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1])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이다. 1625년 3월 27일 즉위하여 1649년 처형될 때까지 재위하였다.
스튜어트 왕조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차남으로 태어났다. 1603년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여 제임스 1세가 된 뒤 런던으로 이주하였다. 1612년 웨일스공이었던 형 헨리 프레더릭이 사망하자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스페인 마리아 아나와 혼담이 오갔으나 1623년 직접 스페인을 방문하여 8개월간 머물며 진행한 협상 끝에 결렬되었다. 1625년 즉위 직후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와 결혼하였다.
즉위 첫 해부터 찰스 1세는 군주의 특권을 제약하려는 잉글랜드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 간섭없이 전제군주로 통치하고자 하였으나 의회는 동의 없는 징세 등 행위를 폭정으로 인식하였다. 프랑스 공주를 왕비로 맞은 뒤 로마가톨릭을 옹호한다는 평이 돌면서 개신교 교도들 반감이 커졌는데, 특히 장로제를 기반으로 하는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언약도 반발이 컸다. 찰스 1세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교회 수장으로서 성공회의 고교회 운동을 지지하였으나 30년 전쟁이 벌어지는 유럽 대륙의 개신교 군대에 대한 지원은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종교개혁에 관한 찰스 1세 본심을 의심하였다. 장로제를 채택한 스코틀랜드 교회에 성공회 관례와 주교제를 강요하려는 시도는 주교 전쟁으로 이어졌고 스스로 몰락을 불러오는 단초가 되었다.
1642년 찰스 1세와 의회 갈등은 결국 잉글랜드 내전으로 폭발하였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는 원두당을 결성하고 왕당파인 기사당 군대와 싸웠다. 개전 초기에는 전쟁 향방을 알기 어려웠지만, 1645년 의회군이 신형군을 결성한 뒤 전세가 기울어 찰스 1세는 옥스포드에서 퇴각하여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그나마 스튜어트가에 온정적이었던 스코틀랜드 군대에 항복하였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 사이 오랜 협상 끝에 런던 장기의회로 넘겨졌다. 찰스 1세는 의회 입헌군주제 요구를 거부하다가 1647년 11월 잠시 탈출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아일오브와이트에 투옥되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 언약도가 왕당파로 돌아서며 다시 내전이 벌어졌지만, 잉글랜드 신형군은 1648년 말까지 잉글랜드 내 봉기를 진압하며 내전을 종결지었다. 의회파는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여 1649년 1월 처형하였다. 이후 의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인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하였다. 잉글랜드 연방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사망후 급속히 구심력을 잃었고, 1660년 찰스 1세 아들 찰스 2세가 국왕으로 즉위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찰스1세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 이후 잉글랜드 성공회가 시성한 유일한 국왕이다.
유년기
1600년11월 19일 파이프의 던펌린궁에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앤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12월 23일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 왕실예배당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신교 의례에 따라 세례받았다. 제임스 6세는 이를 기념하여 새로 태어난 찰스를 올버니 공작으로 삼았다.[2]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이었고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해 4월에는 제임스 1세가, 6월에는 가족들이 잉글랜드로 이주하였지만, 허약하였던 찰스는 여행 중에 건강이 상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3] 제임스의 총신인 던펌린 백작 알렉산더 세튼을 후견인으로 삼아 스코틀랜드에 남겨졌다.[4]
1604년 세 살이 된 찰스가 홀로 던펌린궁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자 잉글랜드로 떠날 수 있겠다고 판단되었고 7월 중순 잉글랜드를 향해 출발하였다.[5] 찰스 1세의 보육은 몬머스 백작 로버트 캐리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트레버니언에게 맡겨졌다. 그녀는 찰스 1세의 연약한 발목을 강화시켜준다고 믿어 스페인산 쇠가죽에 황동을 덧댄 부츠를 신게 하였다.[6] 찰스 1세는 성장이 더뎠고 평생 말을 더듬었다.[7]
1605년 1월 찰스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차남에 대한 관례적 작위인 요크 공작에 봉해졌고 바스 기사 수훈이 주어졌다.[8] 찰스 1세의 훈육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토머스 머레이가 맡았다.[9] 머레이는 찰스 1세에게 당시 인문주의 교육의 일반적인 교육과정이었던 고전, 언어, 수학 및 종교의 일반적인 과목을 가르쳤다.[10] 1611년 가터 기사의 수훈이 더해졌다.[11]
