문(石門)이라 하였으며, 송(宋) 나라 만경(曼卿) 석연년(石延年)이 석실(石室)에다 복숭아나무를 심은 고사를 모방하여 서쪽 섬돌 아래에 홍도나무와 벽도나무를 심었다. 또 벽오동 한 그루가 동쪽 계단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
선생께서는 날마다 그 가운데 고요히 앉아 있어서 깊이 잠겨 사색하는 공부가 더욱 정밀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년의 난리를 만나 자신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면서 온 마음을 다 바치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정사는 이미 세월이 오래된 데다 또 자리잡은 곳이 높아서 비바람이 많이 들이친 탓에 기둥과 서까래가 쉽게 썩어 무너졌다. 이에 중간에 여러 차례 수리하기는 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무너져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선생의 5대손인 김성월(金聖鉞) 등이 함께 의논한 다음 중수하여 예전 규모대로 새롭게 지었다. 한 달 남짓 공사를 벌여 완공하자, 집이 우뚝 솟아 모습이 새롭게 변하여 강산에 빛을 더하게 되었는바, 선대의 사업을 잘 이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할 만하다.
김성월은 본디 예서(隷書)를 잘 썼으므로 ‘석문(石門)’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절벽에다 새겼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까마득한 후생(後生)으로서 지식이 얕고 말이 늘어지는바, 어찌 감히 그 사이에다 이름을 끼워 넣어 아름다운 것을 더럽힌다는 기롱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에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돌아보건대 나는 못난 몸으로 선생의 빛나는 도덕을 흠앙해 왔으며, 개인적으로 마음속으로 아는 것이 있다. 그러니 참람되고 외람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한마디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선생께서는 강건하고 방정한 기질을 품부받았고 영민하고 특별한 자질이 빼어났으며, 어렸을 적부터 지혜와 용기가 비범하였고 세속에서 벗어난 지취(志趣)가 있었다고 한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도를 들은 것이 몹시 빨랐으므로 정심한 의리를 알아 그 쓰임을 다하였으며, 자신을 이루어서 남을 이루어 주었다. 그리고 집안에 있으면서 행실을 함에 있어서는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나아가고 물러남과 평탄함과 험함에 이르러서는 오직 의리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의 몸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과 같은 사람은 어찌 《맹자》에서 말한, “부귀(富貴)를 가지고서도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을 가지고서도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威武)를 가지고서도 지조를 굽히게 하지 못한다.”는 것과 《논어》에서 말한, “제후국의 명을 부탁할 만하며, 6척의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며, 대절(大節)에 임해서 그 절개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연기와 노을이 낀 이 한 구역은 실로 선생께서 말년에 학문을 닦던 곳이다. 대체로 선생의 뜻은 장차 고요한 세계에서 한가로이 오가면서 학문 공부에 전념하여, 위로는 선사(先師)를 이어받고 아래로는 후학들을 틔워 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난 시대가 좋지 못하여 그 뜻을 펴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어찌 후학들의 천만년토록 다하지 않을 한이 아니겠는가.
지금 선생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 137년이 되었는데, 정사가 새롭게 지어져서 강산이 옛 모습과 같은바, 높이 솟은 성산(星山)을 우러러봄에 절벽처럼 우뚝 선 기상이 희미하게 보이고, 맑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니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은 지취(志趣)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더구나 이곳은 선생께서 오가시며 소요하던 지역이라서 초목들조차도 오히려 남은 광채를 입었고, 집을 짓고 한가로이 거처하시던 곳이라서 솔바람 소리가 마치 선생의 기침 소리와 같다. 그러니 선생의 풍모를 듣고서 흠모하던 자들이 이곳 마루에 오르면 어찌 단지 물이 깊고 산이 높은 경치와 마루에 올라서 보는 아름다움만을 즐길 뿐이겠는가. 반드시 마음이 융합되고 정신이 부합되어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흥기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사가 지어지느냐 무너지느냐가 후학들에게 관계 있음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옛날에 주 부자(朱夫子)가 무이산(武夷山) 속에 정사를 새로 짓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자들을 기다렸는데, 지금까지도 만정(幔亭)의 대은병(大隱屛)의 명성이 천하에 자자하다. 그러니 땅이 사람으로 인하여 이름이 나게 된다는 것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다. 후대 사람들이 이곳에서 놀고 쉬고 하면서 선생의 도를 미루어 밝혀 이 학문을 전함을 더욱더 넓혀 간다면, 선생께서 그 당시에 학문 공부를 하던 뜻이 이로 인하여 이 세상에 다시 밝아져 성산(星山)의 석문정사가 해동의 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 칭해지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선생이 지은 연어헌(鳶魚軒)이 정사의 아래에 있다. 대개 권 선생이 이미 이곳의 주인으로 있다가 선생께 이 산의 반쪽을 나누어 주기로 약속한 것이라고 한다.
