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 허 준 1539년(중종 34) ~ 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의인(醫人)으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냈고, 아버지 론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는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의관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봉직하면서 내의ㆍ태의ㆍ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의 실력을 중국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선조 8)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診)하여 많은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穴鍼灸圖經)』을 하사 받았다. 1581년에 고양생(高陽生)의 원저인『찬도맥결(贊圖?訣)』을 교정하여『찬도방론맥결집성(贊圖方論?訣集成)』4권을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1587년(선조 20)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揚禮壽)ㆍ이공기(李公沂)ㆍ남응명(南應命) 등과 함께 입진하여 상체(上體)가 평복함으로써 호피(虎皮)일열을 받았으며,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痘瘡)이 쾌차하였으므로 당상(堂上)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때에 정원(政院)ㆍ사헌부ㆍ사간원에서 허준의 의료에 관한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가자를 받는 것은 지나친 상사라 하여 여러 차례 그 가자를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그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선조29)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鄭?), 태의 양예수ㆍ김응탁(金應鐸)ㆍ이명원(李命源)ㆍ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다시 정유재란을 만나 의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편집의 일은 중단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어 고증하게 하였는데, 허준은 어의로서 내의원에서 의무에 종사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편집의 일에 전심하여 10여 년만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25권 25책이다. 『동의보감』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거의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內景)ㆍ외형(外形)ㆍ잡병(雜病)ㆍ탕액(湯液)ㆍ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실력을 동양 여러 나라에 드러나게 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판되어 귀중한 한방임상의학서가 되었다.
허준은 『동의보감』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또는 알기 쉽게 한글로써 해석, 출판하였다. 1601년(선조 34) 세조 때에 편찬한 『구급방(救急方)』을『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任元濬)의 『창진집(滄疹集)』을 『두창집요(痘瘡集要)』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 간행하였으며, 1608년에는 노중례(盧重禮)의『태산요록(胎産要錄)』을『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2년(광해군 4)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료하기 위하여『신찬벽온방(新纂?溫方)』1권과『벽역신방(?疫神方)』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신찬벽온방』은 그전 해 12월에 함경도와 강원도 양도에서 온역(瘟疫)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간이벽온방(簡易?瘟方)』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것이며, 후자인『벽역신방』은 그 해 12월에 각 지방에서 발진성(發疹性)의 열병인 당독역(唐毒疫)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편집하였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허준은 내의ㆍ태의ㆍ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계속 받아왔다.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서임하였고, 1604년(선조 37) 6월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으며, 1606년(선조 39) 정월에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陽平君 正一品 輔國崇祿大夫)를 가자(加資)받았다. 그런데 종래 우리나라의 계급으로서 의업은 중서급(中庶級)에 속하였는데, 허준이 대신들과 계급을 같이하는 동반(東班)의 부군(府君)과 보국(輔國)의 지위를 가지게 됨으로써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집하였으나 선조도 끈질긴 계속적인 계청에 할 수 없이 그 가자를 한때 보류하도록 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어 그 다음해 2월에 죽을 때까지 허준은 입진의 수의(首醫)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논하는 모든 일을 전담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아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되어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복직 되었다. 1613년 11월에 70세를 일기로 죽자, 호성(扈聖) 공로의 어의로서 선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다. 허준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가졌다.
허준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 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되었다. 묘역은 약 50평의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로 추정된다. 이들 두 묘 위에 허준선생의 생모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한 기 더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문인석(文人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 쪽으로 파손되어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원비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 『陽平□ □聖功臣 □浚』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선생의 묘인 것이 밝혀졌다.
[출처] 陽川許門(양천허문) 구암 허 준