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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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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13. 5. 6. 부산일보에 게재된 신병주 건국대 교수의 글입니다.>
가정의 달에 떠오르는 기록물이 있다. '아이를 기른 기록'이란 뜻의 '양아록(養兒錄)'이다. 저자는 16세기의 학자 이문건(李文健:1494~1567). 흥미로운 것은 아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손자의 양육 일기라는 점이다. 이문건은 중종대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명종 즉위 뒤 외척정치가 시작된 후 경상도 성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공부 게으르고 음주벽 있는 손자 체벌
가정도 불운하여 아이들 대부분이 천연두(마마) 등으로 일찍 사망하였다. 유일하게 장성한 둘째 아들 온(온)도 어릴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문건은 모자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전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유배라는 불운에다 자식 복도 없던 시절 이문건에게 희망이 찾아왔다. 1551년 1월 5일 아들 온이 손자를 낳은 것이다. 58세에 접한 2대 독자인 손자. 이문건의 모든 관심은 손자인 수봉에게로 향했다.
아이가 차츰 일어서고, 이가 나고, 걷기 시작하는 모습 모두가 신기했다. 이문건은 손자가 자라나는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양아록'에는 '아이를 기르는 일을 꼭 기록할 것은 없지만 기록하는 것은 할 일이 없어서이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고독하게 거처하는데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앉으려고 하는 것, 이가 나는 것, 엎드리는 것에 관한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게 되면 아마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고 책을 저술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양아록'을 보면 손자는 여섯 달 무렵 혼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일곱 달이 되자 아래에 이가 생겨 젖꼭지를 물었다. 9개월이 지나자 윗니가 생겼고, 11개월 때 처음 일어서는 모습에 대해서는 '두 손으로 다른 물건을 잡고 양발로 쪼그리고 앉았다. 한 달을 이렇게 하더니 점점 스스로 오금을 펴고 일어났다'고 기록하였다. 이 무렵 손자가 할아버지가 글을 읽는 모습을 보고 흉내를 내자, 이문건은 '손자 아이가 커 가는 것을 보니 내가 늙어 가는 것을 잊어 버린다'고 하면서 큰 기쁨을 표시하였다.
6세의 손자에게 찾아든 천연두는 이문건을 긴장시켰다. 아들과 딸을 천연두로 잃었기 때문이다. '열이 불덩이 같고 종기는 잔뜩 곪았는데, 몸 전체가 모두 그러하였다. 눕혀 놓아도 고통스러워하고 안아도 역시 아파했다. 아프다고 호소를 해도 구할 방법이 없다'는 기록에는 당시 별다른 치료법이 없던 천연두에 대해 망연자실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다행히 손자가 천연두를 이겨 내자 이문건은 7세의 손자를 안채에서 사랑채로 옮기게 하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부를 가르치면서 할아버지와 손자의 갈등이 커졌다. 기대만큼 손자가 명석하지가 못했고, 공부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충고를 하던 이문건은 매를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를 대는 이문건의 마음도 편치 않았던지, '손자가 한참을 우는데 나도 울고 싶을 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13세부터 손자가 술을 입에 대면서 갈등은 더욱 커졌다. 만취해서 돌아오던 날 이문건은 가족이 모두 손자를 때리게 했다. 누이와 할머니가 열 대씩 때리게 했고, 자신은 스무 대도 넘게 매를 때렸다. 손자가 14세 되던 새해 첫날 이문건은 '늙은이가 아들 없이 손자를 의지하는데 아이가 지나치게 술을 탐하여 번번이 심하게 토하면서 뉘우칠 줄을 모른다. 운수가 사납고 운명이 박하니 그 한을 어떻게 감당할까'라며 손자의 음주벽을 한탄하였다.
엄한 교육법 등 조선 역사자료 가치 충분
'양아록'의 마지막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에서 이문건은 손자에게 자주 매를 대는 자신에 대해 '늙은이의 포악함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듯하다'라고 반성을 하면서도,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면서 손자에 대한 야속함과 함께 늙어 가는 슬픔을 표현하였다.
400여 년 전의 선비 이문건이 쓴 '양아록'은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할아버지의 양육 일기로, 곳곳에서 조선시대 생활사를 읽을 수가 있다.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애정과 엄한 교육 방법, 여종의 아이 젖 주기, 유아 사망의 최대 주범이었던 천연두, 단오의 그네놀이, 지금보다 현저히 낮은 아이들의 음주 문화 등은 '양아록'이 단순한 양육 일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역사 사료로서의 가치까지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이 연속되는 가정의 달 5월에 조선시대 할아버지가 쓴 양육 일기 '양아록'을 접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