도유 작악(屠維作噩) 청명절(淸明節)에 후학 안릉(安陵) 이재(李栽)는 삼가 기문을 쓴다.
[주-D001] 만정(幔亭)의 대은병(大隱屛) : 만정은 무이산(武夷山)을 가리킨다. 무이산에 만정봉(幔亭峯)이 있으며, 만정봉에 대은병이란 곳이 있다.[주-D002] 도유 작악(屠維作噩) : 도유는 천간(天干) 중에 기(己) 자가 들어간 해이고, 작악은 지지(地支) 중에 유(酉)가 들어간 해로, 기유년을 말하는데, 기유년은 영조 5년(172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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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菴先生文集卷之十三 / 記 / 石門精舍重修記
福州西十餘里。有所謂石門精舍。卽鶴峯金先生平日講道之所也。天燈山一支。蜿蟺起伏。南走數十里。至于大江之濱。屹然危聳。爲靑城山。蒼壁奇巖。若覆帽若儼笏。詭怪不可名狀。測其高。精舍處三之二。洛水自東南向北流。直至玆山下。又西折而轉山外。極浦遙岑。呈奇獻巧。淸潭脩瀨。空明澄澈。若簇螺鬟而展金鏡。其淸淑之氣。絶特之觀。遍東南殆無與二。先生自錦城解綬而歸。知道之難行。而有退閒靜修之志。尋幽選勝。寔占玆丘。卽其稍按衍處。規置一亭館。西二間爲燠室。斥其後一間爲藏經閣。東四間爲凉廈。又其西七間爲僧寮。有房堂有廚庫。以其西畔有二石對峙。谽谺如門闕。名之曰石門。放石曼卿石室種桃故事。種紅碧桃于西階下。又有碧梧一株在東階下。至今猶有古査遺䕺。先生於是日靜處其中。沈潛玩索之工。益精以密。曾未幾時。遭値世難。忘身憂國。死而後已。嗚呼偉哉。精舍處地高。多烈風飛雲。故棟楹樑桷。易腐敗撓折。中間累經修繕。輒非久而壞。
數年前先生五世孫聖銊等。合謀重修。仍舊爲新。維月若日工告訖功。輪奐改觀。江山增彩。善乎其可謂能不替先業矣。磨崖刻石門二大字。屬不佞栽記其事。藐余後生。識膚語綿。其何敢託名其間。以重佛頭之糞之譏乎。旣屢辭不獲命。則顧惟謭劣。欽仰先生道德輝光。而私竊識諸心者則有之矣。其可以僭猥而無一言乎。蓋嘗聞之。先生稟剛方之質。挺英特之資。少有豪邁拔俗之趣。及登師門。聞道甚早。知精義以致用。成己以成物。而居家制行。以孝弟爲本。立朝事君。以不欺爲主。以至出處夷險。惟知有義理。不知有其身。若先生者。豈非所謂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可以寄百里託六尺。臨大節而不可奪者哉。惟玆一區煙霞。實爲先生晩年藏修之所。蓋其志將欲優游靜界。專意學問。於以上承師傳。下啓來學。而逢時不祥。不獲伸其志以沒。則豈不爲後學千萬世不盡之恨哉。今去先生之世百三十有七年。精舍重新。江山如舊。仰星巓之挺矗。依俙壁立氣象。俯碧流之淸活。髣髴光霽襟期。而况杖屨經履之地。草木猶被餘光。堂宇燕申之處。靈籟如聆謦欬。則聞先生之風而慕之者之登斯堂也。豈但樂其有泓崢之勝登覽之美而已哉。其必有心融神契。而想像興起者矣。然則精舍廢興。其有關於後學爲如何哉。昔朱夫子創精舍于武夷山中。以待四方來學者。至今幔亭大隱屛之名。聞天下。地由人勝。非虛語矣。後之人有能游息於斯。推明先生之道而益廣斯學之傳。則安知先生當日藏修之志。因此復明於世。而星山石門。直稱海東武夷也邪。權松巖先生鳶魚軒。在精舍下。蓋權先生先已作主人。與先生約分山一半云。著雍涒灘遰鴻鴈節。後學安陵李栽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