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책을 읽고 나는 계절이 뒤바뀌는 소리를 듣지 과연 밤낮은 무엇인가 흐린 책을 읽는 밤엔 고대하던 깊은 잠을 잘 수 있지 비는 밤새 이불로 조금씩 스며들어 대낮의 꿈속으로 뚝뚝 떨어지고 홑겹의 잠 속에서 내가 다시 흐린 책을 펼치자마자 페이지에 기록된 폭발의 연대기에 기함하며 기절하지 기절 속에서도 나는 흐린 책을 보네 힘겹게 다시 한 세기의 페이지를 넘기며 오는 너를 만나지 너는 오늘 새처럼 철탑 위에 앉은 사람 촛불로 공중에 제 얼굴을 조각하는 사람 몇초간의 폭격으로 어린 딸을 잃은 사람 태양이 오늘의 바람 속에 드리웠던 흰 그물을 거둘 시간 무수한 목숨과 한권의 낡고 흐린 책이 책장을 지느러미처럼 파닥이며 저녁의 수면 위로 끌려나오네 오늘의 날씨는 흐림 흐린 책 위로 난민들의 난파된 목선 잔해 같은 문장들이 시커멓게 떠내려오네 바다를 비행 중에 하늘에서 숨 끊긴 새들이 책장 위로 후드득 떨어지네 우박처럼 새들이 불현듯 내 이마로 날아들지 통찰! 과연 그런 게 있다면 그런 건 없다는 사실 한가지뿐 다음 페이지가 해일처럼 부풀어오르며 밀려오고 페이지와 페이지 틈으로 벼락이 치고 지진이 나고 크레바스가 패고 지난 페이지가 유빙처럼 찢겨 떠내려가네 구름 속에 가지런히 펼쳐진 나의 두 손 사이로 파도처럼 넘겨졌던 페이지는 다 찢겨나갔네 흐린 책을 읽고 나는 시간이 뒤바뀌는 소리를 듣지 대체 이 계절은 어디서 왔는가 나의 빈손이 마지막 두 장의 페이지처럼 찢기고 떨어지는 계절 조용히 흐린 책을 지르밟고 가는 무심한 새들의 발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