자라나면서 찰스 1세는 신체적 허약함을 극복하였다.[11] 오늘날의 의학으로 보면 찰스 1세는 구루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6] 그는 기마술과 총격술, 검술 등에 능하게 되었다.[10] 그러나 형 헨리 프레더릭에 비해 키나 강인함 모두 미치지 못하였고 찰스 1세는 형을 따라가려고 애썼다.[12] 1612년 11월 초 헨리 프레더릭은 18세의 나이에 장티프스로 의심되는 질병을 앓다 사망하였다. 일부에서는 포르피린증이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13] 장남이 사망하자 차남이었던 찰스 1세가 왕위계승권자가 되어 형이 지니고 있었던 웨일스공, 콘월 공작, 로스시 공작, 체스터 백작 등의 여러 작위를 계승하였다.[14]
왕세자 시기
1613년 찰스 1세의 누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하이델베르크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혼인하여 떠났다.[15] 1617년 로마가톨릭을 신봉한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자 이듬해 보헤미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1619년 개신교 제후동맹이 주도하던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 2세를 축출하고 새 국왕으로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종교를 명분으로 한 둘 사이의 갈등은 결국 30년 전쟁으로 비화하였다.[16] 로마가톨릭과 개신교가 전면에 내세워진 전쟁의 영향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잉글랜드 의회를 비롯한 잉글랜드 사회는 이를 두 세계관의 정면 충돌로 인식하였다.[17] 전쟁 초기 전황은 개신교군에 유리하였으나 1620년 백산 전투에서 가톨릭군이 승리하자 전쟁은 장기화 되어 사태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되었고 팔츠 선제후국은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군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18]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왕세자 찰스 1세와 스페인의 왕녀 마리아 아나의 혼사를 추진하여 이를 장기화 된 전쟁의 평화 조약을 위한 구실로 삼고자 하였다.[19]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이러한 계획은 궁정과 잉글랜드 대중들 모두에게 인기가 없었다.[20] 1621년 소집된 잉글랜드 의회는 스페인과 가톨릭에 대항하는 해군의 참전과 잉글랜드 내의 성공회 기피에 대한 강제 개종, 그리고 왕세자의 결혼 대상은 개신교도로 할 것을 요청하였다.[21] 의회는 당시 상원 의장 겸 대법관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을 국왕의 동의 없이 부패 혐의로 탄핵하면서[22] 사권박탈법을 적용하여 모든 권리를 몰수하였는데, 이는 훗날 의회가 같은 방법으로 찰스 1세의 지지자인 버킹엄 공작, 윌리엄 로드 대주교, 스트라포드 백작 등을 축출하는 선례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왕세자의 결혼에 대해 하원이 의견을 내는 것을 군주의 특권에 대한 침해라고 보아 하원은 내정에 대해서만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맞서 하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서민[* 2]의 방벽으로서 스페인과 개신교가 전쟁을 벌이는 이 시기에 웨일스 공의 결혼에 대해 언론의 자유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 찰스 1세 역시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결혼을 하원이 거론하는 것을 특권 침해로 불쾌해 하였다.[24] 결국 제임스 1세는 1622년 군주에 대해 무례하다는 이유로 의회를 해산하였다.[25]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는 제임스 1세의 총신으로[26] 찰스 1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1623년 버킹엄 공작과 찰스는 오랫동안 미뤄지던 스페인 여정에 함께하였다.[27] 그러나 둘의 여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28] 왕녀는 찰스 1세를 그저 이교도 가운데 한 명 정도로 대했고 스페인 왕실의 첫 요구는 가톨릭 개종이었다.[29] 그에 덧붙여 스페인은 잉글랜드 형볍의 가톨릭 박해 조항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잉글랜드 의회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조건이었고, 왕녀는 결혼 후에도 잉글랜드가 실제로 약속을 지키는 지 확인하기 위해 1년 간 스페인 왕궁에 머물것이라는 조건이 추가되었다.[30] 굴욕에 가까운 결혼 조건을 거부하고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이 런던으로 돌아오자 대중은 이를 환영하였다.[31] 수모를 당한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과 함께 제임스 1세에게 스페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32]
개신교도 고문들의 지지를 받으며 제임스 1세는 전쟁 자금의 확보를 위해 의회를 소집하였다. 재무장관 라이오넬 크랜필드가 재정 악화를 이유로 반대하자 찰스와 버킹엄 공작은 베이컨의 탄핵 때 사용하였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를 축출하는 것을 지지하였다.[33] 제임스 1세는 버킹엄 공작에게 이 일은 향후 의회가 국왕을 무시하는 선례를 만드는 것이라며 어리석다 비난하였는데, 이는 훗날을 예견한 경고가 되었다.[34] 잉글랜드는 가톨릭교도였으나 팔츠 선제후의 편에 있던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를 지원하였지만 그의 군대는 네덜란드 해안을 넘지 못하고 고립된 채 보급품이 고갈되었다.[35]
1624년 제임스 1세는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이 사실상 잉글랜드 궁정의 실권을 쥐고 있었고, 1625년 3월 제임스 1세가 사망하자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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