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등과 같은 아래의 본문 말씀에 있어 우선 모든 전제는 근본적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고, 인간적인 행함을 직접적 기준으로 두는 것은 거듭남의 구원의 차원에 있어서는 논할 수 있는 요소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죄의 영역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진리인 말씀의 법 앞에서 자그마해 보이는 것들부터 해서 육체로 범하게 되는 죄들,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범하게 되는 악들까지, 심지어는 부지중에 범하게 되는 허물들까지도 다 포함되는 등 참으로 이루 다 셀 수조차 없는 죄악들과 그로 인한 문제들, 게다가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모든 인류, 온 세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더 나아가 세상 끝 날,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 하늘나라, 영생까지 모두 다 연계되고 직결되는 것이 구원의 범주인 것이기에 그 어떤 인간적인 것들, 세상적인 것들로도 그러한 구원에 대해 제대로 직결되거나 다룰 수 있는 것이라거나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일 수는 없는 것이고, 이룰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며, 실상 믿음으로 인한 값없는 구원에의 참예케 됨에 있어서는 잠시의 영향조차도 될 수 없는 것인 반면..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성자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님, 곧 온 세상과 전 인류보다,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나아가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시고 영원보다도 더 작으실 수 없는 구원자이시자 중보자이시며,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어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이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만한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의 값과 실제만이 구원을 논할 수 있고, 정말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원이라는 것은 대략 2000년 전에 그러한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심지어는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 더 나아가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에 있어서도 시공을 초월해서 이미 다 해결하시고 모두 이루신 사안과 영역인 것이기에 모든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우리 인생들에 있어 구원을 위해 더 이상의 어떤 행위들이 추가로 필요한 것일 수가 결코 없는 것인데..
그렇기에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창세전부터의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오직 한 분 바로 그 구주 예수님을, 진정 그 십자가의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의 구원을 제대로 알고 깨달으면서 믿음으로 인정하고 사모하며 받아들이느냐, 못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우리 인생들과 험악한 세상, 별의 별 일들이 다 있는 인류 역사의 현장들 속에서의 중요한 문제와 관건은 그러한 믿음에 있어 어떤 믿음이고, 얼마나 진정한 믿음이냐는 것이 아닐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에 있어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만이 구원의 주재이시고, 따지고 보면 원론적으로는 창세전부터의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섭리, 약속과 예정 가운데 있는 자가 구원에 참예할 수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 과정과 진행을 굳이 설명하자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무엇보다 이미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의 구원받을 믿음을 마땅히 아시고 하나님의 시간에 그 중심을 보시며 받으시는 것이고, 그와 함께 말씀대로, 약속대로, 계시대로의 과정과 진행에 따라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구원에 참예케 하시면서 직접적, 경험적으로는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거듭날 수 있게 하시는 것인데..
그에 있어 참으로 어떤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이냐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결정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 험악한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구원에 참예한 자들에 있어 날마다 순간마다의 어떠한 믿음의 몸부림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역사하시는 살아 있는 신앙이냐는 것에 있어서, 그와 함께 어느 정도로 하늘의 힘들을 실제로 누리고 승리할 수 있느냐에 있어서도 실질적 관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나는 믿는다고 하는데, 정말 나름 확신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 잘못 믿거나 이상하게 믿는 경우들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실상은 구원에 참예치 못한 경우들, 가라지와 같은 경우들도 없을 수는 없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사실 그러한 이상한 신앙으로 인해 이단, 사이비에 빠져 있는 자들이 오늘날도 차고 넘치고 있는 현실인 것이며, 심지어 자기 확신만으로의 신앙 아닌 신앙으로 인해 광기에 차고 천인공노할 일들까지도 벌어지곤 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실상인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자라 하더라도 그 자신이 알게 모르게 죄와 세속들, 자기 소견과 탐욕들 등으로 병들거나 마치 죽은듯한 신앙이 되는 일들 또한 적지 않은 것이며, 물론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만일 처음에 제대로 믿고 구원에 참예한 것이 맞는 것이라면 살면서 범하게 되는 크고 작은 죄악들로 인해 구원이 돌이켜 지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됨이라는 것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고 완전히 하나되시며 전적으로 인치시고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뒤바꾼 것이며 더 나아가 어떤 면에서는 영원에 이르는 개념까지도 포함된 것일 뿐 아니라 또 다른 면으로는 인간적 행위가 구원에 참예함에 있어서 결정 요소가 될 수 없는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그 행위라는 것이 구원이 취소되게 하는 요소일 수도 없는 것인데, 사실상 그렇게 중간에 취소되거나 돌이켜 질 수 있는 개념이나 가능성이나 차원 자체부터가 안 되는 것이며, 만에 하나라도 혹 구원이라는 것이 믿음으로 값없이 참예케 된 이후 중간 중간의 죄악들로 인해 취소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도 취소를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아마 실상은 단 한 사람도 끝까지 구원의 자리에 남을 수 없게 될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죄악들을 범해도 된다거나 회개가 필요 없다거나 죄악으로 인해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일 수는 없는 것이고 오히려 반대인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백성들의 크고 작은 죄악들에 있어 아비의 심정으로 더욱 사랑하셔서라도 더 이상의 죄악들을 반복하지 않고 하루바삐 돌이키며 속히 제대로 된 믿음에 서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시간까지 하늘의 힘과 응답과 복들 등은 막으시곤 하고, 뿐만 아니라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들 등과 같은 징계들을 아끼지 않으시곤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곤고와 비참들에 헤매고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돌고 방황하는 신앙들도 실제로 참 많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모든 사실과 상황들에 있어서, 특히 진정한 믿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믿음을 위해서는 믿음의 모든 본질이 다름 아닌 말씀이라는 사실, 곧 말씀을 말씀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 바꾸어 말해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말씀대로 믿는 것, 그러면서 말씀의 약속된 것을 사모하고 의지하며 구하고 누리며 말씀 그대로 성취되어 지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인데..
