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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말로 오랜 눈팅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신 사랑니님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제가 모토님의 글에 달은 답글은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입니다. 판타지의 현실화가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개념임을 밝히려는 의도였습니다. 판타지를 포함한 장르문학 전반을 재고해보자는 의도도 담겨 있었습니다.
한가지 고백하겠습니다. 사랑니님께서는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신 듯 보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판타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답글이 주로 무협을 예시로 든 것이 그 방증입니다. 판타지 운운하는 제가 판타지를 알아서가 아닙니다. 장르문학 전체가 느끼는 한계를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빙자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소재와 배경'이 틀지워진 판타지를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런 판타지는 문외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판타지라는 장르를 이루는 골격은 분명 있겠지요. 무협에서 무공과 협의가 있듯이 판타지도 마법과 모험의 로망이 존재하겠습니다. 무협이 무협적인 요소가 부족하고 판타지인데 판타지라고 불릴만한 대목이 없다면 그 또한 문제겠지요. 하지만 저는 장르보다 소설이 선행한다고 봅니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장르적 특성에 사로잡혀서 될일도 안된다고 봅니다. 소설이라는 큰 안목에서 보면 판타지든 무협이든 추리물이든,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정작, 사랑니님의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제가 판타지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을 자인합니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삼거나 유럽신화를 그 세계관으로 삼는 기존의 판타지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모두 판타지 소설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은 판타지라는 용어에 기존 출판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용어를 환상문학으로 바꾸면 어느 정도 제 의도에 가깝습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먼저 문학성에 대해 애길해야겠군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문학성을 일종의 허구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즉, 우리가 느끼는 문학성은 답 안나오는 문제제기라고나 할까요. 소설을 읽고 나서 무엇인가 '남는' 느낌은 바로 소설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그 문제 자체가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소설을 읽고 나서 재미는 있는데 '남는' 게 없다고들 합니다. 보통 그런 소설은 통속문학으로 분류되며, 무협이나 판타지를 가르킵니다. 어째서 남는 게 없냐면, 소설에서 문제를 모두 해소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런 소설들은 아예 의미 있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이상, 간단히 문학성에 대한 제 견해를 밝혀봤습니다. 저는 문학성이 소설이 획득해야하는 지고의 가치는 전혀 아니라고 봅니다. 모두들 강조하시는 문학성에 신경끄고 재밌는 소설을 쓸 작정입니다. 그럼 재미는 무슨 가치가 있느냐? 재미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재미는 어떤 상위 가치에 종속적이지 않습니다. 독립적입니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거나 인간성의 일면을 드러내거나 하는 것과 전혀 별개입니다. 재밌고, 감동적인 소설을 쓰고 싶은 게 제 바램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껏 저를 문학에 이끈 소설들이 모두 재밌고 저를 감동시킨 탓입니다. 만약 저를 괴롭혔다면 저는 문학과는 담을 쌓았을 겁니다.
헌데,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제게 능력이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아마도 저는 몹시 재미없는 소설을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독자를 고민시키고 반성케하는 소설을 쓸지도 모릅니다. 소설가 이청준이 어느 잡지에서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왜 팔리는 소설 안 쓰시냐고 했더니, 이청준은 자기도 쓰고 싶지만, 쓸 능력이 안 된다며 농담처럼 애길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수문학(보통 이 말들을 쓰시더군요.)을 하시는 분들을 우러러 보는 몇몇 사람들은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순수문학 작가가 마음만 먹으면 대중문학같은 질낮은 소설들 써내는 건 일도 아니라고 경멸하곤 합니다. 마치 순수문학이 대중문학보다 기술적으로 상위에 존재한다는 식으로 착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김용처럼 재밌는 소설을 쓰고 싶지만, 자신이 없습니다.(사족이지만, 김용이 정말 뛰어난 소설가라는 건 녹정기로 증명이 됩니다. 위소같은 인물을 어떻게 창조할 생각을 했을까요. 그처럼 작가 스스로가 일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텐데 말입니다. 그는 녹정기 하나로 구파무협과 자신이 대표한 신파무협의 매너리즘을 타파한 셈입니다. 그리고 저는 소오강호 다음으로 협객행을 좋아합니다. 석파천이란 인물과 모호한 결말이 굉장히 맘에 들더군요.)
