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던것 같다.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가족, 연인, 친구 그리고 단체 관광객들이 추위를 막아줄 후드 달린 점퍼와 코트를 걸치고 천지연의 야경을 보기 위하여 하나 둘 몰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얘기들을 나누며 걷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아름다운 10월의 마지막 밤을 먼 훗날의 추억의 앨범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걸었었노라고 펼쳐 놓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아까까지 천지연의 숲과 물가를 고고히 나르던 백로도 자신의 둥지를 찾을 때가 됐는지 다소곳이 나래를 접고 꾸벅 거리고 있었다. 청둥오리와 원앙들은 삼삼오오 군을 이뤄 근처 물가의 뭍에서 졸고 있는데 이 백로는 잘 적에도 고고하게 나무가지 위에서 자는가 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인 김정이 1519년 기묘사화 때 제주로 귀양을 와서 이 천지연 폭포를 유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이 폭포를 보며 시를 한 수 읊었는데 당시의 억울한 귀양살이에서 풀려 하루 빨리 한양으로 복귀하 기를 염원하는 시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 그의 시를 덧붙여 본다.
높다란 절벽 고요한 모퉁이에 나무들 또렷또렷
쌍 폭포 다루는 물줄기 눈발인 듯 말끔하다
바로 큰 용이 잠겨 살고 있는 못이나
어떤 때는 뛰어 날아 구름 속으로 오르겠지
그러나 그는 이 시가 한양도성 임금님 귀에 들려 괘씸죄에 결렸었는지 결국에는 제주에서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는다. 후세에 제주에 귀양을 오거나 한 때 목사로 왔었던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그리고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주에 미친 그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제주시 오현단에 기념비가 있어 매해 나의 모교 개교기념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나중 이 오현단에 대해서는 제주시 이야기를 펼칠 때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것이다.
우리가 어려서 불렀던 동요 중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따라 가고 싶어 바다로 간다'란 가사 마냥 천지연의 폭포수도 주야장차 쉼없이 서귀포 해안으로 흐르고 있었다. 여름밤에 이곳에 왔었더라면 시원한 폭포수 흐름에 훌륭한 피서를 할 수있었을텐데 가을이 가는 끝자락이라 왠지 마음까지 싸늘함을 느끼게 하였다.
드디어 아름다운 절경의 천지연 폭포가 우람한 물소리를 내며 내 앞에 나타났다.
천지연의 야경은 처음이다. 그 동안 몇 차례 방문했던 천지연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 모습을 보여 주기에 나는 오래 전 옛날 이곳 천지연에 두레박을 타고 내려와 선녀가 목욕하고 올라간 곳이 아니었을까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신비스러웠다. 하얀 날개 옷을 입은 선녀들이 하나 둘 두레박에서 나와 입었던 날개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목욕하는 신을 연출하는 모습이 상상은 안되는지....
숲풀 속에 숨어 선녀들이 목덜미에 물을 젖시고 서로 상대에게 물싸움을 걸며 "호 호 호"웃음소리, 서로의 재잘거리는 선녀들을 보는 착각속에 나는 몰래 그녀들을 향해 핸드폰의 샷터를 눌렀다. 폭포주변의 조명발이 너무좋아 후레쉬를 안 터트려도 천지연의 신비한 모습이 나의 카메라에 갇혔다.
최근에 천지연을 보는 사람들은 물 위에 비쳐진 바위의 모습이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들 한다.
뒤에 보이는 바위는 물 위에 비쳐져 있을 때 왼쪽에서 보면 어른 얼굴로 보이고 오른 쪽에서 보면 아기의 얼굴로 보인다 하니 추후에 이 천지연을 방문하게되면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오후 때에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으니 실제로 그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 천지연을 보는 재미가 있을것이다.
나는 천지연 야경에 심취하여 더 머물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려 천지연을 걸어나와 서귀항으로 가기위해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저 멀리 돗배모양의 다리가 서귀포 밤바다를 훤히 비추고 있었다.