단순하게 다시 말해 우리 인생들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믿을 때에, 곧 말씀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되새기며 증거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때 원론적으로는 반드시 겨자씨 만큼일지라도 실천하는 것까지, 혹 아직 그러한 실천의 타이밍이 안 되었다면 그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를 감안하고 포함된 중심과 의지까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들, 상황과 형편들, 여건과 한계들 등을 초월해서 다 아시는 것이기에 따지고 보면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말씀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얼마만큼이든 간에 실천까지 포함되는 것이 제대로 된 말씀의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말씀의 행함의 부분까지 때를 얻었든지 못 얻었던지 간에, 진정 보이고 표현되며 실천하며 증명할 수 있는 실제와 타이밍이 되었든지 안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는 다 포함되고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며,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얼마만큼이든지 간에 모든 시간과 공간들, 현실과 표현들, 한계와 제한들을 뛰어 넘어 반드시 행함의 측면까지 확인되고 분별되며 통찰하시고 진정 감안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실체이자 본질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만일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까지는 잘 할 수 있는데 실천할 마음이나 의지가 아예 없고 완전 분리된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 곧 본질적으로는 말씀의 신앙이 아닌 그냥 참고 정도인 것이고, 말씀을 정말 말씀으로 대하며 믿었다고 볼 수 없으며, 사실 믿지 않는 자들도 그 정도로는 소설을 읽듯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게다가 자신 만의 어떤 이유나 계산이나 목적으로 인해 마음은 진심이 아니고 실제나 진실이나 실천과는 완전히 별개이지만 입술로는 믿는다고 말하고 표현하며 강조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지만 그 둘의 차이들, 곧 진정한 믿음과 아닌 것의 차이들과 그에 있어서의 결과나 열매들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참으로 그 자신이 제대로 된 믿음인지 아닌지는 어느 정도 그 자신이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도 웬만큼 짐작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실상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그 중심이 믿음인지 아니면 참조인지, 말씀의 신앙인지 아니며 문학적 감흥인지를 가장 잘 아시고 정확하게 보시는 것이며,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그때 혹 실천의 기회가 없었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나 시간이 안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기에 말씀에 있어 시간적, 실질적으로 그에 합당한 실천까지는 표현되기는 힘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까지도, 그러한 모든 실상과 여건과 의지와 중심까지도 다 감안되고 포함되지 않을 수 없음이 믿음의 실제인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어떤 한계들에도 관계없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전후, 상하를 다 아시는 것이고 잘 감안하시며 완전히 분별하시는 것이고, 그러한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합해져서 제대로 된 믿음에, 곧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진정한 믿음인지 아닌지에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의 신앙,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으시는 믿음, 곧 처음에 마치 목욕하듯 값없이 참예케 되는 구원에 합당한 믿음, 더 나아가 그러한 처음의 믿음과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역사하시기에 합당한 살아 있는 믿음, 근원적으로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이시자 근본이시면서 다른 무엇보다 말씀 그 자체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생생하게 받으시고 역사하시는 믿음은 말씀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증거하며, 더 나아가 얼마만큼이든지, 어느 정도이든지 간에 반드시 행하기까지 하는..
혹 당장에 행할 기회가 없거나 상황이 안 되며, 사정 상, 시간 상, 여건 상 표현이 안 되는 때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전후, 중심을 다 아시는데, 어쨌든 기회나 상황이 되면, 또는 되었다면 겨자씨 정도라도, 최소한이라도 정말로 행할 수 있는 중심과 의지와 몸부림들까지도 다 포함되는 믿음, 다 포함되는 말씀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의 기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원론적으로는 말씀대로의 믿음에 있어 따지고 보면 얼마만큼 이든지 간에 행위가 빠지거나 분리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며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고, 게다가 그러한 말씀대로의 믿음, 곧 어떤 모양으로든지 간에 말씀의 신앙은 결코 인간적인 힘이나 의, 세상적인 능력이나 방법들로는 원론적으로 불가능인 것으로 근본적으로는 반드시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의를 덧입어야 가능한 것인데..
아무튼 진정 주님께서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는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이유, 심판 날에 행위에 따라 오른편과 왼편에 양과 염소를 나누신다는 비유의 이유,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의 외식적 신앙이 심히 잘못되었고 위험했던 이유, 더 나아가 또 다른 면으로 볼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실제로 말씀을 위해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하며 조롱 받고 위기들을 겪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면서도 실천하기 위해 그렇게나 몸부림쳤던 이유, 심지어는 실제로 사소해 보이는 말씀들 하나에도 정말 목숨을 걸 정도로 실행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함께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사람이 못하고 세상이 짐작도 못할 엄청난 역사들, 응답들, 이적들이 강렬하게 나타나고 생생하게 경험되며 온 지경에 차고 넘치고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선한 영향과 능력과 열매들이 될 수 있게 하셨던 이유들도 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2~26)
('페북두란노서원66'중에서 인용과 추가/밀알서원)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7월 13일(토)2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