사실 가장 현실적인 선택은 따로 있습니다. 추리소설가 김성종을 아시는지요. 그의 소설중에 제가 명작으로 치는 게 최후의 증인과 피아노 살인입니다. 저는 피아노 살인 같은 소설을 꿈꿉니다. 그리고 이외수의 장수하늘소나 최인호의 고래사냥 같은 소설도 쓰고 싶습니다. 그런 소설들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미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작품들입니다. 아, 그리고 이청준의 소문의 벽이나 예언자, 씌어지지 않는 자서전 같은 소설도 제가 쓰고 싶어하는 모델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청준이야말로 전복적 상상력을 가진 뛰어난 작가라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조만득 씨와 얼마전 영화화된 벌레 이야기는 정말 뒤통수칠만큼 기발합니다.
저는 판타지를 의도하고 있진 않습니다. 어쩌다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면 판타지나 무협과 비슷하게 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굳이 무슨 무슨 장르를 신경쓸 마음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사랑니님께 추천드릴 판타지 관련 책은 애석하게도 없습니다. 판타지 관련 책에 밑줄까지 그으셨는데 죄송합니다. 다만 몇가지 그냥 추천할만한 책은 있습니다. 답글에 언급한 몇몇 책들을 판타지 관련 책으로 여기신다면, 꽤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만약 백년동안의 고독도 판타지 소설이라고 보신다면- 독서경력이 일천한 저로서 참 주제넘는 짓입니다. 사랑니님께서도 이 글 보시고 몇권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소설 외 서적은,
산해경 - 신기한 동물이 많이 나와서 나중에 소설에 써먹을 수 있겠다고 느낌.
포박자 - 외단을 다루는 소설은 거의 못 본 거 같애서 참고하려고. (외단은 신선이 되는 약물. 내단은 토납법을 통해 신선의 길을 닦는 방법. 그러나 내단 외단은 전부 상징적인 의미고 실제에 있어서 마음을 닦는 방법만이 있다고 함. 일테면, 흡성대법의 기본 구결이 비워야 채운다라거나, 독고구검 초식을 풍청양에게 사사받을 당시 영호충이 검술을 잊음으로써 지고의 검술을 터득하는 것처럼.)
한국기인전 청학집 - 한국기인전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인을 소개함. 청학집은 우리나라 선도의 맥을 기록한 것. 신빙성이 의심스러우나, 어쨌든 소설쓰기에는 참고할만해서 구입. 출판사는 명문당
환상동물사전 - 그 유명한 보르헤스가 쓴 말그대로 환상동물사전. 여러 환상동물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음
술법과 이보통령 - 쉽게 말해 주문 외우고 부적 쓰는 방법을 통해 귀신을 부리는 비법 수록되어 있는 책. 일명 기문둔갑장신법. 기문둔갑은 역술이지만 기문둔갑장신법은 전우치가 쓰는 도술에 가까움. 역시 신빙성이 의심스러우나 소설쓰기에는 참고할만함. 출판사는 명문당.
불가사의백과 - 읽어보면 그나마 건질 게 있을지도.
그외 각종 문화인류학, 신화 서적 등.
소설은 제가 개인적으로 감동깊게 읽은 책을 추천하려고 합니다. 양해바랍니다.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프 날들 - 제목이 에러입니다. 원제는 엘저넌에게 꽃을. 저는 팔십년대 출판된 천재수술이라는 책으로 봤습니다. 요즘 나오는 판본이 빵가게... 이거 뿐입니다. 저자는 대니얼 키스. 강추.
대부 - 마리오 푸조. 제 4의 k라는 소설도 있지만 대부가 더 재밌습니다. (참고로 제 4의 k는 미국 911테러를 예견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주제가 매우 명확하고, 친절하게도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주제를 밝혀주기도 했네요.)
불멸 - 밀란 쿤데라.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끈질긴 추궁이 돋보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충격으로 느낀 건 소설을 너무나 자유롭게 썼다는데 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기법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죽음 전의 키스 - 아이라 레빈. 아이라 레빈의 소설은 총 세권뿐이 못 읽었지만, 모두 수작이었습니다. 로즈마리의 아기는 물론이고 죽음 전의 키스도 대단합니다. -나머지는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 이 소설이 데뷔작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탄탄한 구성. 일독해 보시면 문학적 향기도 놓치지 않는 작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골렘 - 구스타프 마이링크. 몇년 전에 읽었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군요. 환상문학쪽이라 일독을 권합니다.