세연교!
나는 94년 천지연을 마지막으로 한 동안 방문을 못한 사이 서귀항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다리가 서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22년이나 흘러 내 앞에 다가선 세연교는 서귀포항 바로 남쪽에 위치한 무인도인 새섬과 육지를 잇는 길이 169m, 폭 4∼7m의 사장교로 2009년9월 28일 준공되어 이틀 뒤인 9월 30일에 새섬공원과 함께 공식 개방되었다. 제주도의 전통 배인 테우의 모습을 옮겨 만든 다리의 입구에는 악천후에 섬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개폐식 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평상시에는 일출 때부터 밤 10시까지는 개방되어 있어서 서귀포에서 하루 관광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서도 이 세연교를 보기 위해서라면 걸어볼 수있는 코스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다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선지 모르지만 모든 다리들의 야경은 아름답다. 서울의 한강다리들 그렇고, 인천의 인천대교, 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 그리고 작년에 보았던 여수의 돌산대교 그외 내가 가 보지 못한 다른 다리들도 이렇게 꾸며났을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날에 보았던 이 세연교 역시 파란 밤하늘과 밤바다에 어울리게 환한 조명시설을 갖춰놓아 보는 이들에게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기에 어느 누가 그 다리를 걸어보아도 감탄을 아니 할 수가 없으라 여겨진다.
벌써부터, 아니 내가 늦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다리에 걸쳐져 있는 새섬을 다녀 오는가 보다. 이 세연교가 설치되기 전에는 새섬을 건너 다닐 수가 없었는데 하기사 옛날 제주시에서 이곳 서귀포에 잠시 다니러 왔던 나에게는 지금 내가 건너 가려고 하는 이 섬이 새섬인줄 자체도 몰랐었으니까...
지금껏 서귀포를 봐왔던 위치이다. 정방폭포를 보고 난 후 서복 전시관을 돌아 보았고 저녁 늦게 친구 불러모아 싱싱한 회 한 접시 먹고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마감하고, 다음날 점심늦게 서귀포 어느 호텔 커피숖에서 간단한 미팅하고 난 후에 서귀포 어느 동네길을 접어들어 천지연 폭포 둘러보고 음악회를 보고선 세연교를 넘었더니 어느 새 밤 10시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지도에서 보는 것 처럼 제주의 관광지는 가까운 거리에 인접해 있어 주위의 풍광을 바라보며 충분히 도보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새섬에서 바라본 범선이다.
이 범섬은 마치 호랑이와 같다해서 범섬이라 하였으며 섬의 면적은 96,933㎡,해발 87.2m인 섬이다. 이 해역 일원에는 연성산호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해양자원의 보고이다. 이 범선은 고려말(1374년)최영장군이 당시 제주에서 몽고족 목호들이 일으킨 '목호의 난'을 섬멸시키기 위해 전함 314척을 통솔하여 목호들을 섬멸시키고 102년의 몽고지배를 종지부 시킨 역사의 전적지이기도 하다.
또, 오래 전 전설을 얘기 한다면 제주의 토속신인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 백록담을 베개를 하여 누우면 고군산에 허리를 받히고, 다리는 이 범섬에 닿았는데 이때 발가락이 구멍을 두개 뚫여 놓았는데 범의 콧구멍을 닮았다하여 '콧구멍'이라고도 부른다.
참고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전설인 설문대 할망 얘기를 여기에서 안하고 넘길 수가 없어서 소개를 한다.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만든 여신이다. 할망은 키가 엄청나게 커서 한라산을 베개삼고 누우면 한 쪽 발은 성산일출봉에 또 한발은 제주시 앞바다에 홀로 서 있는 관탈섬에 걸쳐져 있었다.
