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라는 우물 / 강지연[전북문협]

[이해숙]

바다라는 우물    /   강지연
 
  마당 복판에 오래된 우물이 정다웠다. 초등학교 삼 학년 때 이사 간 집에서 처음 본 우물이었다. 생기롭고 살가운 우물물은 엄마의 치열한 살림과 내 소꿉 살림을 살고 우둘투둘한 빨랫돌을 돌아갔다. 날마다 퍼내 써도 새롭게 차오른 우물물은 하얀 냉이꽃을 피우고 고랑의 불미나리를 일으켜 세웠다. 메아리가 사는 두레우물은 얼마나 깊은지 털어놓은 속엣말이 절대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우물물에 뛰어든 두레박이 고요를 흔드는가 싶더니 이내 기울어 컴컴한 침묵에 스르르 동참했다. 침묵을 깨고 올라온 샘물이 정신을 바짝 당기곤 했다. 우물에 비친 어릴 적 모습은 점차 가무러지나 어지럽던 꿈을 가지런히 헹구어 내던 시절만은 또렷하다.
  별을 사랑한 청년도 우물을 가까이했다. 청년은 모자가 조금만 비틀어져도 반드시 고쳐 쓰고 길을 가는 시인이었다. 시인은 순수한 시절의 추억이 있는 외딴 우물을 자주 들여다봤다. 우물에 비친 모습 뒤로 펼쳐지는 평화로운 자연을 동경했다. 하지만 그림 같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현실에 그는 슬프고 불안하고 까마득했다.
  윤동주는 고달플 때마다 그리움이 바다처럼 깊어진 우물을 들여다봤다. 어린 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숨을 고르고 무구한 신념이 흐려질까 두려워했다. 시의 물줄기이자 영혼을 비추는 우물 앞에 서서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를 내었다. 어수선한 세상에 쓸려가지 않으려 몹시도 애썼다.
  윤동주의 고향에서 가져온 우물방틀이 무지근하다. 절대 순수를 꿈꾸던 청년이 식민이라는 두꺼운 얼음장에 갇혔으니 하늘을 우러르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인고의 시간이 두툼한 널빤지의 윤기를 빼앗고 쩍쩍 갈라놓은 듯하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바싹바싹 타들어 갔을 그의 목마름이 간절하다.
  살얼음이 밟히기 시작할 무렵 무쇠 작두샘이 들어왔다. 땅에 수직으로 박힌 관으로 물이 끌리어 올라왔다. 매얼음 깔리는 한겨울이 되자 얼음보다 더 단단한 철 뚜껑이 우물을 아예 덮어버렸다. 멀뚱한 눈빛에 생기를 되돌려 주곤 하던 우물은 더 이상 정다운 메아리도 봄빛 하늘도 들여놓지 못했다.
  국권을 강탈당한 윤동주의 한평생이 어둑한 우물에 흐른다. 타국 땅 구석진 곳에서 떨리는 몸 웅크리고 홀로 스러져 간 청년의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순수를 지향하던 청춘을 삼켜버린 어스레한 공간이 싸늘하다. 적막 속, 작고 차가운 우물가에 앉아 참담했을 그의 생애를 더듬는다.
  일생 주권을 가져 본 적 없는 그는 바다를 건넜다. 적국으로 가는 파도의 등줄기는 높았다. 시인의 순수한 영혼을 알고 있는 고향 집 우물도 울면서 바다로 따라나섰다. 고랑을 지나서 도랑에 들고 강에 흘러든 고향의 우물은 바다에 이르러 열린 우물이 되었다.
  윤동주는 적국에서의 생활이 힘들면 잃어버린 고향 집 우물대신 바다로 나가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로 바다는 푸른빛을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런 위안도 잠깐, 그는 일본의 서늘한 감방에서 외로이 여위어 갔다. 얼음장 같은 마룻바닥에 누운 와중에도 마루판의 물결무늬를 손으로 쓸며 바다로 나아가는 꿈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다는 멈추지 않고 철썩였다.
  출판 비용이 없어 자기 작품을 일일이 필사한 청년의 시집이 절절하다. 원고지에 육필 원고 써 내려가며 겹겹이 그은 붉은 퇴고의 줄이 시인의 피눈물인 양 처절하다. 나라 잃은 지식인으로 사는 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면 망국의 설움을 어찌 견디어냈을까. 시를 쓰고 다듬던 시간만큼은 억센 손아귀에 끄달리지 않고 스스로 숨 쉬는 유일한 순간이었으리라.
  봄은 또다시 당도하고 새로이 차오른 우물물은 계속해 바다로 흐른다. 시인의 우물이 새순을 돋우어 숲을 키우고 꽃을 올리어 마을을 풍요롭게 하고, 바다를 출렁이게 한다. '해처럼 밝은 아이'라 불리던 청년의 순수가 그리울 때, 내 어릴 적 우물이 생각날 때, 좋은 글이 쓰고 싶을 때, 나는 곧바로 바다로 간다.
  시인의 우물물이 흘러든 바다는 절대로 마르지 않는다. 저 깊숙한 곳 어디에서 샘솟으며 멈추지 않았던 시인의 맑고 선한 민족정신을 오래 기억한다. 바다라고 부르는 활짝 열린 우물에 별빛이 가득하다.
 
[강지연] 수필가, 2018년《월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사무차장
* 2023 바다문학상 본상.
* 수필집《딸은 엄마의 허리춤에서 자라나고》
 
  우리는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문학관 탐방'을 자주합니다. 그냥 '둘러보고' 오기 급급해요.
 수필은 '발견'이라 함이 여실합니다.
 작가는 문학관에서 만난 시인 윤동주의 삶과 문학에 깊이 감동했고,
꽃피우지 못한 빛나고 순수했던 청춘이 아팠습니다.
그의 시詩가, 젊음이,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저도 함께 아픕니다.
 그예,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우물과 시인의 '자화상'에 나타난 우물을 연관해
그만의 글을 낳았네요. '발견'과 더불어 '깊은 사유'가 돋보이는 글! 절창입니다. 감동합니다.
이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필사하는 마음으로 꼭꼭 눌러 워드작업을 했습니다.)

[이정석]

수고하심에 감동입니다
글쓰기에 샘이 마르지 않기를 빌어봅니다!
여름에도 행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