벽오금학도 - 이외수. 읽어보셨 가능성이 크군요. 제가 이외수를 좋아했을때 정점에 있던 작품.
편복전기 - 고룡. 김용 팬이시라면 고룡도 아시겠군요. 편복전기는 고룡의 대표작인 초류향 연작의 하나입니다. 절대쌍교, 초류향시리즈, 육소봉시리즈, 소이비도(다정검객무정검)까지 읽어본 결과 이 편복전기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결말을 떠올리자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지는군요.
김성종의 소설 몇편 - 김성종의 작품 스타일은 두가지로 나뉩니다. 그가 영향받았다고 자처하는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첩보 스릴러물과 일반 소설에 추리형식을 가미한 소설.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좋습니다. 최인호도 그렇거니와 김성종도 인물중심의 이야기로 소설을 이끌어 나갑니다. 단편 소설을 쓸때도 상징이나 소도구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저는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소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앞서 말한 두편과 부랑의 강도 추천드립니다. 부강의 강의 경우 완성도는 조금 떨어지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김성종식 인물 시궁창에 처박기가 조금 작위적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작품의 전체를 놓고 봤을때 그정도는 그냥 애교로 넘어가줄만하고 생각합니다. - 최우의 증인과 피아노 살인은 명작 수준. - 최후의 밀서, 고독과 굴욕이 포함된 그의 중단편집도 추천합니다. 그리고 김성종이 쓴 여명의 눈동자도 꽤 괜찮습니다. 제 5열 쓸때 그 소설도 동시에 연재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지요. 조정래의 한강과 태백산맥을 읽어본 결과 여명의 눈동자도 못지않은 수작이라고 느꼈습니다. 한국의 근대사를 조정래와는 다른 관점과 다른 방식으로 그려냈을 뿐입니다. 요즘 안개의 사나이라고 신작 발표했다고 하는데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이문열 소설 두편 - 사람의 아들.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이문열은 정말 무거운 주제도 이렇게 재밌게 쓰네요. 이문열도 자기 소설에서 확실히 읽히는 재미를 고려한다고 합니다. 참고하려고 무협소설도 읽고 그런다고 하더군요. 요서지 보면 무협적인 요소도 드러나있는듯. 문체는 나름대로 운율을 붙인다고 하는데 남용하면 안 좋다고 합니다. 때문인지 어떤 소설보면 문장이 신파로 흐르는 느낌도 없지 않더군요.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말잘하는 사람한테 입담이 있다고 하듯이, 문장력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청산유수로 풀어나가서 대화체하나 없지만 지루한 줄도 모르고 읽은 기억이 나네요.
무쇠탈 - 조해일. 조해일의 소설은 딱 두편 뿐이 못 읽었네요. 갈 수 없는 나라 라고하는 추리소설 하나와 솔출판사에서 나온 무쇠탈. 갈 수 없는 나라는 상류층의 부패와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주제였는데, 꽤 재밌습니다. 그리고 무퇴탈은 단편집입니다. 읽으면서 저는 소재와 배경이 비현실적이지만, 몹시 리얼하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소재와 배경이 알레고리로 작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환상문학적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 소설이 꽤 있습니다. 소설속의 말도 안되는 상황이 끝내 현실에서는 너무도 버젓이 자행되는 역설법. 소재와 배경을 비현실적으로 선택한 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있는 행위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침묵- 엔도 슈샤꾸. 저는 본 줄거리보다 보조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기지찌로한테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재밌습니다. 그리고 별 재미는 없지만 판타지스러운 설정을 한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읽어봤습니다.
악령 - 도스토예프스키. 무신론자가 처한 상황을 그린 소설. 소설내 반신론자 끼릴로프의 주장은 작가 자신도 매우 극복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25시 - 게오르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읽으면서 내내 김영하의 검은꽃과 비교한 작품. 제가 읽은 책에는 25시 뒤에 카프카의 변신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변신 또한 무쇠탈에 나오는 단편처럼 알레고리를 구축하고 있군요. 소설내에선 비현실이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잔인하게 현실적이지요.
페테르부르그에서 온 사나이 - 켄 폴리트. 스릴러의 막장을 달리지 않고 부성애와 로맨스 등을 균형있게 조율했다는 점에서 배울만하네요.
여기까지가 재밌게 읽은 책 중에 추천했습니다.
판티지 관련 책이 아닌 점 다시 한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