할망이 관탈섬에 빨래를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에 짚고 서서 발로 빨래를 문질러 빨았었고, 제주의 360여개의 오름(봉우리)들은 할망이 제주섬을 만들기 위하여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의 터진 구멍으로 조금씩 새어 나와 쌓인 것이며,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것이 한라산이 됐다고 전하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참 전설치고는 뻥이 심하다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할망이 얼마나 컸길래 한라산에서 일출봉에 다리를 걸칠수가 있었으며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서 한라산을 쌓을 수가 있었을까? 옛날 제주 사람들은 이리도 뻥이 세었나? 참 어이없는 뻥이 센 전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설문대 할망관한 전설은 들으면 더욱 재미가 있어 나중 기회가 된다면 소개하기로 하고 지난 가을 서울시에서 매년 벌어지는 'Hi서울' 행사에서 출현한 이 대형 영숙이 할매를 보며 옛날 제주의 설문대할망이 떠 올랐다.
그 때에 내가 본 영숙이 할매는 어떻게 컸던지 거대한 도르래를 이용하여 고개와 팔다리를 끄덕 거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대형바퀴를 밀어가며 걸어 갔었는데 전설 속의 설문대할망하고 비슷하단 생각을 해봤다. 한라산과 성산일출봉에 다리를 걸쳤다는 설문대 할망은 이 보다 수백 배, 수천 배는 컸겠지?
새섬에서 바라 본 서귀포항이다.
야경은 어디에서나 바라보면 평화롭고 화려하다.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시가 그러하고, 중국 상하이의 야경 또한 어디 신세계에 와 있듯 꿈속에서 그려왔던 샹그릴라를 보듯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그날에 다가왔던 서귀포항 역시 화려하고 평화로웠다. 2박 3일 동안에 내가 있었던 서귀포는 20여년 전, 아니 더 과거로 올라간 30여년 전의 모습과는 현격하게 달라져 있었다.
60여년 전 이 제주 섬에는 아니 그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45년 해방을 맞기 전 제주는 일본 제국주의 일본군과 미군의 사상최대의 격전장이 될뻔 했던 섬이다. 일본이 계획했던 '결7호' 작전이 실행됐더라면 제주의 사람들은 생존자가 거의 사라질뻔했던 역사가 있었다.
미국이 태평양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오끼나와를 점령할 때 20만명이 죽었고 그 이후 2차 대전이 3, 4개월만 더 늦게 끝냈더라도 당시에 제주에 주둔하며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옥쇄 작전으로 가려했던 7만명의 일본군과 25만명의 제주인은 몰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상 최대의 희생자를 낼뻔 했던 제주도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미군이 일본 열도에 원폭을 떨어뜨림으로 인해 겨우 피해갈 수 있었던 제주는 오늘 날 이렇게 고요한 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은 서귀포를 떠나 후배를 만나기 위해 제주시로 들어가려 한다. 때 마침 내일은 일요일이어서 제주로 들어가긴 전 여유가 있어 동쪽일주도로를 통해 성세기 공원을 들렸다 가기로 작정했다. 그곳에서 '세계 밭담축제'가 열린다하니 참으로 궁금하다. 지금은 제주시에 편입이 되었지만 예전 북제주군 세화읍에 위치한 이 성세기 공원에서 축제를 연다하니 어떤 내용의 축제일까? 밭담하면 제주만이 갖고있는 토지를 구획하는데 쌓는 돌을 말한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으로 들어올 때에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제주는 참 신비롭게까지 보이는 밭담!
제주의 문화는 또, 돌의 문화이다. 집을 지을 때 건축재료요, 수십 기의 돌하루방을 만들었던 조각돌, 산소의 훼손을 막기위해 쌓았던 산담, 네집,내집을 구분하기 위해 쌓았던 집담, 제주는 이 돌 속에 제주의 얼이 스며있고, 애환이 서려있다. 과연 내일의 제주는 이 돌을 이용하여 무엇을 표현하려 하였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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